“실용주의, 한국교회 세속화 촉발”

지난 29~30일 광신대학교에서 한국복음주의신학회 주최로 개최한 제45차 정기논문발표회에서는 `21세기 세속화 시대의 기독교신앙'이란 주제로 주제발표 및 9개 분과로 나누어 18명이 발제 및 논찬을 했다. 이 내용 중에서 권문상 교수(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사진)의 발제 내용인 `한국 전통 문화와 한국교회의 세속화'란 논문을 요약, 정리한다.

 한국 교회는 현세주의 세계관을 기초한 한국의 전통 문화의 영향으로 기독교를 내재화시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를 즐겨하였고 초월적 세계의 신비성에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즉 한국(인) 교회는 우리의 문화의 ‘세속성’을 좇아 교회 안에서 그 세속성의 진면모를 보여 왔던 것이다. 구체적으로 보면, 서구의 세속화 신학자들이 초월적 신학 개념을 버리고 지극히 현세적 차원의 단순화를 지향하였던 것처럼, 우리도 교리를 어떤 형태로든 단순화하고자 하였으며, 부정적으로는 지나치게 실용주의화 하여 교회의 순수성과 본질을 위협하기도 하였고, 또한 교회가 항상 현세의 삶으로부터 초연하지 않고 사회와의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기도 하였다.

한국교회, 교리 단순화 즐겨
 우리 민족은 현실과 초월 사이의 형이상학적 구도에 관심을 기울이기 보다는 내재화를 주요 과제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사건을 현실주의적으로 단순화시키려는 경향을 보여 왔다. 즉, 현실과 초월 세계 사이의 신비함을 주목하기 보다는 현실 세계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직관적이고 단순한 사고를 즐겨하였다. 교회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님에 대한 이해에서, 우리는 서구의 ‘세속화’ 신학자들이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단순화하여 고난을 내버려두는 분으로만, 즉 때로는 고난을 해결하여 주시는 분에 대해서는 소위 ‘기계장치’의 신이라 치부해 버린 채 우리의 고난에 관여 안하시는 마치 이신론적인 하나님으로 단순화하였던 것처럼, 우리도(내용은 정반대이지만) 역시 고난의 해결자로서의 하나님만을 기대하고 고난의 십자가를 지도록 하게 하는 하나님은 생각하기를 싫어하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단순화 하곤 한다. 또한 삼위일체론에서, 삼위 하나님의 삶이 갖는 그 분의 신비한 존재를 그대로 보려 하기 보다는 단순 구도화하는 것을 원한다. 삼위 하나님의 (우리가 보기에) 복잡한 삶, 즉 삼위이면서 하나라는 개념을 이해하려 하여 그 신비를 수용하려 하기 보다는,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부분을 그대로 인정하려하기 보다는, 하나의 하나님의 변형적 형태로서 단순화하기를 즐겨한다는 것이다.
 기독론에서, ‘세속화’ 신학자들이 양성론의 신비함을 제거하고 하나의 인간으로서의 예수로 단순화시키듯이, 같은 원리로, 일부 보수 신학에서는 온전한 양성의 실재를 구체화하여 이해하려하기 보다는 신적 존재로서의 하나의 인격체로, 아니면 진보적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인간으로만 생각하기를 즐긴다. 복잡한 구도, 신비한 메커니즘은 우리 문화에 썩 어울리지 않기에 그렇다. 그리스도의 인격을 양성이 한 인격 안에 존재하는 신비한 그의 삶 그 자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에게는 실상 많은 인내를 요한다.
 교회에 대하여도 우리는 보이지 않는 교회 보다는 보이는 교회를 중시한다. 적어도 로마 가톨릭과 같지는 않더라도 현세의 교회를 화려하게 만드는데 더 관심을 갖지, 우주적 교회를 앙망하지는 않는다. 물론 여기서 칼빈이 중시한, 보이는 교회의 중요성, 즉 지역 교회를 떠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에서의 현재적 교회를 생각하는 것을 가볍게 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도를 넘어 개교회주의화하고, 대교회를 희구^열망하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교회의 초월적 의미보다는 보이는 교회 안에서 누리는 여러 가지 이 세상적 가치에 더 관심을 갖기 때문인 것이다. 아마도 이런 의미에서 종말론적 신앙 혹은 내세적 가치가 우리의 주목을 받는데 어렵게 하는지 모른다. 한국 교회가 대체적으로 현세적 축복을 중시하고 종말론적 신앙에 호소하기를 즐겨하지 않는 것은 한국인들이 갖는 현세주의 세계관을 무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실용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국교회
 우리의 현세주의 세계관은 초월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교리에 우리로 하여금 매력을 갖게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신앙생활을 철저하게 실용주의적이 되게 하는 것이다. 교회가 성장주의로 올인하게 하고, 또한 이것이 최우선 관심사가 되면서 성경에 없는 직제를 도입하여 서리집사, 권사 제도를 만들게 하였던 데서 그 실례를 찾아볼 수 있다. 이는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관심을 근간으로 하고 인간의 문제 해결을 중심으로 삼는, 유교의 인륜적 질서를 중시하였던 데에 따른 것이다. 즉, 한국 교회는 현세주의 세계관을 지닌 무교와 유교의 특징을 수용하여 교회 성장에 활용하였고, 이런 의미에서 “종교 혼합의 관용”을 통해 한국 선교가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고 하겠다. 한편, 이러한 실용주의적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국 교회는 더 심각하게는 이 “세상과 타협하는 (소위 종교적 타락을 의미하는) 세속화”를 촉발시켰다. 교회가 실용주의적이 되는 것은 이와 같이 교회의 순수성 혹은 본질을 벗어나게 하는 위험을 안고 있었던 것이다.

교회의 사회참여-실용주의 활동에 머물러
 한편, 한국 교회는 초창기부터 교회 안에 갇혀 지내지 않았다. 세상적 관심과 유리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이는 초기 한국 교회가 타계적인 신앙을 버린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현실을 무시하는 일변도로 나아가지는 않았다. 인류 민복을 위한 종교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불교가 호국 불교 형식을 취한 것과 마찬가지로 초기 기독교는 한국인의 일제 식민 생활을 간과할 수는 없어 적극적으로 민족 운동에 동참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한국 교회가 사회 윤리적인 삶을 살아간 것은 소위 서구의 ‘세속화’ 신학의 비종교화 개념과 외견상 유사하여 교회의 사회화 성격을 띠게 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외형적 결과를 놓고 보면 초기 한국 교회는 대단히 사회참여적이었다. 그러나 이는 개인구원이라는 신앙을 지키면서 이루어진 것으로 서구의 ‘세속화’ 성격과는 다르다고 하겠다. 아마도 이는 한국인의 현세주의 세계관이 어떤 종교든지 현실을 초연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모두 내재화시킨 노력의 결과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한국의 전통 문화가 일제 강점기에는 사회윤리적인 삶의 형태로, 오늘날은 실용주의적 형태로(세상적 가치를 추구한다는 의미에서의) 교회의 세속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오늘날에도 서구의 비종교화 형태를 취하여 포용적으로 나아가 종교다원주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지만 이는 아직까지 주류를 형성하고 있지는 못하다. 그렇다고 이러한 세속화 신학이 변두리에 머무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문화 자체가 포용적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종교 간의 대화를 고무시키고 있는 데에서(민간방송과 통신사의 협조로 종교간 화해를 주제로 한 홍보 캠페인) 그 사례를 발견한다. 그러나 현재 교회의 ‘사회화’에까지는 전반적으로 나아가지 않더라도 한국 교회의 사회참여 현상은 아주 부족하지는 않다. 빈민들, 노숙자를 돌보는 일, 장기기증, 사회복지 시설 운영 등 교회의 대 사회 봉사활동은 나름대로 적극적이다. 그러나 이 모든 사회 참여적 활동 이면에는 개인 구원이라는 전도의 목적을 지향하기 때문에 이 또한 실용주의적 교회의 활동이라 하겠다. 비록 위에서와 같이 고상한 형식의 모습을 띠면서 말이다.
 일제 강점기 시대에 유입된 기독교는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타계주의적 신앙을 형성하게 하여 교회가 지나치게 사회화로 흘러가게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는 한국 교회가 오늘날 대체적으로 복음주의적이 되게 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세속화의 실체는 그대로 남아 있다. 그리고 우리가 노력하지 않으면 교회는 사회화 혹은 탈종교화로, 또한 포용주의 물결에 휩쓸리게 되고 나아가 지나친 실용주의 추구로 말미암아 교회는 세속적 타락에의 길로 점점 더 기울어지게 될 것이다. 이는 우리의 전통 문화가 바로 그러한 세속화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며, 한국 교회는 바로 그 문화의 영향력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천 년에 걸쳐 한 나라의 민족적 정서를 결정지어온 세계관, 예를 들어 우리의 현세주의 세계관은 좀처럼 바뀔 수 없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그러기에 한국 교회의 세속화를 막는 길은 결코 쉽지 않다. 양승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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