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강의(31) - 유라시아 기독교 2000년]

1. 동서 유럽시대가 온다

500(AD) 년대의 로마 제국과 기독교를 말 할 때, 우리는 '콘스탄티누스의 한계'를 함께 보아야 한다. 그는 제국의 통일, 통일황제, 통일된 유일 종교를 사는 날까지 간절히 원했다. 그가 니케아 회의(AD 325년)에서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단 하나의 기독교를 원했다. 그러나 그가 애착을 가졌고, 그의 신앙 모범이었던 아리우스파(단성론으로 분류)를 정통 기독교와 교류시키지 못했다.

제 1차 니케아 회의에서 아리우스를 포함한 그들은 이단 정죄가 되었고, 그들의 문서들은 파기 되었다. 하지만 아리우스파 기독교는 더욱 기세를 올려 당시 게르만 이동기에 유럽 전역으로 전파되었다. 아리우스 파는 이단 정죄를 받았으나 교세 확장에 있어서는 정통파(로마교구)를 뛰어 넘었다. 4세기 초부터는 본격 이동을 시작한 게르만 민족은 아리우스파 기독교로 정신무장을 했다.

같은 기독교 중에서도 양성론과 단성론 사이에서 게르만 민족은 체질상 단성론의 경향이었다. 그들은 예수그리스도를 신(神)으로 섬기는 것 보다 신의 대리인으로 신뢰하는 것이 그들의 성격에 맞았을까. 기독교가 예수가 등장하면서 시작 되었으면 모르지만 고대 이스라엘, 유대교의 연장선에서 보았을 때는 정통 교리보다 단성론이 받아들이기가 쉬었으리라. 단성론 기독교에서는 '삼위일체'론 때문에 골치를 앓지 않아도 되었으니 말이다.

게르만 족 깊숙한 곳, 수십 개 종족으로 그 성격도 다양한 그들이 있는 곳에는 아리우스파 기독교가 함께 있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아리우스파 게르만 세력이 아니었으면 로마-게르만 문명의 유럽은 없었을 것이라는 단정을 한다.

그러나, 아리우스파 기독교가 게르만족과 함께 아라비아, 시리아, 페르시아, 알렉산드리아 등의 단성론 기독교가 7세기로 이슬람 등장(AD 610∼) 이후 기독교 세계사에 결정적 타격을 주게 된다.



2. 콘스탄티노플과 서로마


기독교 역사를 좀 더 세밀한 탐색을 하게 되면 콘스탄티누스(AD 308∼334)에서 로물루스 아우구스투루스 서로마 황제가 AD 476년 9월 4일 오토아케르 게르만 장군에 의해서 폐위 된 부분이다. 로마의 황제, AD 476년 현재 콘스탄티노플에 황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물루스의 폐위로 로마제국의 절반인 서로마의 멸망으로 볼 것인가.

오토아케르가 로물루스의 권좌 앞에서 '그 자리는 내 자리!' 라고 했고, 로물루스에게는 많은 재산을 주어 캄파니아의 친척들 있는 곳으로 보냈고, 콘스탄티노플로 사절단을 보내 로마 황궁의 변화를 보고 했다. 어떤 학설에서는 오토아케르가 황제의 자리를 탐하는 것이 아니라 귀족신분 정도를 원했다는 것이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의 사정은 이탈리아 지경의 통치자 한 사람까지 신경을 쓸 만큼 여유가 없었다. 오토아케르는 물론 그 뒤에도 60여년 동안 로마 황궁은 방치되어 있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영웅적인 황제 유스티니아누스가 서로마 지경 영토를 재정복 하면서 로마제국은 최대영토를 보유하기도 했다.

그러나 300년 쯤 지나서 프랑크 왕 칼이 신성 로마제국(AD 800∼1806)을 교구장(교황)의 도움으로 세우면서 콘스탄티노플의 영광은 로마의 동쪽으로, 또는 동로마 제국으로 불리운다. 비잔틴 제국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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