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개혁기의 한 형태-재세례파운동(1)]



         재세례파 초기에 난폭한 방법으로 살해당한 현장들.


         ■싣는 순서■

① 후터라이트의 신앙, 순교
② 멘노나이트
③ 아미쉬공동체

16세기 종교개혁의 선두주자로 마틴 루터를 떠올리지만 그것은 시발점이었다. 루터의 종교개혁 정신을 이뤄내기 위해서는 많은 이들의 희생이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함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이 기독교인을 핍박하는 수위는 악랄했다. 인권은 물론 목숨까지 앗아가는 것도 서슴치 않았다. 그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낸 신앙의 모습을 세 번에 걸쳐 소개하려 한다. 이를 통해 오늘 한국교회 안에 안이하고 해이해진, 그래서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주님이 부여하신 세계와 멀어진 모습을 회개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길에 자신을 곧추 세울 수 있기를 소원하면서….〈편집자 주〉




중세 기독교는 수도원 운동과 대학교육이 활발해지면서 변화의 조짐을 보였다. 특히 수도원 운동의 연장선에서 피터발도의 저항운동, 프랜시스와 도미닉 수도단의 왕성한 발전이 돋보이던 시대를 뒤이어 유럽의 남쪽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의 빛이 솟아올랐다.

고전주의의 부활, 인위적 신권(교황권)의 허점을 비껴 일어난 인문주의는 교황권의 허상을 벗기기 시작하더니 AD 1309년 교황좌가 프랑스 지배영토인 아비뇽으로 끌려가는 수모를 역사는 교황권의 '아비뇽 유수'라고 정리했다.

그 이후 교과서적 수순을 따라서 영국의 위클립, 곧이어 보헤미아의 잔 후스,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가 개혁자의 별로 마르틴 루터가 역사 무대 주인공 되는 길을 열었으니 그 해가 1517년, 그리고 10월 31일을 본격적인 종교개혁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루터를 중심한 세력이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면, 루터의 종교개혁을 뒤이어 제2의 종교개혁기의 출발점이던 1525년은 쯔빙글리파에서 출현한 재세례파(Anabaptist)는 루터나 칼빈을 중심으로한 개혁파의 또다른 줄기를 이룬다.

동시대라 하지만 1517년과 1525년 유럽 정신사에서도 차이점을 인정해야 할 만큼 간격을 둔다. 1517년은 루터의 희망대로 가톨릭의 개혁수준이다. 루터는 결코 새로운 종파의 출현을 원치 않았다. 단, 95개 조항의 항의문을 교황권이 받아준다면 그의 저항은 가톨릭의 개혁의 결과를 따를 수 있었다. 그래서 루터나 쯔빙글리는 더이상 영주나 교황권과 정면 충돌을 원치 않았다.



아나밥티스트 개혁의 세 형식


AD 1525년 쯔빙글리 제자들이 1차 개혁기의 분위기를 거부했다. 교회가 로마교회로부터 나왔으면 개혁파의 길을 가야지, 정부나 교황권 눈치를 보면서 개혁의 퇴보를 보여준다고 판단했다. 더구나 '유아세례'에 대한 거부감을 표시하면서, 다시 세례받기 운동을 벌이게 되었다.

그래서, 세속권력으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갈망했던 개혁파 세력이 '아나밥티스트'라는 이름으로 각 지역에서 저항의 불길을 당겼다.

쯔빙글리의 일곱 제자 그룹이 모두 핍박과 순교의 길을 떠난 뒤, 제2기 그룹으로 제이콥 후터, 멘노 시몬스, 그리고 아미쉬 운동이 이어지고, 21세기 현재까지도 500여 년 동안 생존력을 가진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제1, 후터라이트 공동체


1. 제이콥 후터

재세례파는 그들을 정신적 근원을 초대교회로부터라고 주장한다. 16세기 당시 개혁시대를 맞은 프로테스탄트운동과 함께 활동을 시작했으나 그들 재세례파는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예루살렘 공동체'의 복원을 시도했다. 사도행전 4장의 내용 중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행 4:32∼)에 근거하는 운동이다.

다시 말하면, 16세기의 아나밥티스트 개혁은 '근원적 개혁'이었다. 기독교 역사상 사도행전  4장에 근거한 '예루살렘 공동체 교회'의 복원을 시도하는 운동이었다.

16세기 재세례파 운동을 알고자 하면 예루살렘 공동체 교회를 알아야 한다. 매일의 교회(the everyday church)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예루살렘 공동체는 사도행전 5장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 사도행전 6장 스데반의 체포, 사도행전 7장의 스데반 순교, 그리고 사울이라는 이름의 바울 등장으로 예루살렘 공동체 교회는 안식일 형태의 교회로 교회의 형태와 존재가 바뀐다. 이후 1천5백년 만에 재세례파의 등장으로 사도행전적 예루살렘 공동체의 복원을 시도한다.

2. 재세례파 사람들

재세례파 사람들은 개개인의 명예나 이름을 중요시하지 않았다. 여기 등장하는 제이콥 후터(Jakob Huther)는 AD 1529년 오스터리츠에 처음 그의 모습을 드러냈다. 후터는 모자를 만들어내는 평범한 상인이었다. 후에 쯔빙글리의 일곱 제자 중 하나인 조지 블라우락의 뒤를 이어 티롤지방의 재세례파 신자들을 위한 지도자(목사)가 되었다. 그가 목사라지만 그들의 회중 안에는 목사들이 많다. 모든 회중이 목사 수준의 성경과 영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누가 더 정확하게 자기 재산을 내어놓았으며, 누가 더 영적권위를 내려놓는가에 덕성(德性)의 우위를 가늠해 보는 정도였다.

1535년 후터와 모라비아에 있는 모든 재세례파 신자들은 더더욱 가혹한 박해를 받았다. 페르디단드 왕이 귀족들에게 재세례파들을 모두 내쫓으라 하였다. 권력 앞에서 작은 세력일 뿐인 영주들은 왕의 명령을 따랐다.

후터와 그의 추종자들은 자기들의 터전을 뒤로 하고 떠나야 했다. 박해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가혹해졌다. 일행 중 목사인 마르틴 말러(Martin Maler)와 밀가루공장 노동장 열여섯 살 소년 등 여섯 명의 아이들이 체포되어 4주 동안 감옥생활을 하다가 쫓겨났다.

그러나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다시 체포하여 전원 참수형에 처한다고 하였다. 그때 형집행관은 16살 밀가루공장 소년을 붙잡고 후터의 제자 되기를 포기한다면 자기의 양아들로 삼겠다고 회유하였으나 그 소년은 후터의 제자로서 참수형을 원한다면서 형장으로 갔다.

제이콥 후터의 동료이자 선교사였던 피터 보이트(Petter Voit)는 1534년 오스트리아에서 체포되어 에겐부르크(Egenburg)에 있는 어둡고 침침한 지하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의 발과 손은 쇠고랑으로 단단히 채워졌다. 조여매는 쇠붙이의 충격으로 손목과 발목은 하얀 뼈가 드러났었다.

아무런 희망이 없는 지하감옥에 세워진 채 매달려 있는 피터 보이트는 자기 발가락을 갉아먹는 쥐들을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다. 그는 수년 후 석방되었으나 쥐가 뜯어먹은 발가락 때문에 두 다리를 잘라야 했고, 1570년 숨을 거두었다.

후터의 제자들은 모라비아 숲 속에서 살았다. 들과 숲, 공동묘지나 뚝심 있는 영주들 집에 숨어지내기도 하였다. 그들을 보호해 주는 영주들은 신분을 숨기는 재세례파들이었을 것이다. 제자들과 함께 몸을 숨기고, 각처의 제자들을 지휘하는 후터의 목에 현상금이 붙었다.

현상금 40길더(guilder, 대학교수 1년치 봉급 정도)였다. 1535년 11월 후터와 그의 아내 카트리나가 오스트리아에서 잡혔다. 그는 형틀에 묶여 가혹한 고문과 채찍에 시달렸으나 어느 형제들 이름 하나도 발설하지 않았다.

페르디난드 왕은 후터를 만인 앞에서 처형하기로 했다. 특별고문이란 이렇다. 후터의 몸을 묶은 채 얼음물에 담갔다가 뜨겁게 달궈진 방에 집어 넣었다. 이를 반복하면서, 상처 난 그의 몸에 브랜디를 붓고 불을 붙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의 공개 화형식은 1536년 2월 25일 이루어졌다.

그들은 감시자의 눈을 피하여 탈출 할 수도 있었으나 협박과 죽임 당하는 과정에서 두려움 없이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제자들에게 심어주었다. 그리고 공동체 관리에 있어서 지도력을 발휘했다. 다만 그의 의지를 꺾으신 이는 하나님 한 분, 하나님은 그를 순교의 절차를 통해 하늘로 부르셨다.


3. 후터라이트 리더쉽

죽음이다. 잘 죽는 것이다. 죽이려는 자들 앞에서 죽어주는 것이다. 후터라이트 연대기를 살피면 후터라이트 선교사들이 겪은 고통과 고문에 대한 기록들이 수없이 많다. 그들 중 티롤 지역의 선교사 한스 퓌후너(Hans purchner)의 순교 이야기를 보자.

그는 발가벗겨졌고, 끈에 묶여 공중에 매달려 있었는데, 그는 스스로 설 수도 없고, 손으로 음식을 입으로 가져갈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엄청난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가 누구와 지냈는지 또 누가 어디에 숨었는지의 정보를 당국자들에게 밝히지 않았다.

그는 발목과 손목에 쇠사슬이 묶인채 6개월이 넘도록 지하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는 무릎을 구부릴 수조차 없게 되자, 앉은 자세로 몸을 기둥에 기대었고, 그 모습으로 참수형에 처해졌다.

한스 퓌후너를 회유시키려던 가톨릭 사제 레오나르드닥스(Leonnard Dax)는 얼마 후에 가톨릭 사제직을 버리고 후터라이트가 되었다.

한스 크랄(Hans Kral)은 타우퍼스 지역에서 선교하다 잡혔다. 그는 형틀로 온 몸을 잡아 늘이는 아주 잔인한 형벌을 당했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의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고, 신앙 동지들의 이름을 발설하지 않았다. 크랄을 다시 감옥에 집어넣었는데, 그가 머무는 감옥에는 벌레들이 너무 많아서 그가 음식을 먹을 때면 음식을 받는 즉시 선 채로 모두 먹어야 할 정도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벌레들이 음식을 뒤덮어 버리기 때문이었다. 그는 약 23개월 감옥생활을 한 후 처형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같은 방식으로 순교의 길을 걸어야 했다. 재세례파 기독교인들은 또다른 개혁파 교회 사람들에게 또는 로마 가톨릭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 수는 헤아릴 수 없었다. 신앙이란 묘수가 따로 없다. 죽어주는 방법이 최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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