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은 십자가에서 나를 대신하여 또 나와 함께 세례를 받으시고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서 하늘에 오르시고(내게 오시고) 성령으로 오사 주 예수께서 내게, 내 안에 또 내가 주 예수 안에 영원히 함께 하심을 증거하는 믿음이다.  이 믿음은 단순한 긍정, 또는 신뢰가 아니라 말씀의 현재화(現在化)이시다. 예수가 내게서 오늘의 현재를 나와 함께 사심을 인정하고 신뢰하는 이것이 믿음이다.  이 믿음에 동의하여 자기 삶을 여기에 집어 던진다면 반드시 새창조의 빛이 발광하여 크리스찬의 터전을 견고케하여 그들이 주도해 가는 역사의 밝은 날을 기대할 수 있겠으나 오늘의 세계, 기독교의 어느 모습에서도 쉽사리 헬레니즘을 극복해내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콘스탄틴이 이룩한 기독교의 니케야 시대가 떠오른다. 그때 기독교는 콘스탄티노플의 오만스러운 그리스 철학에 매달린 환상의 기독교 시절이었다. 아라비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지도 모르는 기독교, 겨우 알렉산드리아의 단성론자 아리우스에게 당시 세계 기독교의 완충역일 수 있었던 네스토리우스의 거대한 세력을 내주고 말았지 않던가. 역사의 날들을 되씹어 본다면 AD 43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이단 정죄^추방된 네스토리우스 사상은 이집트 아라비아 사막을 떠돌다가 아라비아로 건너가서 모하멧의 영특한 종교성에 불을 질렀으며, 또 한 세력은 대륙 진출로를 찾아 에뎃사에 기지를 두고 페르시아와 장차 당나라로 진출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였다.  역설이요 또 추상적 발상이기도 하지만 네스토리우스는 당나라는 집어삼키지 못하는 경교(景敎)가 되어 소멸된 듯 하지만, 사실상 네스토리우스의 제자나 다름없는 모하멧의 이슬람은 당나라 변경 중앙 아시아 일대의 세력으로 생존하고 있지 않은가.  아직도 기독교인들은 자기 목숨의 절반이 이슬람에 있으며, 빼앗겼는지 내주었는지는 모르나 이슬람의 저 모습이 자기 모습의, 또 자기 생각의 절반임을 아직도 모르고 있으니 그 無知가 참으로 크다. 기독교는 앞으로도 이슬람의 사상적 또는 집약된 힘에 밀려 현재 가지고 있는 지분 중에서도 상당수 더 내주어야 할지 모른다. 왜 이렇게 미련한지, 아직도 깨달음이 부족해서 눈만 껌벅이고 있는 기독교의 초라한 처지를 안타까워한다.  이 같은 치욕을 극복해내고 예수 그리스도가 제시한 기독교의 웅대찬란한 무대를 이 하늘 아래 한 번 쯤 펼쳐 보이려면 기독교여, 거듭나라! 다시 태어나라. 거듭남의 은혜를 받지 못했으면서 자기를 속지 말고 진실로 진실로 다시 태어나라.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지 마라. 예수의 십자가를 비웃지 마라. 거듭, 다시 태어나라! 다시 태어나면 개인주의에서 해방을 받는다. 교파주의의 마수에서 벗어나게 된다.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 예수 흉내도 내지 못하는 탐욕의 자식들, 끝없이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기를 쓰고 있으며, 경쟁자가 될 법 하면 짓밟으려 들기만 하는 비겁한 자리에서 어서 떠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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