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개혁기의 한 형태-재세례파운동(2)]



    재세례파는 무차별한 학살 속에서도 자신들의 신앙을 지켜냈다.


       ■ 싣는 순서 ■

 ① 후터라이트의 신앙, 순교
 
 ② 멘노나이트

 ③ 아미쉬공동체



멘노시몬스가 이끌고 있는 멘노 나이트의 바라는 바 소원이고 자신감이었다. 멘노 나이트는 아무래도 멘노시몬스 신부가 1536년 재세례파 운동에 뛰어들면서 출발한다.

1. 멘노의 재세례운동 전후 사정


재세례파 운동은 1525년 쯔빙글리의 7제자 그룹이 당시 스위스 종교개혁 운동이 퇴행적이라는 이름으로 '재개혁'을 선언하면서 출발한다. '재개혁' 또는 1517년 마르틴 루터의 개혁은 제1개혁기로 존중할 수는 있으나 루터의 개혁을 본격적인 개혁으로 보지 않았다. 당시 로마 가톨릭은 세속 권력화 되어 있었던 때라 쯔빙글리 제자들은 세속권력으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요구했다. 그런데 그들의 지도자인 쯔빙글리는 물론 개혁의 지도자들이 세속권력으로부터 자유하지 못했고, 유아세례 문제와 만인제사장 요구는 제자그룹으로서는 반드시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다.


1) 유아세례 거부와 재세례
쯔빙글리 제자들은 '유아세례'에 동의하지 않고 다시 세례를 받기로 결심하고 이를 결행했다. 이 결단은 16세기 종교 개혁기의 큰 충격으로 나타났다. 재세례파 그룹은 마르틴 루터나 쯔빙글리 간의 성찬예식의 차이에 비하여 유아세례를 반대하고 자기 양심의 판단능력이 있는 성인세례 주장이 과오가 될 수 없다고 자신했다.

그런데 태어나서 곧바로 세례를 받아야 하느냐, 성인이 되어서 받아야 하느냐의 각기 다른 주장을 이유로 사람을 재판은 커녕 그 어떤 절차도 없이 즉결 사형, 무조건 죽이는 형벌로 다스리는 시대가 공식적인 종교개혁 출발점인 1517년 이후 8년 만에 일어난 돌발사태였다.

참으로 무자비한 학살극이었다. 그러나 세례를 몇살에 받느냐는 문제로 그토록 큰 역사의 비극을 남긴 것은 사실상 기독교가 숨기고 싶은 표면적인 이유다. 로마 가톨릭 마저 깜짝 놀랐던 종교개혁 세력끼리 죽고 죽여야 했던 핵심은 '만인제사설'이 화근이었다.

2) 만인제사설은 기독교의 아킬레스건이다.
마르틴 루터가 순진하고, 또 심사숙고 하지 못하고 입을 열었던 '만인제사'는 결코 만만치 않은 신·구 기독교의 마지막 카드였다. 그것이 개혁자들이 만장일치로 동의한 가톨릭의 7성례 중 성찬식과 세례식을 고수하기로 결정한 내면의 이야기이다. 성찬과 세례를 위한 별도의 직분이 성직자의 필수요건으로 묶어두었던 것이다. 만약 성례식 마저 목사가 독점하지 못하면 종교의 체제가 무너지는데 바로 그것을 재세례파가 건드린 것이다.

그러나 만인제사의 성경해석론은 세속정치에서는 '왕권신수'의 완전 종결이고, 종교에서는 '성속이원화'의 종멸인데 바로 이것이 아직까지 기독교의 고뇌이듯이 재세례파가 주목했던 것은 '재세례'가 아니라 '성속단일화'에 있었다.

16세기는 물론 21세기인 오늘날도 기독교의 다수 교파들은 '성속이원화'를 죽으면 죽었지 양보할 수 없다인 것이다. 역사 기독교의 마지막 관심이 여기에 있다. 앞서 재세례파의 종교개혁은 마르틴 루터의 1517년과의 거리를 8년, 그러니까 1525년의 재세례운동은 제2 종교개혁기가 되며, 오는 2013년 이후의 개혁운동은 제3 종교개혁 운동으로 역사정리를 해야 할 것이다.


3) 멘노 사이먼스의 재개혁 운동
멘노 사이먼스는 1536년 그의 나이 40살 때 재개혁(세례) 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사제가 아닌 필립 옵베로부터 세례 또 감독 직분 성례까지 받으면서 멘노나이트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그러나 재세례파 순수정신은 지도자, 또는 영도자라는 용어는 사용치 않는다. 모든 성도, 곧 형제 자매들이 동역자의 신분이기에 그렇다.

멘노는 필자가 '재세례파의 증흥조'로 명명했다. 필자가 본격적으로 역사공부를 시작했던 50년 전 여러 학자들의 기독교 역사책을 살펴보니까 재세례파를 마치 흉물 대하듯이 하고 있었다. 기피대상이었다. 그러니 좀 더 주의깊게 살핀 결과 그들은 기독교 학자들의 표현대로 폭력배요, 과격파 집단이 아니었다.

재세례파는 후터라이트, 뮨스터 라이트, 멘노나이트, 아미쉬 등으로 분류하는  이들 중 뮨스터 라이트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비폭력과 불살생(不殺生)의 복음의 대원칙에 충실했다.

재세례파 운동의 정치적 경향은 뮨스터 라이트와 토마스 뮨쪄의 농민반란 운동 때문에 종교개혁의 동승자로 받아들이기를 꺼리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여기 이 부분에서 뮨쪄의 농민반란운동은 토마스 뮨쪄 보다 마르틴 루터가 답변해야 할 당시 농민반란과 영주들 사이의 문제이다.

왜냐하면 독일의 농민반란은 마르틴 루터의 만인제사론에 근거했기에 답변책임자 또는 해결책임자가 루터여야 했다. 천하만인에게 제사권이 주어진다면 우리들 농노들도 제사장 같은 신분으로 노예된 자리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뮨스터 라이트는 재림운동으로 발전하여 재림시기가 1533년이라고 못을 박았던 사태로 재세례파 전체에게 오욕을 안겼다.


2. 멘노 사이먼스와 평민의 자유


재세례파는 초기의 순수했던 열정에 큰 손상을 보았다. 뮨스터파가 폭력을 행사하다가 또 다른 폭력에 의해서 제압이 되어버렸으며, 뮨스터 라이트가 잔여세력 300여 명으로 프리슬랜드에 재림왕국을 건설한다면서 도시를 요새화 하다가 당국으로부터 전원 학살되면서 재세례파는 과격혁명단체라는 오명을 뒤집어 썼다.

그 무렵 멘노 사이먼스는 본인 스스로에게 결단을 요구했다. 그는 1524년 3월 28살의 나이로 성직자가 되어 핑점(pingjum) 교구사제로 있다가, 후일 자기 고향인 비트마르솜 사제로 있었다. 그러나 그는 사상적으로 개혁파 신앙에 동의하면서도 용기가 없어서 머뭇거리다가 뮨스터파 소탕전 희생자로 자기 형제가 포함된 사실을 확인하고, 사제복을 벗어던지고 재세례파 운동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멘노는 잘못된 신앙을 위해서도 목숨을 바치는 뮨스터파의 현장을 확인한 뒤 크게 반성했다. 뮨스터 라이트의 잘못된 신앙을 바로잡기 위해서 자기가 먼저 목숨을 걸었더라면 300여 명의 뮨스터파 생명들 중 한 사람이라도 건졌을 것이라는 생각까지 하였다. 그리고 그는 큰 수치심을 느꼈다.

멘노는 탄식했다. “뮨스터파의 잘못 인도받은 어린 양떼들의 피에 대하여 내가 자유롭지 못하구나! 저들의 피가 내 영혼에게 너무나 큰 부담을 주는구나! 아, 내 영혼이 편히 숨을 쉴 수도 없구나!”

멘노는 교황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예수의 십자가를 지는 삶이 두려워서 망설이다가 자기 영혼에 큰 타격을 받았다. 유럽의 재세례파 개혁운동은 멘노가 사제 면허장을 찢어버리고, 죽어도 좋다는 자세로 재세례파 운동에 뛰어들면서 다시 살아났다.

멘노는 이론을 갖춘 행동가였다. 그는 방대한 재세례파 신학과 운동역사를 기록했다. 그는 1536년 재세례파 운동에 뛰어들어 그가 사망할 때까지 20년 동안 교황, 신성로마 황제, 국왕 등 세 권력으로부터 현상붙은 사나이로 살았으나 그는 단 한번도 잡히지 않았다. 그토록 살벌한 감시망 속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였으나 죽음이 그를 피해갔다.

당시 재세례파 지도자의 평균 수명이 2∼3년이었는데 '그는 어떻게 장수했을까'라고 필자가 오하이오주 멘노나이트 책임자에게 물었더니 재세례운동이 제2의 종교개혁으로 자리매김하게 하기 위해 문필가 이기도한 멘노의 생명을 연장시킨 것 같다는 답을 내게 주었다.

멘노 사이먼스는 마르틴 루터의 '만인제사설'을 '평민적 자유'로 신학용어를 변경하여 성직자와 평신도 시대를 단일화 시키는 전향적인 개혁사 발전을 시도한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멘노 나이트는 2003년 자료에 의하면 모든 신자가 1,297,716명으로 전 세계 65개국에 흩어져서 활동하고 있다. 그들은 아프리카, 호주, 중앙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러시아, 유럽, 캐나다와 미국에 분포되어 있다. 대륙별로는 아프리카에 451,959명, 북미 451,180명, 오세아니아 208,155명, 유럽에 53,272명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세계 통계인데 한자리 숫자까지 계산할 수 있는 멘노파 기독교의 특징을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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