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린도후서 1:8∼10


본문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복음 전도와 선교 현장에서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고 했다.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받았다는 말이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 있다. 우리 인생이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셨다. 복음으로 무장한 바울은 죽지 않았다. 사명을 다하기까지 하나님께서 “큰 사망 같은 고난”에서 건지셨기 때문이다.

누구나 한번쯤은 자살을 생각한다. 삶의 현장에서 심신에 엄청난 고통이 밀려오면 자긍심, 자존감이 약해지고, 욕구 불만과 심각한 좌절감에 빠지며 삶의 이유를 상실하게 된다. 죽음에 대한 공포도 엄청나지만 생존에 대한 고통이 너무 큰 나머지 결국 자살하게 된다.

자살의 신앙적인 이유들은 무엇인가? 교회에 출석한 신자라도 복음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성령으로 거듭남의 체험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회개하여 옛 사람을 버리고 새 사람을 입어 새로운 피조물이 되지 못하니 복음적 인생관이 정립 될 수 없다.

이상의 의미들을 한마디로 요약 하면 '예수님을 믿지 않아서'이다. 어차피 생존에는 고통이 따른다. 그렇지만 그 고통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동물들도 엄청난 스트레스와 고통을 받고 있다. 하지만 동물의 왕국에서 자살은 없다. 잡혀 먹힐 때 먹히더라도 미리 죽지 않는 그 강인한 생존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죽을 용기가 있다면 그 용기로 살아야 한다.

자살을 정의해 보자. 자살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생명에 대한 심각한 훼손이다. 하나밖에 없는 생명, 한번밖에 없는 인생을 경시한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배신이며 그 주권에 대한 거역이다.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 한 분이시다(신 32:39, 나는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빼앗을 자가 없도다).

또한 예수를 죽음에 내어놓기까지 인간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을 배반한 것이다. 인간이 택할 수 있는 최악의 행동 즉, 극단적인 살인이며, 당사자의 모든 것을 앗아가고 가족들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후유증을 남긴다. 사탄의 미혹에 빠진 일이며, 지옥백성이 되어 사탄의 영원한 노예로 살겠다는 것이요, 복음의 영광스러움을 현저히 손상시키기는 일이다. 자살에는 분명히 불신앙의 영적인 배후, 즉 사탄이 도사리고 있다(엡 2:1∼7, 벧전 5:8).

다른 사람을 죽인 살인은 회개할 기회라도 있지만 자살은 회개할 기회마저 순간적으로 상실한다. 그러므로 회개 없이 죽으면 구원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물론 궁극적으로 구원과 멸망의 심판 문제는 하나님의 주권에 있는 것은 틀림없다. 어떤 개인의 자살에 대해 함부로 단정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목회자는 강단에서 생과 사의 원리는 분명히 가르치고 알려 주어야 한다. 그래서 기독교인이라면 어떤 경우에도 자살은 용납될 수 없는 일로 인식하게 해야 한다.

기독교인들은 세상의 모든 소망이 끊어진다 해도 하나님의 보호하심의 약속과 그 나라의 소망으로 넉넉히 이긴다(겔 16:6). 생명은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주인을 대신하려는 가장 무서운 교만이며 극도의 이기주의이다. 기독교인의 자살, 그것은 결코 있을 수 없다. 자살은 그 어떠한 명분으로도 미화되거나 왜곡되어서는 안 된다.

자살자에 대하여 사람들은 “오죽했으면 그랬을까”하고 어설픈 동정심을 내세운다. 그 얇은 동정심으로 사태를 오도하려는 것은 성도다운 양심의 결여이며 복음을 바로 아는 자의 진실한 자세라고 보기는 어렵다. 유족들은 물론이요 주위의 사람들이 그와 같은 악순환에 빠지지 않도록 예방함이 최선이다.

교회는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최선을 다해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삶의 엄청난 중압감을 감당하지 못하여 자살의 유혹에 빠져가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예수의 생명으로 무장 하도록 최선을 다해 도와야 한다. 생명의 존귀함을 알게 하고, 자살해서는 안 되는 본질적인 이유를 진지하게 가르쳐야 한다. 개인의 내적 상황을 세밀하게 살피고 새로운 생존 가치를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와 같이 상처받은 영혼들을 보살피고 소망을 주는 교회들이 되어야 한다. 예수께서 존귀하게 여기신 생명을 위해 교회가 끊임없이 생명줄을 던져줘야 한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 세상을 이기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려 줘야 한다.

생은 존귀한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천하보다 귀한 것이 바로 인간의 생명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야 한다. 삶의 현장의 고통은 언제, 어디에나 있다. 그래도 살아야 한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살아야 한다.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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