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종점이 멀었어. 길을 재촉해야 해. 해는 중천을 비껴 석양을 기웃거리는데 가야할 길이 지나온 걸음보다 더 많이 남았어요. 나그네 길 재촉이다. 우리들 기독교 신자들은 길을 잘 알고 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신 예수의 말씀을 일찍이 배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만 아는 지식은 아직 모자라다. 그 대신 예수 위에(안에, 함께) 내가 또 거기에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예수가 길이면 내가 거기에 그와 함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나도 매우 평안한 마음으로 그 길이 되어 주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예수 계시는 곳에 내가 있어야 한다. 예수 세상에 계실 때 종종, 지금은 때가 아니다. 내 때가 아니라 (훼방자) 너희들의 때라고까지 말씀하였다. 가나 혼인집에서, 초막절 기간 동생들과의 대화에서, 그러나 요한복음 12장에서는 드디어 때가 왔다고 말씀하였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그 때, 그 영광의 시간은 골고다의 죽음의 시간이다. 오늘의 기독교가 예수를 살고, 전도하고, 선교하는 일이 곧 순교의 과정이고 결과인데 그것을 모르고 기분만 내는 것을 보면 교회의 앞날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요한복음 진행순서로 보면 대다수의 기독교 신자들이 11장에서 놀고 있다.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만에 예수의 은혜로 다시 살아나는 그 순간, 그 감격의 시간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베다니 나사로의 축제는 요한복음 12장에 선명한 그림으로 나와 있다. 베다니 부잣집 시몬의 마당에 예수를 위한 모처럼의 축제가 벌어졌다. 음식 만들기에 재능이 있는 마르다는 물론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모였을 것이다. 죽었다가 살아난 자 나사로가 예수 곁에 있고 축하객들과 함께 제자들이 예수 주변에서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이제는 왔다. 그때가 왔다. 영광의 좌, 다윗의 홀을 들고 이스라엘을 회복할 시간이 왔다. 세베대의 두 아들은 일찍이 예수의 좌우 권세를 요구한 바 있고, 그들의 어미가 예수께 다짐을 받고자 했던 일도 있다. 그 밖의 제자들도 예수가 다윗의 보좌에 앉을 그때 자기들의 신분을 생각하면서 매우 유쾌한 잔치는 계속되었다. 그때 마리아라 이름하는 여인이 옥합을 깨고 그 항아리에 담긴 기름을 예수의 발등에 붓고 그의 머리털로 예수의 발을 닦아내면서 울고 있었다. 가룟 유다가 끼어들어 시비를 한 덕분에 마리아와 예수의 속마음을 우리는 알게 되었다. 가난한 자 운운하는 가룟 유다에게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요 12:7) 하였으니 쉽게 풀어 말하면 저 여인은 나의 장례절차를 밟고 있다, 내 산 몸에 염을 하고 있다고 하신 것이다. 이 일이 있은 후,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요 12:23) 하여 영광의 때, 그 때는 곧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그 때라고 말씀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 같은 해석법이면 오늘의 기독교가 요한복음 11장과 12장 사이에서 놀고 있으면서 11장까지는 깨달았는지는 모르나 12장 이후에 무지하여 소경이 되어 버리고 걷지 못하는 자가 되어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하고, 갈 길이 아직 많이 남아 있음도 몰라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어 있다. 깨어 일어나라! 깨달으라! 해는 저물어 오는데 갈 길 많이 남아 있구나. -無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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