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특집] 부활신앙, 부활공동체


1980년 전에 예루살렘 골고다 언덕에서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 처형을 당했던 사람이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삼일 째 되는 날 새벽에 살아났다. 살아난 그는 33년의 생애에서 자신을 따르며 ‘메시아’로 알아보았고 고백했던 제자들을 찾아갔다. 몸을 입고 땅에 살았을 때 말했던 것처럼 그는 다시 살아났다. ‘하나님의 아들’만이 할 수 있는 인류사에 없었던 일이 주후 33년도에 일어났다.

다시 살아나신 이의 이름은 ‘예수’. 제자들은 놀라워했다. 정말로 말씀하신 대로 살아나셨다는 그 사실은 충격이었다. ‘은총’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를 믿게 된 이들은 그가 ‘육체’를 입고 자신들과 살고 있지는 않지만 그가 약속한 ‘성령’을 통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체휼하며 살았다.

예수가 부활한 지 50일째 되는 날 명령하신 대로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성령’이 그들에게 임한 사건을 통해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비로소 ‘제자’들이 되었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공동체가 오늘날 ‘교회’로 찬란하게 이어지고 있다. 예수님의 부활사건이 이뤄진 지 198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 신앙과 공동체의 면면이 이어져오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길에 서서 오늘도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고, 생명 가진 모든 이들을 끝끝내 사랑하시기 위해 죽음의 길(십자가)을 마다하지 않으셨던 예수님의 길을 오늘도 살아내는 그리스도인들은 과연  어떤 마음으로 그 길을 가는 것일까.



버거운 개척 6년, 그러나  “한 알의 밀알이 있었다”


[부활 1] 유기적·종말론적 공동체 향해 매진하는 분당비전교회  곽한영 목사


암으로 사모 떠난 지 2년, 개척교회지만 선교·교육 지원 꾸준히 하는 ‘힘’ 놀라워
유초등부 어린이 보물에 ‘엄마, 아빠’ 외 ‘교회’가 포함될 정도로 유기체적 공동체



# 갑작스러운 죽음

그리스도를 따르는 목사 곽한영(41).

곽한영은 활짝 웃는다. 만나서 세 시간, 잠시잠깐 덤덤한 표정일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 웃는다. 그것도 미소만 짓는 게 아니라 화~알짝. 그런데 그 웃는 모습에는 슬픔의 빛깔이 내포돼 있었다.

곽한영은 신학(총신대신학대학원)을 마치고는 복음 전사의 최고 사역이라고 배운 선교사를 계획하고 준비했다. 그래도 나이가 있을 때 외국으로 나가 공부 먼저 하자는 생각으로, 나가기 전에 건강 검사를 하고 가자는 가벼운 마음에 아내와 함께 응했는데… 아내가 암이었다. 이곳저곳 전이된 상태였다.

부목사로 교회에서 사역 중에 발생했다. 유학의 꿈도 접었다. 아내의 병은 호전되는 듯 했지만 아니었다. 2004년 재발, 그러나 훌훌 털고 일어났다. 그런데 2007년 또다시 재발했다. 개복해서 수술하다가 의사들이 멈추고 나왔다.

2월에 그런 일을 겪었는데, 7월에 ‘분당비전교회’를 개척했다. 누구도 개척에 선뜻 나서지 않으려 하는 시기, 곽한영 부부는 그것을 알면서도 시작했다. 죽음, 종말론적 경험을 맛본 자의 절박함, 또 목사라는 훈련을 받은 이의 믿음이 없었을 리 없다.

분당비전교회는 설립 주기가 되면 전세금에서 1천만 원씩을 빼서 중국에 교회를 세우고, 필리핀 바기오에 교육 부지를 세울 수 있도록 지원하는 데 사용할 정도로 선교에 혼신을 다했다.

그런데 아픔을 근근이 견디어 주던 아내가 2011년 6월 이 세상에 이별을 고했다. 자신의 분신인 사랑하는 딸(당시 9살)과 자신의 반쪽인 남편을 남기고, 하나님의 공동체인 교회가 막 4살이 될 무렵에.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신앙 공동체를 세우고 그렇게 말 없이 부름을 받았다.

곽한영은 하루아침에 아내를 잃었지만 울 시간이 없었다. 남편이었지만 교회 공동체를 이끌고 있는 ‘목자’였다. 계획되어 있던 청년부 MT, 전교인 수련회 등이 줄을 이었다. 신자들은 묵묵히 감당할 사역을 함께 했다. 아내의 기도와 소망이 그대로 묻어있는 곳 교회. 장소를 옮겨달라는 건물주의 요청으로 현재의 상가 건물 2층으로 2012년 12월에 이전, 둥지를 틀었다.

몇 백 평도 될 법한 상가 건물, 여러 업종들이 간판을 내걸고 있었지만 분당비전교회 간판이 보이지 않는다. 2층에 올라서서야 귀퉁이에 작은 팻말이 있을 뿐이었다. 한켠에 자리한 교회는 훈훈함이 이곳저곳에서 물씬 배어나온다.

아내의 아픔을 이야기 하는 대목에서는 절제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기자도 자세히 질문하지 못한다. 한쪽에 있는 꼬마가 올해 11살 딸아이, 이야기 하는  동안 옆으로 와서 쫑긋 귀를 기울이다가 저쪽으로 가서 책을 보다가 한다.

개척교회 사모라는 특성상 정신적인 것 외에도 새벽기도회, 전도, 심방 등 ‘몸’으로 하는 부분을 아프다는 이유로 마다하지 않았던 아내였다. 병원 다니는 시간이 많았다. 회복을 위해 더 깊이 배려해야 하는데 믿음이라는 이유로 함께 하자고 했던 그것이 홀대요 학대가 아니었나 하는 자책이 든다. 아내가 떠난 뒤 그는 매일 혼자 울었었다. 울음은 혼자 있을 때 슬픔을 토해내는 언어였지만, 딸과 함께 할 때나 신자들과 함께 할 때는 ‘웃음’으로 자연스럽게 표현된다.

   
30여 명의 좌석이 마련돼 있지만 선교·교육에 매진하고 있는 분당비전교회.


아내 없이 2년. 딸과 함께 곽한영은 어머니집으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교회에 새벽 기도회만 나오시게 하고 주일에는 다른 교회에 출석하시도록 했다. 자칫 혈연 중심의 교회로 흘러갈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 함께 울 수 있는 주님의 공동체로

곽한영 목사가 슬퍼할 때 신자들은 위로했다. 고통을 겪어냈고, 아픔을 안고 사는 목사인 것을 알아서인지 신자들도 아픈 속내를 조금은 덜 어렵게 털어놓는다. ‘성도의 아픔에 귀를 기울여라’는 은사 은준관 총장(실천신학대학원)의 가르침은 성도들과 유기체적인 하나님 나라 공동체로 서가는 지표가 되었다.

아픔은 사람을 성숙하게 하고, 한 뼘은 더 견고하게 해준다는 말이 있듯이 곽 목사 개인에게도, 성도들에게도 그랬다.

매달 첫 주일에 성찬식을 갖는데, 주님의 죽으심을 그분이 오실 때까지 기억하자는 말씀은 사모의 죽음과 오버랩 되면서 더한층 예수님의 아픔을 깊이 체휼하게 되고, 그 죽음은 절대화되어 오늘 ‘그리스도인’으로 자리하게 된다.

장년 15명, 어린이와 청소년까지 합하면 35명이 되는 것이 현재 분당비전교회의 숫자지만 선교와 구제 등에 사용하는 액수는 장년 60명 몫만큼 해내고 있다.

12개 작은 교회들과 연합으로 아름다운선교회를 결성해서 필리핀 바기오와 이토콘에 벨국제학교의 교육선교와 다구판 의료선교 운영 등의 사역에도 함께 하고 있다.

수원에 지인의 후원으로 비전선교센터를 마련했다. 평생을 선교에 헌신한 이들이 언제든지 와서 쉴 수 있도록 준비돼 있다. 앞으로는 은퇴 이후 준비가 제대로 안된 선교사들을 맞아들일 준비도 이곳에서 할 계획이다. 여름과 겨울에는 12개 교회가 영어캠프를 한다. 곽 목사가 영어를, 또다른 목회자들은 기독교 세계관, 영성 등 자신들이 가진 달란트로 강사로 나서니 모두들 좋아라 한다. 4박 5일간 참여한 목회자들은 간식 담당 등으로 봉사하며 마음 뿐 아니라 몸으로도 아이들을 섬긴다.

사모 1주기 추모예배에서는 아름다운장학회를 설립했다. 선교지 학생들을 키우기 위해 장학금을 지원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처럼 곽한영 목사의 사역에는 다음세대를 키우는 교육과 선교라는 두 가지 키워드가 핵심으로 자리하고 있다. 특히 어렵다고 선교비를 줄이는 방식은 아예 생각하지도 않는다. 비신앙적인 것을 알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선교도 ‘옵션’이라는 생각으로 신자들은 생각하게 될 것이며, 그렇게 배운 신자는 하나님께 향한 예배도, 헌금도 ‘옵션’일 수 있다는 비신앙적인 폐해가 자리하게 될 것을 알기 때문이다.

혼자서 목회를 감당하지 않고 리더들을 세워서 그들로 하여금 가르치게 하는 ‘전 신자의 사역자’로 진행한다. 아비의 마음으로 성도들을 돌아보고, 성도들은 그런 마음을 배워 덜 아픈 자가 더 아픈 자를 돌보고, 믿음이 있는 자가 조금 더 연약한 자를 보듬으면서 자라는 하나님나라 백성 공동체와 역사종말론적 증언공동체로 나아가는 데 힘껏 노력한다.

아직은 혈기가 왕성할 수도 있는 시기, 목회적 욕심과 야망도 있을 법한데 종말론적 경험으로 큰 아픔을 겪고 난 그는 흰머리만큼이나 몇 곱절 더 산 것처럼 업(up)돼 보인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포기’라는 내면적 단어를 상기시킨다. 10년이 넘도록 개척교회 단계를 면하지 못한 선배들을 보는 시선도 따뜻해졌다. 그들이 존재하는 것만으로 지역 사회에 선교적인 사명을 감당하고 있음도 알게 되었다.

전교인 수련회 예배 시간, 한 성도가 우니까 하나 둘 씩 훌쩍훌쩍, 모두 다 함께 울 수 있을 정도로 주님을 중심으로 ‘하나’된 유기체적인 공동체성이 있는 교회. 또 ‘나의 보물은 엄마, 아빠, 교회, 목사님’이라고 고백하는 유초등부 어린이가 있기에 자연스럽게 ‘공동체’가 아이들의 보물로 자리하고 있는 교회다.

“이 정도면 분당비전교회는 작은 교회이지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공동체이지 않겠느냐”며 곽 목사는 또 웃는다. 화~알짝! 부활의 봄을 노래하면서….


양승록 기자





그리스도의 완전한 비움에서 채움의 지혜 발견


[부활 2] 지역나눔공동체 비영리법인, 비움과 채움  김윤옥 대표


그리스도 고난 있었기에 목표 이룰 수 있어
주민들이 기부한 물건·작품이 가치 발한다



“자신을 비워내야 우리 주위에 무엇이 결여되어 있고 무엇이 필요한지를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고안해낸 것이 ‘선택적 가난’입니다. 자발적인 의지로 부족함을 선택할 수 있어야 다른 사람들을 돌아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비움과 채움’(이하 비채) 김윤옥 대표(27, 찾는이광명교회)에게 그러한 ‘선택적 가난’의 롤 모델은 누구일까. 그리스도였다. 그리스도는 가난한 자와 병든 자, 소외된 자를 먼저 찾아갈 수 있도록 청빈한 삶을 사셨고 고난을 자청하셨다. 그리고는 죽음마저 선택하셨다. 죽음이라는 완전한 비워냄은 부활이라는 그리스도의 ‘진정한 가치’ 실현을 위해 필수 불가결한 일이었다.

김 대표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비워내는 고난의 길을 선택함으로써 그분의 목표를 성취하실 수 있었다고 믿고 있다. 그리스도의 자발적 선택에 따른 파급력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물리적인 행적은 유대와 사마리아 땅에만 국한되었지만, 그의 뒤를 이은 바울과 사도·속사도들을 통해 복음은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렀다.


# 비움, 부활을 위한 초석

사람들 각자는 나름의 ‘가치 실현’을 위해 살아가고 있다. 평범한 사람에게는 열심히 돈을 벌어서 넉넉하게 삶을 살아가는 것이 가치 실현의 전형일 것이다.

김 대표도 자신만의 가치를 고민하고 실천에 옮기고자 노력했다. 아무래도 그저 많이 벌어서 잘 사는 것이 전부는 아닌 듯싶었고, 무언가 공허하고 삶의 활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광명시 소하동에 설립한 ‘마을가게 살림’은 김 대표가 지난 4년 동안 지역에 뿌린 씨앗에서 거둬들인 작은 열매이자, 앞으로의 무궁무진한 가치 실현의 장으로 성장할 공간이다. 아담한 가게는 각종 재활용품들과 공정무역 상품들, 유기농 물품들로 가득 차 있다. 공정무역 커피를 내려주면서 김 대표는 말했다.

“여기 있는 물건들 대부분은 마을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것이나 스스로 만든 작품을 기부한 것들입니다. 저는 이 사업을 시작으로 우리 지역을 ‘가치’로 채우려고 했습니다. 단순히 물질로 채우는 것이 아니고 지역 공동체가 지속가능한 상생의 궤도에 오를 수 있도록, 새롭게 부활할 수 있는 삶의 터전이 되도록 말이죠.”

김 대표는 대화 가운데 수차례 ‘후세’, ‘후대’라는 말을 사용했다. 본인이 공동체적 기반이 척박한 곳에서 밭을 일구어 놓았으니, 이제 같이 뜻을 함께 하려는 후발 주자는 보다 많은 결실을 지역 주민들에게 한가득 안겨다 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때는 비채의 영향력이 광명시 소하동을 넘어서 시·도로 확장될 수도 있을 것이다. 김 대표는 그러한 즐거운 상상과 함께 현재의 ‘선택적 가난’을 흔쾌히 받아들이려고 한다.


‘비움과 채움’에서 운영하는 광명시 소하동에 자리한 ‘마을가게 살림’.

김 대표는 처음 가졌던 마음가짐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동네 아저씨에게서 예수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마천루처럼 높게 솟은 대형교회 안에서는 볼 수 없는 자신을 비워낸 사람, 그리고 서로 소통하고 연합하려는 따뜻한 감성을 지닌 존재는 의외로 동네 아저씨들 같이 평범한 이웃들이었다. 그리고 자신도 친근한 동네 이웃과 같은 자세로 일관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사람들과 같이 유기농 잼을 만들면서, 그리고 원예치료 수업으로 사람들을 위로하면서.

지역 공동체의 부활은 반드시 필요한 것일까. 김 대표는 부활절을 맞아 다시금 자신의 위치를 되돌아보고 있다. 그리스도가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썩어서 수많은 생명을 살리셨던 일을 잊지 않고자 한다. 자신을 위해서 죽으신 예수께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고 싶다고 한다.

이제 뜻을 같이 할 사람들과 지역 공동체를 위해 ‘가치들’로 채워 넣어야 할 과제가 남아있다. 소외된 사람들을 한 명이라도 더 발굴하여 그들에게 자립의 기회를 제공하고, 설령 장애인이라도 인간다운 삶의 영위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지역 주민들이 기부한 물품들을 합리적인 가격으로 이웃들에게 제공하고,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에 대해 새롭게 생각해보고 배울 수 있는 교육의 장도 구현하고 싶다. 김 대표의 말 그대로 “학생들은 학생회를 찾아가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듯이, 마을 사람들이 ‘거기 가면 되더라’고 하는 장소가 이곳이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 채움, 부활의 결실

단순히 무소유가 그의 가치를 대변하는 전부라면 김 대표는 이곳 광명시 소하동에 보금자리를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김 대표가 말하는 ‘비움’은 현실적인 삶의 터전에서 이탈하여 무위를 좇는 행동이 아니다. 김 대표의 관심은 작게는 마을 공동체, 넓게는 지역 사회의 발전에 있다. 그러나 그 ‘발전’이 높은 건물과 토지 개발로 상징되는 외적 성장을 말하는 것이 아님은 당연하다.

“서울에서 살면서, 그리고 여행을 통해서 타지의 삶을 바라보면서 깨달은 사실이 있어요. 건물이 웅장하고 소비력이 뛰어나서 지역이 훌륭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이웃과 서로 돕고 어울릴 수 있으며 소외된 사람 없이 다 같이 잘 지낼 수 있는 곳이어야 살만한 공간이 된다는 것이죠.”

소비 제일주의가 만연한 서울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광명시. 김 대표는 자신의 가치 실현의 장으로 광명시 소하동을 선택했다. 필연적으로 선택해야 할 당위가 있던 것은 아니지만, 서울과 같은 대도시와 비교해 봤을 때 사람들과의 연계성이 미약하게나마 존재하는 이곳을 선택한 것이 김 대표의 ‘초기 실험’을 위해 바람직한 결정이었는지도 모른다.

처음은 부녀회를 만드는 것부터 시작했다. 이웃 사람들과의 접촉을 차츰 늘려갔다. 뜻을 같이할 사람과 따뜻하고 사람 냄새 나는 곳을 만들어 보고자 조우했던 모임이 서로서로 끈끈한 줄처럼 이어져 촘촘한 ‘연결 고리’로 발전했다. 벌써 그것이 4년 전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그러한 노력의 가시적인 결과물이 작년에 설립된 ‘비움과 채움’이라는 공식적인 단체이다. 지역 사람들의 물건을 기부 받고, 그 수익금 전액을 지역 공동체 사업에 환원하는 작업이 이 단체의 주된 활동이다.

촘촘한 연결 고리는 지역의 소외된 사람을 찾아내는 데 효과적이었다. 그리고 마을에서 어떤 일이 시급한지를 판단하는 데 용이했다. 연결 고리를 통해 알게 된 장애인들에게 그들의 음악적 재능을 발휘하는 기회를 부여하고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게 도와주는 ‘비채 앙상블’ 오케스트라단, 진로 고민이 가득한 청소년들을 위한 ‘광명청소년진로지원센터’의 진로 교육 등은 소하동에서 살아가는 이웃들을 위해 너무나 필요하고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다.

궁극적으로는 제도권 내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이겠지만, 비채와 같은 작은 노력이 누적되어 제도적 정책의 결실을 맺을 수 있을 것이라고 김 대표는 보았다.

물론 새롭게 일구어 나가는 과정은 순탄치 않다. 김 대표는 ‘비움과 채움’을 실현시키는 과정에서 현실적인 어려움도 적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하고 싶은 사업이 있어도 재정 상태나 인원 규모를 봤을 때 시행에 옮기기 힘든 일이 많이 있었다. 엉뚱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김 대표가 정당 활동도 겸하여 하는 것을 두고 혹자는 이를 정치적 행위의 연장선상으로 간주하기도 했다. 현실적으로 자체 사업 보다는 각종 단체들의 후원이 절실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선택적 가난’이라는 것은 경우에 따라 매우 무서운 실체로 다가오기도 한다. 아직 보람을 느끼는 일보다 힘에 부쳐서 하지 못하는 일이 더 많다. 본격적으로 채워 넣어야 할 일들을 시작도 못했기 때문에 더욱 안달이 난다. 그러나 더불어 사는 삶의 터전을 일구어 나가기 위해서, 진정한 가치의 결실을 얻기 위해서 김 대표는 고민하고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 작은 발걸음, 큰 전진


많은 수는 아니지만 소하동 외곽 네거리 지역에 세운 ‘마을가게 살림’을 찾는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김 대표는 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 장소로 구입한 20평 남짓한 창고 얘기를 꺼내면서 들떠 있다. 이제 점점 김 대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진정한 가치’들이 열매를 맺어 지역 공동체가 부활할 수 있는 단계에 한 발자국, 한 발자국씩 앞으로 다가가는 듯하다.

새로운 부활의 장으로 비채가 성장하기에 아직 많은 장애가 남아있지만, 김 대표는 자신의 진로 교육을 받은 청소년들이 ‘누나’, ‘언니’하면서 따르는 것을 보며 새로이 힘을 얻는다.‘세모나’라는 단체는 ‘마을가게 살림’에 손수 깎은 나무 선반을 기부하기도 했다. 돕는 손길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김 대표는 지역의 회생과 자립을 위한 소생의 움직임, 꿈틀거림을 보여주는 이웃들을 통해 부활을 간접 체험한다.

김 대표에게 단체 취지에 맞는 구체적인 사업 기획과 재정적 지원이 언제나 고민거리로 남지만 어떻게든 해결해 나가고자 다짐하고 있다. 아직 ‘어린’ 나이여서 외부의 곱지 않은 시선이 있을 수 있고 재정적 기반이 미약한 김 대표이지만, 가치 실현에 공감할 사람들이 하나둘씩 같이 ‘비우고 채우는’ 과정에 동참한다면, 그리고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교육의 끈을 놓지 않고 열심히 배워나간다면, 전혀 다른 모습으로 태어난 지역 공동체를 발견하는 일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인턴 배성진 기자





“왜 섬기는 삶을 사느냐고 묻지 마라”


[부활 3] 장애의 몸으로 노방전도와 장애인·노숙인 섬김에 헌신하는 
            이석우 목사(김성심 사모)


공사장 사고로 모두 죽고 혼자 살아났지만 하반신 마비
몸의 가시인 욕창 심해 사모 만류-‘전도 삶’ 멈춤 없어



“나를 통해 죽은 하나님이 전해질 수도, 산 하나님이 증거될 수도 있습니다. 날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재상봉의 축복 속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힘 있게 증거 되길 소망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죽음을 이기고 생명의 길을 여신 부활의 주님,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삶에서 드러내야 하는 사명이 있다고 믿는 이석우 목사(59), 그래서 그의 기도는 ‘날마다 부활 체험’이고, 부활을 과거의 사건이 아닌 현재적 의미로 살아내야 한다는 열망으로 가득했다.

노방전도 24년째, 그리고 장애인 공동체인 포천 임마누엘의집을 설립한 지 22년째이며, 장애인들과 함께하는 예배처소인 부활교회 담임이기도 한 이 목사는 2년 전부터 의정부에서 노숙인들을 위한 무료 급식을 실시하고 쉼터도 마련했다. 이 목사는 29살에 사고로 하반신 마비가 된 후 장애인으로 살아왔다. 20명의 지적장애인들과 함께 사는 포천임마누엘의집을 기자가 찾아간 날도 간이침대에 몸을 의지한 채 엎드려 누워 있었다. 무리한 노방전도로 고질병이 되어버린 욕창이 또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자신의 몸도 자유롭지 못한데 어떻게 이런 일들을 감당할 수 있을까. “몸이 장애를 입었다고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가요? 자녀는 부모를 기쁘시게 할 의무가 있어요. 부활의 기쁨을 날마다 주시니 전하지 않고는 못 견딘다”며 엎드린 채 인터뷰 하는 내내 뜨거운 모습이었다. 그가 이 모든 사역을 감당하는 힘은 매일의 삶에서 경험하는 ‘부활’의 능력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곁에서 “하나님 앞에 충성된 종이고 싶다”며 헌신의 삶을 살아온 아내 김성심 사모(58)의 역할이 컸다.


#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아무리 문명 이기가 발달해도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죽음의 문제. 인간은 죽음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발버둥치지만 인류역사상 죽음을 면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신이면서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만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다. 그래서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로서 죽음으로부터 도망치고자 발버둥치는 나약함이 아닌 죽음에 생명으로 맞서는 힘 있는 삶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교회 안에는 부활도, 그 이전에 경험되어야 할 나 자신의 철저한 죽음도 없고 오로지 예수 탄생을 알리는 성탄절만 크게 자리하고 있다.

이 목사는 미지근하고 형식적인 신앙으로는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할 수 없다며 타성에 젖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날마다 부활 주님과의 재상봉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목사가 노방전도에서, 그리고 장애인들과 노숙인들에게 목이 터져라 외치는 것 역시 “세상 지식으로는 온전한 변화를 얻을 수 없고 부활의 주님을 만날 때 생각이 변하고 삶이 새로워진다”는 것이다. 이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깨달았고 현재도 그의 삶에서 증명되고 있는 바다.

운수업에 종사하다 서울로 올라와 일자리를 구하던 그는 지인의 소개로 건축 현장 막노동꾼으로 나섰지만 그것이 평생 장애인으로 사는 길이 될 줄은 몰랐다. 공사장 지지대가 무너지면서 4층 높이에서 떨어져 함께 일하던 이들 모두가 죽고 자신은 하반신 마비가 됐다.

몸이 약해지니 폐병이 악화돼 피를 토하고 욕창으로 살이 썩어 들어가는 상태였다. 감각이 마비된 발에 개미가 떼로 집을 짓고 살아도 모를 정도로 비참했다.

“젊은 나이에 장애를 입고 6년간 두문불출하며 세상에 대한 원망과 죽고 싶은 생각뿐이었어요. 걸을 수 있다는 말에 양방이든 한방이든, 갖가지 종교를 다 찾아다녔지만 소용없고 마음에 분노만 쌓였지요. 어느 날 교회 권사님이 오셔서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전도자의 삶을 살라고 하셔서 노방전도에 나섰어요.”

지인의 전도로 교회에 가게 됐고 절망으로 가득 채워가던 방에서 기도하면서 “장애를 주신 데는 뜻이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예수님은 성령을 체험케 하시고 그를 끈질기게 붙들고 있던 사망의 그림자를 거둬내고 마음 가운데 삶에 대한 소망과 헌신이 싹트게 하셨다. 기도 중에 입에서 찬송이 터져 나왔고, 장애의 몸으로 비참하게 방 안에 처박힌 채 죽을 순 없다는 생각의 전환이 일어났다.

“너는 예수 믿고 죄 사함 받지만 지금도 어둠을 헤매는 형제들이 허다하다”는 음성을 듣고 용기 내 전도에 나섰다.

집창촌이었던 ‘청량리 588’과 서울역에서 전도지만 돌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담대해졌다. 십자가를 손에 들고 메가폰에 대고 찬양을 부르며 큰 소리로 외쳤다. ‘부활이요 생명’으로 오신 예수님을 전하고 이생의 삶이 끝이 아니라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 목사의 노방전도에 대한 반응은 제각각이다. 휠체어에 앉은 채 필사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그의 다리를 부여잡고 통곡하며 자신의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회개하는가 하면, “장애인 주제에”라며 눈살을 찌푸리면서 싸늘한 표정으로 지나쳐가기도 했다. 잠자는데 시끄럽다며 노숙인에게 주먹으로 얻어맞기도 다반사였다.

그래도 이 목사는 다시 태어나도 노방전도, 장애인 공동체, 노숙인 섬김 사역에 매진하고 싶다고 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꼭 이런 것뿐일까. 하지만 이 목사는 “예수님이 좋아서 전하지 않을 수 없다”며 매일 노방전도에 나서고 함께 공동체로 살아가는 이들에게도 끊임없이 예수를 전한다.

부활을 몸에 지닌 자는 반드시 삶으로 나타난다는 것이 이 목사가 깨달은 부활신앙이다. 부활을 경험한 자라면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발견하고 하게 되더라는 것. 노방전도나 장애인 공동체, 노숙인 사역 역시 그의 힘과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신다는게 그의 고백이다.

“예수님은 ‘내 형제 중에 아주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일이 바로 내게 한 일’이라고 말씀하셨어요. 복음 전하는 소리를 듣고 단 한 사람이라도 사망에서 생명으로 돌이킬 수 있다면 평생 이 일에 목숨 걸 겁니다.”

포천임마누엘의집에는 20~66세까지 20명의 지적장애인들이 함께 살고 있다. 지금은 직원들을 두고 있지만 설립 이후 15년 동안 이들을 먹이고 입히는 일을 모두 이 목사 부부가 감당했다.

전도에 미쳐(?) 비나 눈이 오는 날을 제외하곤 휠체어를 타고 전도에 나서는 이 목사가 나가고 나면 장애인들을 돌보는 일은 고스란히 김 사모의 몫이었다. 김 사모는 유치원 미술 지도교사로 일하던 중 헌신의 삶을 소원하며 장애인 섬김에 나섰다가 이 목사를 만났다.

‘작은 자 돌봄’을 사명으로 여기는 남편의 뜻에 따라 신혼 초부터 장애인 공동체를 만들어 봉사해온 김 사모 손의 지문은 다 닳아 없어진 지 오래다. 힘든 고비가 많았다. 늘 바닥을 드러내는 재정과 부족한 일손으로 버거웠지만 김 사모를 가장 고통스럽게 한 것은 의견 충돌로 인한 이 목사와의 싸움이었다.

김 사모는 장애로 인해 어린 나이에 부모로부터 버려진 아이들을 어엿한 사회인으로 길러내겠다는 욕심에 용변 가리기, 옷 입기, 식사예절 등 작은 것들부터 교육에 매달렸지만, 전도를 마치고 돌아온 이 목사는 그런 사모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는커녕 아이들을 다그친다며 나무라는 것. 한바탕 싸움을 벌이고 나면 각자 다른 방에서 기도하며 마음을 추슬러야 했다.

김 목사의 몸에 가시인 욕창도 고통의 요소이다. 휠체어에 앉아 하루 5~6시간씩 전도하는 탓에 욕창으로 1년에 몇 번씩 병원 신세를 지고 있다. 예배 인도도 침상에 엎드린 채 할 때가 있다.



              장애인공동체 포천 임마누엘의집 예배시간.


남편의 건강이 걱정돼 “전도나 공동체 하나만 택하라”는 말에 주저 없이 “전도자의 삶을 살겠다”는 이 목사를 보며 김 사모도 더 이상 전도를 막지 못했다. 이 목사는 도리어 “욕창은 자칫 교만으로 가는 마음을 다스리는 가시”라면서 사역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욕심이 싹틀 때마다 욕창이 찾아오는 것 같다며 느긋한 반응을 보였다.

고아원은 미래에 대한 소망이 있고 양로원은 끝이 보이지만 장애인 공동체나 노숙자 섬김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주변의 만류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이 목사와 김 사모의 생각은 다르다. 기껏 설교한 후 “천국은 어떻게 가나요?”하면 “돈으로 가요” 하며 동문서답을 내놓는 지적장애인들에게 실망했다가도 뜨겁게 박수 치며 찬양하는 모습이나 설교 시간에 ‘응, 응’ 하며 맞장구를 치기도 하고,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면서 설교 내용을 인용하는 모습, 또 노숙인들 중에는 설교 시간에 뛰쳐나가 눈물을 쏟아내고 다시 들어오는 것을 보며 이들의 마음속에 믿음이 싹트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사역은 적임자가 나타나면 맡도록 하고 훗날 함께 노방전도 하며 여생을 보내고 싶다는 꿈을 안고 있는 이석우 목사·김성심 사모는 “신앙의 길은 쉬운 것 아니다”라며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외면한다면 자녀의 삶일 수 없다”며 생명 허락하시는 날까지 섬김에 전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부활은 그들의 가슴과 삶에 꽃피고 있었다. 오늘도 쉼 없이.


정찬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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