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연구원 원장 이계황 장로와 본지 발행인 조효근 목사



     아브라함의 자손인 기독교·유대교·이슬람교

완전한 자기 포기-합일의 과정 절실


조효근 목사(이하 ‘조’) : 오늘 대담에서는 〈들소리신문〉(이하 ‘들소리’) 창간 36주년을 맞아 ‘들소리’와 한국교회가 나아갈 길을 회장님과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들소리’는 역사의 결정론적인 측면을 넘어서 ‘과연 인류사의 오늘과 내일에 기여할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저는 과거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된 헤브라이즘이 현재의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의 모태·원류가 되고, 동시에 세 종교가 합일의 과정을 밟아가는 것이 인류 구원사를 이뤄나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아브라함의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바치는 사건에서 비롯된 ‘절대선’의 표상이 메시아 예수로 완성되는 과정이 인류 구원사의 내일이라는 것입니다.

이계황 장로, 은평감리교회(이하 ‘이’) : 목사님께서 말씀하시는 헤브라이즘의 원류가 흥미롭게 들립니다. 언급하신 아브라함에서 시작되고 예수로 완성된 것이 헤브라이즘이고 그것이 기독교의 기본 사상이라면, 미래에 세 종교가 합일을 어떻게 이뤄가야 하는가 하는 점이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과제일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헤브라이즘, 즉 기독교의 원형에 대한 설명을 더 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조 : 구원사는 그 전개 과정에서 분열의 양상을 보였습니다. 아브라함의 두 아들 중 이삭이 선택되고 이스마엘이 탈락, 또 이삭의 두 아들 중 야곱이 선택되고 에서가 탈락되었듯이, 아브라함에서 시작된 헤브라이즘은 기독교와 이슬람의 분열이라는 역사적 딜레마를 안은 채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앞으로의 역사는 이 역사적 딜레마를 극복하고 합일을 이루어 살아가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저는 주장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스마엘·에서 사건으로 인해 기독교의 분열의 역사는 이미 결정론적으로 끝난 일이라고 간주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심판’이 이미 끝난 것이라고 간주하고 덮어버린다면 앞으로의 역사, 곧 재림을 포함하여 절대 선이 달성되는 미래를 논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기독교와 이슬람은 전 세계 인류를 20억, 16억이라는 신도들로 나누는 제로섬 게임을 하고 있습니다. 이슬람 세계가 현재와 같은 발전의 속도를 이어간다면 얼마 있지 않아 서구 수준의 경제력과 무력행사가 가능해져서 기독교와의 정면충돌이 불가피해지고, 그렇게 되면 아브라함에서 나온 유일신 종교의 자멸이라는 인류사적인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러한 기독교가 가진 문제를 직시하고 미래를 도모해야 합니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의 합일이라는 ‘절대 과제’를 수행하려는 역사적 사명을 가지고 앞으로의 구체적인 계획들을 고민해 나가야 합니다.


이 : 그 둘의 불일치를 극복해야 한다는 말씀에 동의합니다. 불화의 원인을 생각해봤을 때 어떤 인위적인 것들이 개입됨으로써 어떤 이는 선택되고 어떤 이는 배제되는, 결과적으로 왜곡된 ‘인간의 역사’의 전개가 이뤄졌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사실 제 생각에 인간의 속성이라는 것이 선악의 개념을 떠나서 으레 그런 것 같습니다. 근본적인 불화의 해결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하셔야 하는 신학적인 문제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쨌든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근본적인 것들을 살펴봄으로써 분열된 기독교가 통합적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텐데, 이것을 이론적으로 정립시키는 작업이 중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조 : 예수께서 완전한 ‘자기 포기’를 가르치셨다는 점에서 그러한 신학적 작업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이 점에 동의한 가운데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완전한 자기 포기는 자기 희생, 곧 죽음의 과정입니다. 기독교는 유대교와 이슬람과의 합일의 과정을 이뤄가기 위해서는 이러한 극도의 노력과 준비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기독교에 매우 부족한 것이 현재 상황입니다. 달마도 수련을 위해 9년을 면벽구도 했습니다. 불승들은 지금도 무문궐(無門闕) 3년 또는 6년 이상을 굴속에 들어가 세상을 멀리한 채 그저 경전 하나만 손에 쥐고 자기완성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아 붓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마치 ‘숭늉의 커피 한 잔’처럼 편안하고 안일한 자세 속에서 자기완성의 필수적인 절차를 건너뛰고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에도 그러한 자기 포기와 완성의 과정을 절절하게 경험한 선생이 있습니다. 바로 사도바울입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난 사건 이후로 약 12년간 자기 부족의 상태를 극복하기 위한 각고의 구도완성 기간을 가졌습니다. 그러한 은혜 기다림의 시간을 거친 이후에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감당하러 나섰습니다. 죽음 직전에 이르는 박해를 받아가면서도 예수의 길을 따르고자 제 3의 훈련을 해나갔습니다. 현재의 기독교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이 : 바울의 수련에 대한 언급을 잘하셨습니다. 제가 ‘들소리’에 제안하고 싶은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그분은 당시 시대상을 볼 줄 알아서 자신이 어떻게 복음을 전파하면 좋을지를 고민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분이 각고의 노력 끝에 내실 있게 다져온 신앙, 지성, 교양 등을 현대 기독교인들이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현재 목회자들이 3, 4년(혹은 6, 7년)의 짧은 시간을 신학교라는 제도적 울타리 안에서 제한적으로만 배우고 바로 사역의 현장에 뛰어 들어가는 목회 구조에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시간적으로나 밀도의 측면에서 보나 턱없이 부족한 수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소한 바울 정도는 준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미국에서 잠깐 공부한 것을 가지고 소위 ‘아는 체’ 하는 것도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바울의 지성은 시대의 지성인데, 한국교회는 그것이 부족합니다.

목회자들이 한국 사회와 민족의 상황·맥락에 맞는 철저한 배움을 바탕으로 양떼들을 이끌어 가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적 정서와 사상에 맞는 동양철학에 대한 이해는 물론, 우리 역사·문화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갖추는 작업이 곧 바울이 당시 복음을 전파하기 전에 했던 수련 과정과 대동소이합니다.


조 : 교회에서 목회자들은 ‘성경만 잘 알면 다 된다’는 얘기도 합니다. 가톨릭 쪽에서는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피정의 기간을 가짐으로써 ‘자기 완성’의 시간을 갖습니다. 기독교 신교 목회자들에게도 단순한 안식년이 아닌, 자유로운 자기 시간이 주어진 가운데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을 부여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회장님이 말씀하신 대로 지금은 그 시대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보다 절실한 시점인데, 그럴 환경이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학업적인 자격을 갖춘 흉내는 내야하니까 논문 표절과 같은 불상사들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바울과 같은 자기완성의 길을 가기 위해서 한국교회에 구체적으로 무엇을 제안할 수 있을까요.


이 : 
한국교회는 처음 이 땅 위에 정착할 시기에 민족과 역사적 맥락에서 원활하게 토착화 될 수 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최초에 한반도에 기독교가 들어왔을 때의 형국은 일종의 서세동점(西勢東漸) 같은 측면이 없지 않았습니다. 외국의 문물과 자본, 기술을 한국에 원활하게 들여오기 위해 서구 기독교인들을 앞세워 교육과 의료 분야에 대한 투자를 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것이 긍정적인 측면도 많고 선교사들의 숭고한 뜻도 높게 평가해야겠지만, 한국적 생활·정서·문화에 맞지 않은 부분들이 그대로 받아들여진 부분은 한번 생각해봐야 할 문제입니다.

이를테면 히브리 민족의 선민사상과 죄로부터의 구원, ‘절대선’의 가치를 말하는 유일신 사상 등은 문화적으로 이질적인 개념들입니다. 동양 사상에 익숙한 우리들에게는 이러한 개념들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현대 한국교회에서도 유일신 신앙을 왜곡된 형태로 강조하다보니 비기독교인들의 거부감이 더해져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보편적이지만 그것을 적절하게 수용할 수 있는 방법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바울이 10여 년 동안 율법과 헬레니즘을 공부하고 복음 전파의 방법론을 고민한 준비과정이 있었기에 더욱 큰 파급력을 가질 수 있었듯이, 한국교회도 교회 건축과 대외적인 행사에만 치중하는 외형적 성장의 단계에서 벗어나 사상적·문화적 고찰과 함께 한국 실정에 맞는 실질적인 성경 연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조선 기독교’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상투를 쓰고 신학을 하지는 못하더라도 우리 얘기, 우리 것을 가지고 성경을 공부하고 우리가 처한 시대의 사상도 같이 논할 수 있어야 보다 실질적으로 성도들에게 와 닿는 설교, 지성적으로 풍성한 교회가 가능해 질 것입니다.


조 : 맞습니다. 바울도 기본적으로 율법학자였으며 유대인들을 통해 복음이 전파될 수 있도록 그들에게 우선적으로 기독교가 정착되게 하는데 힘썼습니다. 시대정신과 지성을 읽고 충분한 내실화의 기간이 갖춰진 상태에서 올바른 복음의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이라는 점에 동의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들소리’는 예배당 짓고 당파를 형성하는 일보다는, 한국교회가 자성하고 보다 성숙한 형태로 발전해나가도록 문서기구라는 형식을 빌려 36년간 교계에 올바른 목소리를 내는 데 힘을 써 왔습니다. 회장님께서는 ‘들소리’가 구체적으로 한국교회에 어떠한 방식을 더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제안하십니까.


이 : 
‘우리는 당파를 만들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렇더라도 같은 비전을 가지고 ‘들소리’를 이끌어갈 동역자들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우선되어야 할 것입니다. 경영적인 측면에서의 혁신은 그 다음의 문제입니다.

저는 ‘들소리’가 목회자들의 역할에 대해 더욱 목소리를 높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 얘기를 했듯이 충분히 준비된 사역자들이 한국교회를 이끌어갈 수 있도록 하고, 그들의 정직을 지적하는 등 잘못된 부분에 대한 회개를 촉구하는 작업이 꾸준히 병행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목사님께서 생각하시는 ‘들소리’의 모델은 무엇입니까?


조 : 저는 〈프랜시스처럼〉을 쓰면서 이미 그러한 모델을 제시한 바 있습니다. ‘들소리’ 뿐만 아니라 어느 한 편에서는 프랜시스 수도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탁발로 돌아다니다가 사람을 만나면 전도하고 어느 변변치 못한 곳에 들어가서 기도하며 사는 것이 프랜시스의 생애였습니다. 최근 로마 가톨릭의 교황도 역사상 처음으로 ‘프란치스코’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여성과 나환자를 세족하고 키스하는 등 프랜시스적인 삶을 표방한 새로운 가톨릭의 면모를 보여주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행동이 일종의 ‘언론플레이’나 단순한 ‘유사 프랜시스’가 될 수도 있겠지만, 신교에서도 이러한 노력이 시도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저는 기독교가 프랜시스의 삶을 반추하여 따르는 큰 그림이 절실하다고 봅니다. 좀 더 말씀과 기도 그 자체에 집중해야 하고, 깊은 영성을 추구하는 일에 몸이 쇠잔해질 정도의 절박함과 치열함이 있어야 교회도 변화시키고 예수 복음의 가장 핵심적인 말씀도 전할 수 있는 것이지 않겠습니까.


이 : 현실적인 문제를 완전히 배제할 수 없습니다. 아마도 그러한 역할을 온전하게 감당해나가기 위해서는 프랜시스의 삶을 공유할 수 있는 공동체가 구성돼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조 : 
저도 합리적인 구조 안에서 ‘들소리’를 이끌어야 제소리를 확실하게 낼 수 있을 것을 알기에 그 부분에 대한 고민을 끊임없이 해오고 있습니다. 공부라는 것이 ‘백년구도’ 안에서 정립되어야 하듯이 저도 큰 그림 안에서 ‘들소리’를 꾸려나가고자 합니다.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이사야 11장에서 묘사된 것과 같이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는’ 절대 선의 경지를 지향점으로 갖는 종교입니다.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아브라함에서 시작해서 그리스도로 완성된 세 종교의 기독교적 합일과 절대 선의 미래를 이뤄나가기 위해 ‘백년공부’를 생각하며 사명을 감당할 계획입니다.


이 : 
목사님께서 제시한 비전을 바탕으로 한국교회에 프랜시스와 같은 ‘예수에 근접한 삶’을 제시하여 교회들이 ‘절대선’을 이뤄나가는 데 도움을 주고, 더불어 아브라함의 종교들의 기독교적 합일이라는 과제를 달성하는 데 ‘들소리’가 큰 역할을 담당하길 기대합니다.


조 : 
이러한 사명 감당을 위해 바울과 같은 각고의 ‘자기 완성’의 과정이 우리 기독교 신교 전 분야에 각별하게 요청된다는 사실을 인식하여 ‘들소리’ 또한 그러한 환경을 조성하는 데 앞장설 수 있도록 해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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