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영 시인(등단 50년의 해)



“죽음·자연과 대면하고 노래하다 마침내 여울지다”


4살 때 엄마에게 ‘먹고 자고, 먹고 자고 이게 뭐유?’ 질문 던져
고교시절 서정주 시인의 추천으로 받고 24세 때 비로소 등단
달, 꽃 등 매개로 한 시-영원과 구원의 현장, 기도하며 펜을 든다




△제13회 들소리문학상 대상에 선정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더욱이 올해가 문단에 등단한 지 50년이 된다고 하시는데, 그 의미가 더 크게 느껴집니다. 먼저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대상이라는 말을 듣고 너무 기뻤고 영광스러웠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 울려 퍼지게 하는 훌륭한 들소리신문에서 주시는 상이라 더 영광스럽고, 참 조심스럽습니다. 지금까지 받은 상은 43년 전의 현대시학 작품상과 5년 전의 한국문학사상 정도로, 많이 받지도 못 했어요.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일을 하는 곳에서 주시는 상을 받을 수 있어서 정말 고맙고 감사합니다.


△24세 때(1962년) 〈현대문학〉의 추천을 받고 등단하시게 되었는데, 약관의 나이가 되기도 전에 첫번째 추천을 받으셨더군요. 세 번째 작품이 추천돼야 비로소 등단이 되는 시절이었나 봅니다. 첫 번째 추천부터 세 번째 추천 등단하기까지 5년의 시간이 걸렸더군요.

-서울사범 본과(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동아일보에 학생문예란에 작품을 많이 보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학교 국어선생님이 저를 꾸짖으셨어요, “아무데나 희필하지 말라”고요. 그 뒤로는 보내는 것을 그만두고 한두 편씩 선생님 말씀에 따라 시를 냈는데 목이 마른 거예요. 쓰고 싶은데 쓸 수가 없고 더 표현하고 싶은데 할 수가 없어서.

그런데 2학년 때 〈여원〉지 창립 2주년 기념 문예 현상 모집에 시 ‘달’이, 고려대학 주최 ‘전국 고등학교 문예작품 현상 모집’에 시 ‘파랑새’가 수석 당선됐습니다. 그때 심사위원이 서정주, 박목월, 조지훈, 이한직 선생님들이셨어요. 미당 서정주 선생님은 마지막 입상자에서 제 이름을 부르시고 저를 “문단에 내보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때의 저는 문단이 뭔지도, 그 분이 얼마나 굉장한 분인지도 몰랐어요.

그 이후 서정주 선생님께서는 ‘내 집은 공덕동 301번지’라고 주소를 알려주시며 시를 써서 가져오라고 하셨지요.

제 나이 18살에 미당 선생님을 만난 건 정말 운이 좋은 것 같아요. 만약 선생님을 못 만났다면 제가 시단으로 안 나왔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다듬어 주셔서 19세 때(57년) 서정주 선생님의 추천으로 〈현대문학〉 5월호에 시 ‘파랑새’가 첫 회 추천을 받았어요. 그 뒤로 4년 정도 지나서 ‘메시아’라는 작품으로 2회 추천을 받았고, 이듬해 ‘계절의 낙서’가 최종 추천 완료되어 비로소 등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첫 회 추천 이후 다음 작품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리셨군요.


-기대를 너무 많이 받아서 그런지 세 번째 시가 안 써져서 방황했을 때였어요. 효봉선사라고 하는 고명한 스님의 다비식에 목사님 딸인 제 친구와 함께 갔었어요(시인은 스님 얘기라서 조심스럽다고 했다). ‘다비식이 뭐지?’하는 순수한 호기심이 있었죠. 거기서 효봉스님의 젊은 날의 일화를 들었어요. ‘판사였던 그가 사형판결을 낸 것을 통회하며 10년을 떠돌다 스님이 됐다’는 거예요. 천지가 개벽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인간이 한 인생의 목숨을 빼앗고, 그 죄책감으로 수도하는 마음으로 살았던 인생….
그때 제 머릿속에서는 ‘신은 누구인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왜 사는가’, ‘삶은 왜 이리 피곤한가’라는, 그동안 나를 짓누르던 물음들이 간단히 풀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나의 삶의 길이 조금 더 열리게 된 거죠. 그때 일을 잊을 수 없어요. 그때의 풍경, 사람들의 모습, 다 기억이 나요. 물을 따라 길을 걷는데 갈대들이 우거진 것들까지 다….


△크리스천이라고 들었는데, 어쩌면 전혀 다른 곳에서 의문이 풀리셨네요?

-결론적으로는 그렇지만, 그것으로 인해 제 신앙이 흔들리거나 하지는 않았어요. 저는 개성에서 태어나 어릴 때는 개성성결교회에 다녔습니다. 13살에 한국전쟁 때문에 부산으로 피난을 가면서 고향을 떠났어요. 지금은 딸이 다니는 목양감리교회에 함께 다니고 있습니다.

저는 어릴 때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작은 교회를 좋아합니다. 신도들의 찬송을 들으면 눈물이 나면서 죄가 뉘우쳐져요. 소속교회에서 집사하라고 했지만 저는 교회활동을 열심히 하지 못해 제가 사양할 수 밖에 없었어요.

그러나 저는 천지만물을 창조한 분, 부활, 성경을 확실히 믿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만드신 아름다운 이 세상을 바라보고 즐기는 것도 믿음이라고 생각해요.

청소년 시기에는 교회를 다녔음에도, 한때 ‘신이 정말 계실까?’ 라는 의문이 들 때가 있었어요. ‘있다면 악인이 왜 잘되고 선인은 고생할까?’믿는 친구들을 곤란한 질문으로 괴롭혔었는데, 알고 싶었던 관심의 표현이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친구도, 목사님도, 전도사님도 만족한 설명을 해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러다 어느 날 스스로 알아졌어요.

저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더라도 믿고 싶어요. 그가 하신 일이 너무 아름다우니까요. 부활절에도 십자가를 보면서 울었어요. 어떻게 죄도 안 지으신 분이 못 박히고 어떻게 그러실 수 있을까. 더군다나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충분히 피하실 수 있음에도 말이에요.


△그런 선생님의 삶이 반영돼서 그런지 작품에는 자연을 소재로 한 ‘달’, ‘꽃’이 많이 등장합니다. 시상(詩想)의 원천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원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전 ‘죽음’이라는 것을 특별하게 생각하고 시에 담고 있어요. 어린 나이 때부터 어머니의 얘기를 들으면서 삶에 대해서 허무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겨우 네 살 때였던 것 같아요. 어머니에게 “엄마, 매일 먹고 자고 먹고 자고 이게 뭐유?”하고 묻기도 했어요.

△그렇게 어린 나이에 말인가요?

-네, 그랬어요. 그런데 저에게 죽음에 대한 충격적인 일들을 어린나이에 경험하게 되는 사건이 있었어요. 13살 터울이 나는 언니가 시집을 갔는데, 언니네 가족과 저희 엄마, 저도 언니네 가족과 함께 살았어요. 그런데 제가 일곱 살 때였나, 제 조카가 태어난 지 100일이 안돼서 죽었어요. 충격이었어요. 그런데 초등학교 4학년 때는 늘 함께 놀던 둘째 조카가 죽었어요. 그때 발버둥 치며 울었죠. 아주 어린나이에 죽음을 두 번이나 경험하면서 죽으면 영영 못 보는 거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참 무서웠어요.
아직도 그때 그 아이의 모습이 잊혀지지가 않아요. 그래서 저는 지금도 장례식장을 잘 못가요. 꼭 가야할 일이 있어 가야한다고 생각하면 심장이 쿵쾅거려요, 어쩌다가 장례식에 갔다 오면 신고 갔다 온 양말을 빨고 또 빨아요. 어떤 때는 아예 버릴 때도 있어요.

그러다 6.25 전쟁이라는 큰 사건을 경험하고 나니 실제로 조금은 그 충격이 사그러지는 점도 있더군요.

나이가 들어서는 ‘죽음이 날 미행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도 했었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그때는 왠지 죽음과 어머니가 함께 있는 것 같았어요. 장례식장 앞을 지나가면서 죽음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코를 막고 다녔던 제가 어머니 관을 끌어안고 울었어요.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아직도 모르겠어요.

어머니와의 이별로 그렇게 슬프면서도 원고 청탁받은 마감 날이어서 시를 써야만 했어요. ‘어머니에게 바치는 제물처럼 쓰자’는 생각으로 울면서 쓴 시가 ‘사모곡’으로 태어났어요. 4년 전, 아들이 죽었을 때는 살기가 싫어서 차라리 죽고 싶은 심정이었어요. 제 아들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 결혼도 못해보고 젊은 나이에 죽은 그 아이가 너무 가여웠어요. 아들이 죽고는 다 귀찮았어요. 책도 싫고 색 있는 옷을 입기도 싫었어요. 그저 죄스러웠죠. 그런데 지금은 색깔을 다 누리고 있어요.


△‘죽음’을 목도하면서 정말 많이 힘드셨겠습니다.

-누군가의 글에 보니까 ‘슬픔의 가장 극한 표현이 노래다’라고 하더군요. 울음의 또 다른 표현인 거죠. 힘든 순간을 겪고 보니 그 말에 더 공감이 갑니다. ‘그림 속 들판의 집 한 채’는 아들의 죽음을 담은 시에요.

시는 육성처럼 터지는 대로 쓰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시는 감정의 배설이 아니고 간접표현이니까요. 시인도 공인의 기질이 있어서 원래는 개인적인 죽음을 적는 것은 안 되는 일이에요. 하지만 저는 시인이니까 슬픔을 시로 표현할 수밖에 없어요.


△그렇게 죽음을 많이 경험하셨는데 시에서는 어두운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런 충격들이 오히려 긍정적으로 표현된 것인가요?

-그것이 저 스스로에게 묻는 화두입니다. ’84년도 ‘정음사’에서 시인들에게 첫 등단작품에 대한 작가정신 등을 쓰라고 했을 때 “나는 고향상실에 의한 쓸쓸함과 어렸을 적 겪은 죽음 등이 있다. 때문에 나는 죽은 사람에게 올리는 제문(祭文)의 심정으로 글을 쓴다”고 했어요. 제 심경의 밑바닥에는 그런 게 있는데 왜 이런 작품 나오나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것도 나에게서 나온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두 감정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요. 또 제가 ‘죽음’이라는 말을 직접 표현하는 걸 무서워하는 게 아닐까 생각하기도 하고요.

△한 평론가는 선생님의 ‘달’을 매개로 한 시에서 천상의 이미지, 즉 영원과 무한과 구원의 현장을 말하고 있으며, 기독교인이 기도를 하듯 시인은 밤하늘의 달을 바라보며 펜을 들곤 했다고 보시던데요.

-맞는 말씀인 것 같아요. 지금은 힘들 때마다 별과 달을 많이 쳐다봅니다. 자연 속에 솟아나는 달은 하나님이 태초에 만드셨던 그대로를 보는 듯합니다. 달을 매개로 저 자신의 고통을 승화시키는 것이기도 하겠지요. 예전에 서정주 선생님이 해주신 말씀이 아직도 귀에 남아있어요. “시인은 서러운 것을 다루더라도 무언가 반짝거리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었어요.


△선생님의 문학 세계에 영향을 받은 것은 무엇입니까?

-글쎄요, 어렸을 적 어머니가 들려주시던 이야기를 들으며 문학 감성이 생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심청이, 구운몽 같은 이야기들을 참 재미있고 매혹적이게 말씀해 주셨는데 아직 어렸던 저는 그 이야기들을 들으며 눈물을 흘리곤 했었어요.
또 제가 다니던 학교의 영향도 있어요. 개성여자정화학교를 다녔는데 시에도 그 학교 이야기가 많이 담겨 있어요. 고향을 그리워하는 이면에 웅크리고 존재하는 것이 학교이고 학교를 생각하면 밝은 빛이 생각이 납니다.

자연과 가까이 지냈다는 것도 저의 문학 감성을 만드는 데 한 몫을 했죠. 당시 송악산 기슭에 살던 친구가 있었는데 자주 그 아이의 집에 놀러가서 자연을 벗 삼아 놀곤 했어요. 이런 것들이 다 제 시 세계에게 묻어나겠지요.


△시인은 다들 자신만의 방식이나 특유의 표현 등을 위해 엄청나게 고심을 하시던데, 선생님에게는 어떤 것이 있으신가요?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는 등 각기 말이 많은데, 시인은 항상 그걸 고민할 수밖에 없죠. 그런데 저는 어떤 건 쉽게 써져요. 하루에 시 5편을 쓴 적도 있어요. ‘물’, ‘이별의 식탁’, ‘밤바람’ 등이 그런 작품들이에요. ‘달을 배웅하며’도 쉽게 써진 편이었어요.

그냥 그렇게 나오는 것도 있지만 안 되는 건 진짜 안 돼요. 7~8번 넘게 고친 것도 더러 있어요. 앞의 시어와 뒤의 시어가 맞물릴 때 어떤 무엇인가를 이루어내는 정서가 있어요. 시인은 그것을 다 계산하면서, 긴장감을 갖고 통찰해 가야한다고 생각해요.


△대상 작품집의 타이틀인 ‘달을 배웅하며’라는 시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시입니까.

-‘달을 배웅하며”는 달 자체를 배웅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시집은 아이러니하게 남편이 가기 며칠 전에 쓴 것인데, 뭔가 예언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아요. 달을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 이별 등 마음의 풍경을 달을 내세워서 상징적으로 은유화해서 표현했습니다. 또, 보이지 않는 것을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입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제 시 기류에는 죽음 문제가 깔려 있을 거예요. 어머니, 아들, 남편 등 가까운 가족과 이별하면서 죽음이란 실체를 생각하지 않았나 싶어요. ‘달을 배웅하며’라는 작품 속에 그런 이별들을 동기로 ‘달에서 춤을 춘다’, ‘달을 통로로 다른 세계에 갔다 온다’등 죽음의 세계와 연관이 된, 이어진 발상이 녹아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다시한번 대상 수상을 축하드리며, 앞으로 좋은 작품 기대합니다.


■ 시인 김 선 영


·1938년 개성 출생.

·수도여사대 국문과(현 세종대) 및 동대학원 졸업.

·<현대문학>추천(1962)으로 시단에 등단. 장시 ‘탈출하는 살’로 <현대시학> 작품상 수상(1973). 한국문학상 수상(2008년). 세종대학교 국문과 교수 역임. 청미 동인.

·시집 : <사가>(1968), <허무의 신발가게>(1972), <풀꽃제사>(1976), <환상의 문지기>(1976), <밤에 쓴 말>(1982), <라일락 나무에 사시는 하느님>(1983), <사모곡>(1987), <쓸쓸한 것들을 향하여>(1997), <작파하다>(2008).

·수필집 : <순결한 예술가의 초상>, <사랑은 마주 울리는 메아리입니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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