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람보!’라고 한다. 하늘 꼭대기 만큼 높은 것이 아니라 겨우 6미터 높이의 보안탑을 쌓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생활을 불편케 한다. 이를 두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분리장벽’이라고 한다.

보안 울타리거나 분리장벽 등의 호칭이 문제가 아니라 그곳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영토확장을 바라보면 참으로 딱한 인간들, 매우 협소한 인간의 내면을 바라볼 수 있다. 개미집처럼. 이런 식으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지금 이시간도 치열한 생존의 투쟁을 한다.

돌이켜 그들의 역사를 보면 AD 135년 하드리아누스 로마 황제가 바 르코크바의 저항군을 제압하면서 유대인들이 살아가던 유다왕국의 터전에서 그들의 추방했다. 그리고 나라 이름도 팔레스타인으로 바꾸어 버렸다. 그때로부터 1800여 년 뒤 AD 1948년 세계 속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영국과 유엔의 도움으로 팔레스타인 땅 한 구석에 뛰어들어 둥지를 틀더니 1차, 2차, 3차 중동전쟁 과정에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보다 더 많은 영토를 장악하게 되었다.

그러나 두 민족은 지금 수준에서 각기 독립국가를 형성하고, 더 나아가서 먼 훗날에는 1국가 2정부로 이루어 볼 수 있는 미래사의 주역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이스라엘 땅, 곧 팔레스타인 땅에 가보면 유대교, 이슬람, 기독교가 예수 이름으로 또는 하나님의 이름, 정확하게는 아브라함의 이름으로 각기 존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예루살렘에 가서 금번에는 내가 기독교인 것이 무척이나 부끄러웠다. 유대교와 이슬람에 대한 관대하고 너그러움을 이루어내지 못한 내 형편이 무척이나 초라하게 느껴졌다. 하늘 보기도 부끄러웠다. 예수의 무덤산과 기념교회에 가서도, 일찍이 솔로몬 성전이었던 이슬람의 골든 모스크 안에 들어가서도 내 마음 부끄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예루살렘을 수십 번 찾아다녔는데 지난 7월 1, 2일날 그곳에서는 창피하고 부끄럽다는 생각과 내가 기독교인이라는 점 또한 창피스러웠다. 왜,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아브라함의 이름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이슬람의 이름으로 서로를 용납하고 안부를 묻고 축복하는 행동을 못하는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이들 세 종파는 분명히 어느 누구할 것 없이 잘났다는 생각 따위를 하지 말고 부끄럽다 하는 고백을 해내야 한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영토문제 또한 세 종파의 너그러운 자세에서 출발해야 한다.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이 예루살렘에서만 사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팔레스타인의 피눈물은 유엔, EU, 미국, 영국 등의 편견의 결과물이라고 세계의 양심들은 말하고 있는데 그들 당사자들은 또 어떻게 생각하는가. 도무지 인류의 앞날을 어떻게 풀어갈지 모르겠다. 이스라엘의 경우 여호수아의 정복론이 지닌 의미도 제대로 모르면서 시오니즘의 노예가 되어 나라를 억지로 끌고가려 한다. 지난 2천여 년 유랑을 하고 히틀러의 가스실에서 겨우 거기까지만 생각했는가.

악순환의 고리를 풀어라. 전세계 기독교의 역량, 이슬람의 역량, 그리고 유대교의 역량을 총동원하여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화해, 그리고 세 종파의 사귐을 이루어내야 한다.

〈無然〉

<복음인in 들소리>는 하나님의 교회다움을 위해 진력하는 여러분의 후원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동반자로서 여러분과 동역하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함께 하겠습니다. 샬롬!

후원계좌 : 국민은행 010-9656-3375 (예금주 복음인)

저작권자 © 복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