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스러운 물 배급과 팔레스타인 사람의 물 수단(사진 왼쪽). 우측 사진은 나블루스 이슬람 신학교 교학처장 Jamal zaid Alkeelani 교수.



《싣는 순서》

   ① 팔레스타인의 눈물과 축복
   ② 예수의 발자취와 겹치는 팔레스타인 길
   ③ 팔레스타인과 화해, 이슬람과의 사귐


팔레스타인 여행기 마무리다. 먼저 우리는 팔레스타인의 역사 이해가 필요하겠다. 팔레스타인은 여호수아 정복기 이스라엘(BC 3200여 년) 전후로 하여 여러 종족들과 섞여 이스라엘과 혼성시대를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팔레스타인 땅에 성경의 민족인 이스라엘이 터를 잡고 중심세력이 되었으나 앗시리아, 신바빌로니아, 페르시아, 헬라, 로마의 점령시대를 살아오다가 AD 135년 바르 코크바의 반란을 진압한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가 이스라엘을 팔레스타인으로 지역(국가)명을 바꾸어버리면서 1948년 이스라엘이 신흥국가로 등장하기까지 팔레스타인의 독점지대가 되어버렸다.

여호수아 점령기부터 바르 코크바 독립전쟁기(BC 3200~AD 135)까지의 영토권과 AD 135년부터 AD 1948년까지의 영토권의 분쟁일 수도 있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대립관계는 쉽게 해결되기 어려울 것이다. 더구나 팔레스타인은 단순한 자민족 보호 뿐 아니라 이슬람이라고 하는 종교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현재는 팔레스타인 기독교가 전면에 나서서 이스라엘을 상대로 세계 양심들의 통로가 되어있고, 세계인들은 팔레스타인의 열악한 환경, 이스라엘의 폭력 앞에서 신음하는 팔레스타인을 돕기 위해서 많은 활동을 하고 있다.



1. 지역의 특성


팔레스타인 지역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등 세 종파가 동일 조상인 아브라함을 받들고 있다. 단순한 조상이 아니라 종교적 암시(계시)에 의존할 만큼 비중이 크다. 그러기에 우리의 관심은 집중되어 있다.

예루살렘, 베들레헴, 헤브론에 집중된 세 종파의 기념터전은 자칫 이전투구와 같은 볼썽사나운 꼴이 되기도 한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이들은 먼저 영토문제를 풀어야 할까? 종교문제를 화해로 이어가야 할까?

쉽지 않은 문제를 풀고자 할 때 먼저 유대교가 이스라엘 정부를 움직여서 이스라엘의 독점과 고립을 피할 수 있게 하면 좋겠다. 그리고, 기독교가 이스라엘을 만나서 ‘여호수아의 정복’은 이스라엘에 국한하지 않으면, 여호수아(예수아, 예수)의 정복은 사탄이 지배하는 지구 전체를 말한다고 가르쳐 주어야 한다. 지구인의 터전 모두가 ‘약속의 땅’임을 기독교가 깨우쳐 주었을 때 이스라엘의 포부는 세계로 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는 이스라엘(유대교)과 동반하여 일단은 낙후한 환경 속에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을 적극 돕는 것이다. 유엔이나 미국이 머지않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문제에 적극 나서서 영토와 주권문제가 차츰 합의되면 팔레스타인은 크게 숨통이 열릴 것이다.

앞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배경을 말한대로 두 민족은 한 터전에서 오손도손 살아갈 수 있는 날이 머지않아 찾아오게 되어 있다. 정치적 이해관계라 하지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상호 부채를 가진 민족이다.



           팔레스타인 국민시인 마흐무드 다르위시 기념관.




2. 팔레스타인의 마음


1948년 이후 팔레스타인이 겪은 마음 고생, 더 나아가서 현실적 고투는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요즘도 팔레스타인 지역을 여행하면서 건물 옥상에 널려있는 새까만 물탱크를 쉽게 볼 수 있다. 그들 말로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물 공급 비율이 8:2란다. 겨우 상대 비교 20%의 물을 가지고 사막의 땅에서 살아가려면 감당키 어려울 만큼 비굴해진다는 것.

어찌하여 상대비교 20%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냐? 모든 환경의 비교도 크게 다를 바 없다는 팔레스타인의 생각이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은 고난과 고통을 상대방을 향한 분노와 함께 위를 바라보는 지혜로 풀어가야 할 것이다. 위에 계신 분이 열쇠를 쥐고 계신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문제가 어찌 단순 영토문제이던가? 그들 싸움 뒤에는 종교문제가 자리하고 있다.

나는 금번 팔레스타인 여행 중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유대교와 이슬람 관계로 보지 않고, 특히 이슬람 종교문제는 일체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있음을 불안할 만큼 이상스럽게 생각했다. 그래서 기회 있을 때마다 나는 ‘당신들 팔레스타인 크리스천과 팔레스타인 무슬림 사이에 갈등이나 또는 이스라엘과의 투쟁 과정에서 의견 충돌이 없느냐’고 묻곤 했었다. 없었다는 것이다.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팔레스타인 사람으로서는 크리스천이나 유대인, 그리고 이슬람 사이에는 종교적인 접근이 아닌 오직 생존의 문제라는 뜻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종교 이전에 민족구성원 개개인의 생존과 인권의 문제 앞에서 절망하고 있다. 세계 문명의 상승, 그리고 발전의 날 동안 팔레스타인은 노예처럼 차별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너무 원통하다.

그래, 그러나 위를 보라. ‘무슬림들은 아브라함을 이브라함이라고 하지. 그래 이브라함 할아버지다. 그리고 무슬림들은 이브라함을 최초의 무슬림, 곧 신(하나님)에게 절대 복종하는 자’라고 하지. 그렇지, 그리고 유대교와 기독교는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 언덕에서 이삭을 바쳤다 했지, 이슬람은 그때 아브라함은 이삭이 아니라 이스마엘을 바쳤다 했으니 양쪽 의견 모두를 합하면 아브라함은 이삭과 이스마엘을 다바쳤다 해도 될 것 같다.



왼쪽 사진은 사마리아 동네 방문 유아원에서 뛰노는 사마리아의 어린 딸.
우측 사진은 헤브론 문화센터, 종교를 뛰어넘는 인류평화를 위하여.



다 바친 자들답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함께 살아가게 되었다. 또 여호수아가 정복한 땅에 팔레스타인 지분이 없는가 했으나 이스마엘을 바쳤으니 그들은 다같은 아브라함 자손이 되었다. 이스라엘이 잠시동안 점령군 행세를 하지만 팔레스타인 또한 머지않아 이스라엘 못지 않은 강자가 될 것이다.



3. 팔레스타인 여행의 열매


나의 팔레스타인 여행은 무한한 고통의 동반이었다. 그동안 이스라엘은 수십 번 다녔으나, 팔레스타인 심장부를 중심으로 한 그들의 아픈지대는 처음 여행이다.

나는 일차적으로 여행 목적이 2017년 중국에서 예루살렘까지 (소위) 실크로드 장정 준비를 위한 종착지 점검이었다. 5월 말경 10일 동안 출발지인 중국의 타클라마칸(신장 위구르 지역) 지역에서 종착지인 예루살렘까지의 과정을 위해서 6월 하순 팔레스타인을 방문한 것이다.

그곳에서 나는 팔레스타인 평화운동가인 미트리 라헵(mitri Raheb) 목사를 사귀면서 내 작품 〈이슬람 진실> 아랍어판 번역자를 만났고, 다시 나불르스 이슬람 신학대학 교무처장인 지말 자이드 알킬리니(Jamal zaid Alkeelani) 교수를 만나서 이슬람과의 사귐을 열 또 하나의 실마리를 얻었다.

그러나 나의 마음 깊은 곳에 팔레스타인의 아픔을 심어주고, 또 나와 비슷한 마음으로 아랍과 이슬람, 그리고 팔레스타인의 슬픔을 보여주는 시인 한 사람을 만난 것이 더 큰 기쁨이었다.

그런데 그는 2009년에 세상을 떠났다. 나는 그의 시집 〈팔레스타인에서 온 여인>(도서출판 아시아, 송경숙 옮김)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여기에 그의 시 〈팔레스타인에서 온 여인>편에서 중간 소절 하나 여기에 옮겨 보겠다.



(3 소절 부분)


어제 항구에서 그대를 보았다/ 가족도 없이… 양식도 없이 떠도는 그대를/ 나는 고아처럼 그대에게로 달려갔다/ 조상들의 지혜를 물어보려고.

어찌하여 그대는 푸르른 그 들판을 떠나/ 감옥으로, 유랑의 땅으로, 항구로 가버렸는지/ 그대가 떠나 갔음에도 불구하고/ 소금과 그리움의 냄새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들판은 그대로 푸르른지


마흐무드 다르위시(Mahmoud Darwish(AD 1941~2009)는 1971년 이스라엘 점령지가 된 그의 고향을 떠나 튀니지, 카이로, 니코시아, 파리 등지를 떠돌며 유랑인이 되었던 시인.

그는 ‘이스라엘이나 유럽 등 선진국들에 비해 아랍권은 왜 뒤지는가’를 더 안타까워했던 팔레스타인의 영웅인 시인이다. 그의 마음을 내가 대신하여 팔레스타인에게 위로를 주고 싶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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