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호 본지 기사에 일본인 요시다 목사(서울 일본인교회)의 글이 실렸는데 그는 말하기를 한국교회가 3·1운동(1919년) 당시 신자가 전체 인구의 1%였는데도 그토록 큰 울림을 주었었다고 상기하면서, 그런데 현재는 인구비율 20%가 기독교 신자인데 어찌하여 ‘그 존재의미가 보잘 것 없느냐’는 내용의 말을 했다(물론 ‘ 존재의미가 보잘 것 없다…’는 식의 표현은 필자의 방식으로, 그분 언어감정을 정리한 것이다).

그 분의 글 내용은 넌지시 현재의 한국 기독교를 경고한 셈이다. 요시다 목사의 발언이 아닐지라도 지금 우리 한국교회는 무자비한 위기에 있다. 하기는 ‘교회의 위기가 무엇이냐’는 전제가 없으니 어떤 신자나 목사들은 ‘내 말이 그들 마음을 편치 못하게 했을거야’, 교회 걱정하는 말을 들으면서는 ‘저게 무슨 소릴까? 교회가 지금 얼마나 잘 되어가고 있는데…’라고 할 수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교회 신자가 1천만 명을 육박한다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 숫자 귀신에 홀려서 예수를 잃어버린 자들, 예수를 멸시하고 짓밟는 자들은 이 말에 마음이 편치 못했을 거다.

예수를 잃은 자들은 멍청해서 길을 잃은 자와 같고, 멸시하고 짓밟는 자들은 예수 늘 말씀하시던 대로 도적떼요, 강도들이겠지.

교회들이 곳곳에 진을 치고, 예수를 향하여 예수가 원하지 않는 일을 하게 하고 세상과 더불어 적당한 타협을 하도록 강요하고 있음을 본다. 그러나 보라! 모든 수단과 방법은 물론, 열과 성을 다하여 싹수가 있는 신자들은 예수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이끌어주는 교회의 시스템을 원하는 것이다.

더 안타까운 것은 교회 목사들이 신자들을 멍청한 바보로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제왕들은 말하기를 백성이란 무식할수록 좋다고 했다. 통치가 순조롭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국교회도 신자는 무식할수록 목사가 자기식으로 목회를 해갈 수 있고, 속을 썩이지 않기 때문에 좋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교회는 2천5백여 년 전 춘추전국시대의 중국인들 수준과 유사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신자가 멍청하면 좋은 것 아니야. 신자는 총명해야 해요. 그래야만 시대 이후에 나타날 메시아 예수의 포부를 열어갈 수 있는 거야.

차라리 요즘 무슬림들이 자기들끼리 죽이고 죽는 몸부림을 하는 것이 기독교보다 더 진실하다 할 수도 있다. 저들이 신앙중심의 원리주의와 이슬람 세속주의 사이의 갈등을 이겨내지 못하고 내부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으나 그래도 그들은 정직한 싸움을 하고 있다.

교회여, 신자여, 애굽을 떠나 홍해를 건너, 다시 시나이광야 40년을 걷다가 그 40년 훈련 중에 출애굽 성도들은 다 광야 모래밭에 묻었음을 기억하자. 애굽살이에 길들여진 자들은 홍해를 건넜어도 광야(사막)의 모래밭에 묻고, 그들의 씨종자들이 다시 태어나서 요단강 건너기 하던 날들을 생각해 보라. 지금 나와 너의 신앙이 긴장감이면 주 예수 길에 그분과 동행한다 할 수 있겠는가? 솔직하게 대답하면 좋겠다.

〈無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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