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자가 전해주는 말 가운데 ‘휴머니즘은 마지막 적그리스도’라는 명언이 있다. 현재 기독교는 휴머니즘과 기독교의 간격을 구분하지 못하여 고통하고 있으며, 양자간의 오해를 빚기도 한다.

기독교의 본(本) 신학에서는 휴머니즘을 동격으로 용납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리우스 기독론과 헬레니즘의 연합인 ‘로고스 기독론’ 그 자체를 이성주의로 분류한다. 그러나 현재 정통 기독교가 유사 기독교 세력들에게 밀리는 것은 휴머니즘적 테크닉의 부족에서 오는 현상이다.

정통 기독교라고 해서 휴먼 테크닉에 밀릴 필요가 있을까? 예를 들어 타인이나 타 세력과의 대화, 너그럽게 품어주는 아량, 심지어 이데올로기나 타종교에게마저도 너그러움과 상대적 이해를 가지고 신사적인 대접을 못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사회성도 넉넉하게 기른다.

우리 사회의 제 현상들에 대한 발언을 기회있을 때마다 하고, 교회 자체의 건강을 위해서 현대인들의 평가도 겸허하게 기다리는 등 넉넉한 대화와 지혜로운 충고를 받아들이는 등 우리 세대의 여러 계층들과 대화에도 세심한 노력을 할 수 있다.

또한 정통파 교회의 고유한 역사성을 지켜내는 일에도 노력을 많이 해야 한다. 불교나 로마 가톨릭 같은 곳에서는 그들의 고유성이나 교리적 전통, 또는 고유한 예전이나 예배행위를 보면 천년 그 이상의 전통성을 가지고 있음을 본다. 그에 비하여 기독교 신교는 예배의 전례에 있어서도 고유한 전승체계를 모두 내던지고, 역사성 자체를 스스로 짓밟아버리는 경박함을 보이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된 2천년 역사의 무게를 포기하는 과오를 범하고 있다.

기독교 신교가 1517년 개혁의 과정을 거친 것이지 그때 태어난 것은 아니다. 기독교의 원역사를 말하면 아브라함의 모리아 전승과 예수의 골고다를 역사의 축으로 삼는 행위 전승을 보유했으니 오늘의 기독교 위상은 자랑스럽고 고색창연하기도 해야 한다. 만약 기독교가 예수의 골고다에 좀 더 깊이 있게 몰두했더라면 예수의 존재시비에 휘말리지 않고, 모든 세속적 요구를 형이상·하의 조건에 따라서 수용해 줄 수 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세상의 모든 이치와 철학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니 다스릴 수 있는 것들이다. 에덴을 파괴한 주범인 사탄을 포함하여, 사탄의 실체이기도한 휴머니즘을 넉넉하게 다스릴 수 있어야 정통 기독교의 실력이라 할 수 있다.

휴머니즘 세계와 그 체계 안에 있는 사람들을 상대할려면 이에 상응하는 실력과 정서가 있어야 한다. 뱀 같은 지혜가 선행되지 않으면 순수한 신앙의 정통성을 지켜내기가 어렵다. 그래서 순결 보존을 위한 지혜, 하나님의 에덴을 뒤집어버렸던 사탄, 하나님의 계획에 사사건건 시비하고, 도전해오는 사단의 실체는 오늘의 모습으로는 휴머니즘, 곧 헬레니즘의 탈을 썼다. 우리는 그들의 마력을 꺾어내고, 또 그들을 이겨낼 수 있어야 한다. 아, 휴머니즘의 힘이여! 그대는 그래서 마지막 적그리스도라 했을까? 그러나 자네는 하나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끓어야 하네.

〈無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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