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푸(Bapu=father) 함석헌의 삶-(48)]

언론의 자유를 주창하는 함석헌 선생
“3·1운동의 기억도, 해방 직후의 기억도 다 잊지 않고 가지고 있는데, 오늘도 그 지나간 때들과 마찬가지인데, 어째서 시원한 운동이 없느냐? 두말할 것 없이 6·25 이후에 <사상계>가 했던 사명을 수행하는 기관이 없기 때문이다.”

함석헌이 들은 영음(靈音), “있는 대로 말하라”

함석헌에게 있어 1950년대 후반 5년은 정말 바쁜 기간이었다. 정치거나 경제거나 사회, 문화거나 가릴 것 없이 모든 부조리에 저항의 소리를 쉬지 않았다.“나더러 말이 곱다 밉다 말라. 글에 조리가 있느니 없느니 말라. 이 부조리를 깨고, 이 짙은 어둠을 뚫으며 이 수수께끼를 풀 때까지 나는 미친 듯이 아우성을 치며 회오리바람을 몰지 않을 수 없느니라” 한 1964년 3월 1일 한길사 출간의 그의 전집 4,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의 머리글은 1956년 1월 그의 사상계에 ‘한국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발표함으로 시작된 이후의 줄기찬 논쟁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함석헌은 역사의 진화에 말의 자유, 글의 자유를 절대의 진리로 믿었고, 절대의 진리로 품고 산 사람이었다.

그는 장준하를 그의 지체처럼 아꼈지만 사상계에 그가 쓴 그의 글 일부가 어찌된 영문인지 잘려나갔을 때, 장준하에게 친필을 보내 “앞으로 사상계에 글 쓰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단언하기까지 했다. 사상계 1957년 6월호에 쓴 ‘윤형중 신부에게는 할 말이 없다’에서였다.

“지난 3월호(1957. 3)에도 주는 대로(사상계로부터의 요청, 필자주) ‘할 말이 있다’라는 제목 아래 내 속에 있는 도리를 써 보냈다. 될수록 민중이 하고 싶어 하는 말을 써보려 했다. 그러나 글은 원고대로 발표되지 않고(삭제된 내용은 ‘이승만의 일인국가’라는 말이었다, 필자주) 중요한 부분이 잡지사의 손으로 깎임을 당하였다. 그대로 내면 혹시라도 당국의 비위에 거슬려 사(社)로서 손해를 보지 않겠나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미리 의논도 없이 그 일을 당한 나는 분하고 슬픔을 견딜 수 없었다. 그들이 다 나와 친분이 있으니 어디까지나 나를 믿어서 한 일인 줄 알지만, 이 일은 개인사(私事)가 아니고 공적(公的)인 문제다. 나는 내 사상, 내 인격을 상품화하여 맘대로 처분하려는 자본주의, 배금주의에 대한 프로테스트를 아니 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글을 쓰지 않을 것을 사(社)에 통고했다. 나와 남의 돼지 같은 살점을 지키기 위하여 참의 살점, 민중의 맘의 살점을 깎이고 싶지는 않았다. 민중이 내게 명하는 것이 “있는 대로 말하라” 하는 것이라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민주주의와 더불어 ‘언론 자유’에 대한 함석헌의 특심은 실로 종교심(宗敎心)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 함석헌과 장준하 사이의 정신적, 영적 교류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장준하는 끊임없이, 쉴 새 없이 함석헌 안에 있다고 보이는 ‘참의 소리’를 사상계를 통해 이끌어내기에 맘을 쏟았다. 이미 알려질 만큼 알려진 대로 1957년 윤희중 신부와의 종교사상 논쟁, 1958년 스무날 옥살이를 치르게 한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그리고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를 풀어 밝힌다’를 비롯, 1959년엔 8회에 걸치는 함석헌의 인생노트에 교회의 좌담회(1. 실험의 가치와 상황의 해석/박중홍, 이용희, 김하태 등, 2. 내 것이냐 가이사의 것이냐/이어령)를 실어 1959년 사상계는 흡사 함석헌의 개인지를 방불케 했다.

함석헌과 장준하, 4·19를 함께 맞다.

그리고 1960년! 그 견고하기 철옹성(?) 같던 자유당정권이 퇴장하는 해다. 4월 19일, 하늘이 일으킨 거대한 역사의 물결에 의해서였다.

함석헌은 이날 장준하와 함께 있었다. 장준하와 함께 4·19를 맞은 것이다. 1959년을 민주주의 회복을 주제로 하는 전국 주요 시, 도 단위의 문화강연을 마치고 1960년 새해는 주로 내부를 다지는 해로 맞았는데, 이때부터 4·19 직전까지가 장준하가 함석헌과 개인적인 만남을 가장 자주 가진 때였다.

4월 19일! 그날도 함석헌과 장준하는 함께 있었다. 나남출판사 <장준하의 생애와 사상 민족혼·민주혼·자유혼> 177쪽엔 화신앞 한청빌딩 사상계사 사무실에서 4·19 데모 학생의 물결을 내려다보면서 감격해마지않던 두 사람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그 다음 해(전국문화강연 다음 해) 우리는 4·19의 엄청난 혁명을 지켜보게 되었다. 장준하 선생과 함석헌 옹과는 세대적 차이가 있음에도 어려울 때는 늘 찾아오셔서 상의하곤 하였다. 두 분은 동지적 관계를 지니고 계신 것 같았다. 19일 두 분이 학생들과 시민들을 한청빌딩에서 지켜보시던 모습은 묵묵히 역사의 격류를 속으로 되새기고 있는 것 같이 보였다”(이문휘(李文輝) 1958년 입사, 1961년 사상계 취재부장).

함석헌은 1960년 4·19혁명과 장준하의 사상계를 특별한 관계로 이해하고 있다. 그는 후에 (1977) 쓴 글 ‘4·19와 5·16’ 중의 소주제 ‘4·19의 유래’에서 과언(過言)이라 할 정도로 사상계를 4·19 발생의 연원(淵源)으로 주장하고 있다. 4·19 발생의 연원으로 첫째는 해방 직후의 학생운동을, 다음으로 해방 직후의 그 학생운동의 연원으로 3·1운동을 들고, 4·19학생혁명의 유래(由來)로서 해방 직후 전개되었던 그 학생운동은 한마디로 기성정치인,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이요, 경고요, 호소였다는 것이다. 해방의 소식이 전해지자 감격과 환호가 강산을 뒤흔들었다. “물려 들어갔던 죽음의 턱아리가 너무 깊었고, 스스로 지은 죄가 너무 깊어 도저히 살아나갈 용기가 없을 뿐만 아니라 감히 살겠다 할 염치조차 없는 줄을 잘 알고 있었던 터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해방이 온 것이다. 그것은 실로 “큰 역사적 사면(赦免)이요, 민족적 회심”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정부수립문제가 나오자 그 감격과 환희가 순식간에 산산이 부서져버렸다. 사생결단의 파쟁이 온 나라를 뒤흔들어 놓은 것이다. 그것은 이 나라가 아니었다. 정치는 완전히 실종되어버렸다. 이런 현상을 좌시할 수 없었다.

역사가, 시대가 학생들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불의와 부정으로 얼룩진 기성세대에의 저항, 새 역사를 절규하는 의기…. 4·19의 학생세력은 바로 이 같은 해방 직후 학생운동의 기운을 이어받은 것이라고 함석헌은 말한다. 이어서 함석헌은 4·19 학생들에게 영향을 준 그 해방 직후의 학생운동은 3·1운동사에 궐기했던 역시 학생들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4·19 학생운동은, 필자주) 3·1운동에까지 올라가야 한다. 4·19 학생들은 해방 직후의 학생운동을 아는 동시, 또 3·1운동 때의 학생의 궐기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사실 3·1운동은 그 태동도 학생에서요, 그 후 운동의 중심세력이 된 것도 학생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새 술을 새 부대에 넣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오늘의 학생과 그 저항운동을 생각할 때도 그 정신이 3·1에서 나오는 것임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씨알의 소리 1977. 4, 5 합병호 P.17).

함석헌이 본 4·19와 사상계

그러나 4·19의 유래(由來)로 함석헌이 특별히 주시하는 것은 <사상계>의 운동(?)이었다. 4·19 학생혁명의 원동력으로서 사상계에 대한 함석헌의 시각은 정말 각별했다. 그러나 위의 둘(해방 직후의 학생운동과 3·1운동에서의 학생궐기, 필자주)보다도 더 큰 영향을 4·19에 끼친 것은 <사상계>라고 해야 할 것이다. 위의 둘은 역사를 통해 주어진 것이지만 <사상계>는 받아 가진 것을 잃어버리거나 잊어버리지 않도록 깨우쳐주고 부족한 것을 깨우쳐 배워 얻을 수 있게 하는 정신운동이었기 때문이다. 사실이 근본이요, 근본이기 때문에 귀하지만 역사에서는 사실의 의미(意味)를 깨달아서만 사실이 된다.

자연적으로 반응함에 의하여 이루어진 사실보다도 그 사실을 자료로 삼아 분석하고 비판하여 다시 구성한 정신적 사실이야말로 다음의 역사를 낳는 원동력이 된다. 거기는 뜻(意味)이 있기 때문이다. <사상계>가 우리 민주주의 발전 역사에 있어서 어떻게 큰 역할을 했느냐 하는 것은 오늘의 형편(유신 이후의 언론통제, 필자주)과 비교해보면 잘 알 수 있다. 3·1운동의 기억도, 해방 직후의 기억도 다 잊지 않고 가지고 있는데, 오늘도 그 지나간 때들과 마찬가지인데, 어째서 시원한 운동이 없느냐? 두말할 것 없이 6·25 이후에 <사상계>가 했던 사명을 수행하는 기관이 없기 때문이라는 말만은 시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사상계가 그런 일을 했던 것은 그것을 누가 창립·경영하고 누구누구가 글을 썼다는 것보다도 그 시기와 이루어진 활동 방식에 있다 할 것이다. <사상계>가 시작된 것이 6·25전쟁 중 부산 한구석에 몰려있던 1953년이었다. 이것을 전쟁 전에 공비의 출몰이 심해 아주 위험했던 것, 그리고 6·25를 체험하고 난 후 (그 민족적 환난 가운데서도) 특별히 지도하는 지도자(?)나 조직도 없이 국민 사상의 방향이 아주 분명히 민주주의 노선으로 결정되었다는 두 사실과 겸하여 생각해볼 때 자연 거기 알려지는 것이 있는 것을 알 것이다. 장준하(張俊河)는 제때에 나와야 할 소리를 시작했다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장준하가 한 것이 아니요, 시대 자체, 씨알 자체가 한 것이다”(전집 17. P 114, 115, ‘4·19의 유래’). 함석헌의 해석에 따르면 <사상계>는 4·19의 첫 불씨였고, 장준하에 의하면 함석헌은 그 불씨를 일으키는데 첫 사람이었고, 다른 한편으론 ‘4·19의 해설자’라 했다.

사상계에는 다른 잡지나 신문사들이 갖지 못한 일류의 필진들을 갖추고 있었다. 탄탄한 학문에 꼿꼿한 기상, 어떤 통치체제에도 두려움 없이 맞서는 용기와 논리들은 실로 주변의 거의 모든 언론단체들이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는 참 비싼 <사상계>만의 자산이었다.

문 대 골
생명교회 원로 목사
전 함석헌기념사업회 이사장
그 필자들 역시 일본제국주의 밑에서 교훈을 받은 사람들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람들이 일선을 이루어 자유주의, 민주주의를 고창하는 선민(先民)의 대열에 설수 있었던 것은 이전의 3·1운동으로부터의 영향과 또 하나 <사상계>라는 교두보를 통해서였다. 함석헌은 이 사상계를 “거의 단 하나의 길”이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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