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푸(Bapu=father) 함석헌의 삶-(49)

1964년 6·3사태 전후, 시위하는 민중 속의 함석헌 선생
“전 민중이 노했고, 일어났고, 이겼고, 기뻐했는데 그것이 혁명이 아니라면 그럼 도대체 혁명은 어떤 것이냐?
…우리도 자유를 사랑하고 정의를 위해 분개할 줄 알고, 사랑으로
원수를 용서할 줄 아는, 사람다운 사림인 것을 증명하게 하여 전날의 실패와 상처를 도리어 자랑으로 여기고 세계를 향해 어엿한 얼굴을 들 수 있게 했으며….”
 

(함석헌의 글 ‘4·19는 혁명이다’는 박정희의 군사반란 세력에 의해 ‘4·19혁명’이 ‘의거’ 심지어는 ‘사건’으로까지 폄하되는 데에 항의해 쓴 글이다. 필자주)

함석헌과 장준하를 하나로 묶은 띠

‘바늘 가는 곳에 실 간다’. 함석헌과 장준하의 관계를 말하는데 이보다 더한 표현은 없을 것이다. 바늘 없이 실 있을 수 있고 실 없이 바늘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쓰이지는 않고 거저(?) 존재하는 경우일 때 만이다. 용도가 폐기된 것들은 버려져야 하는 것, 버리지 않고 보존해 두는 경우는 다시 쓰일 수 있다는 기대가 있어서이다.

함석헌과 장준하는 하나같이 감히 역사를 만들어(?) 가는 이들이었다. 함석헌과 장준하의 시대를 함께 살아낸 일명(一名) 사상계세대(思想界世代)들에겐 함석헌과 장준하가 새 역사, 특히 민주주의와 언론 자유의 신장(伸張)을 위한 투쟁의 전우(?)로 생사를 불문하는 생애를 살았다는데 전혀 이의가 없을 것이다. 일본의 제국주의, 이승만의 독재정치, 박정희의 군부폭압통치에의 저항에 저들은 마치 쌍둥이처럼 엉켜 싸웠다. 장준하가 함석헌을 만난 것, 함석헌이 장준하를 만난 것, 그것은 감히 하나님의 중개에 의해서였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들의 관계를 그렇듯 죽음 말고는 풀 수 없도록 묶어낸 것이 곧 4·19와 5·16이었다.

4·19는 저들을 함께 감사하며 춤추는 관계로, 5·16은 저들을 함께 분노하며 저항하는 관계로 묶었다. 고난의 사건과 현장을 함께 살아가는 이들의 행복이야말로 얼마나 지극한 것인가? 그렇다면 함석헌과 장준하는 실로 행복을 함께 살았다 해야 옳을 것이다. 함석헌의 말을 빈다면 함석헌 자신의 함석헌 됨의 상당부분이 사상계를 통해서였다. 함석헌은 교수와 학생세대를 망라해 4·19의 세력을 키워낸 상당부분의 공로(?)가 사상계에 있다고 역설한다. “그것이 <사상계>라는 거의 단 하나의 길을 통해서”였다는 것이다(전집 17. 116p.
‘4·19와 5·16’). 함석헌의 사상계에 대한 애정은 거의 예찬에 가까웠다. 특히 5·16 이후 박정희의 군인정치 10여년은 더욱 그랬다.

사상계를 4·19의 모태로 보는 함석헌에겐 두 가지 소명이 주어진다. 사상계를 지켜내는 일과 4·19의 의미를 해석해내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박정희와 그 하류들이 장악하고 있는 군사정권에의 저항으로 나타날 수 밖에는 없었다. 4·19 혁명으로 자유당의 반민정권(反民政權)이 무너지고 허정(許政)을 수반으로 하는 임시정부 주도 아래 7·29 총선을 통해 분명한 정권교체가 이루어지지만 그렇게 해서 들어선 장면(張勉) 정권은 그 출범 불과 10개월, 한국사 통한의 박정희 군사반란으로 역사적인 비극을 맞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어쩌면 함석헌에게 고난의 길을 감사하며, 잡히며 맞으며 묶이며 갇히며, 현상을 장악한 괴악한 무리들로부터 당하는 온갖 비난들을 마치 하늘이 주신 것으로 알고 감수(甘受)해온 그에게 내린 하늘의 은총 같은 것이었다. 어떻게 5·16 군사반란이 함석헌에겐 “하늘의 은총” 같은 것이었다고 하는가는 다음 장 ‘5·16’에서 말하기로 하고 먼저 “혁명”으로서의 4·19를 부정하려는 박정희의 군사정권을 향한 함석헌의 항설(抗說)을 듣기로 하자.

요컨데 4·19는 혁명, 혁명이라는 것이다.
 

4·19는 혁명이다

“4·19는 혁명이다. 4월 19일, 그날 수유리 무덤에 갔더니 거기 큰 글자로 써 붙이기를 ‘4·19의거 희생자 추념’이라고 했다. 열세돌이 되는 (1973년 유신통치가 시작되는 해, 필자주) 오늘까지 평소에 공으로거나 사로거나 우리가 말하는 때면 누구나 다 ‘4·19 혁명’이라 부르는 것이 사실인가? 그런데 왜 이 공식적으로 기념식을 하는 오늘 이 자리에 그렇게 써 붙였을까?

몰라서 그랬을까? 잊어버려서 그랬을까? 아닐 것이다. 모를 리가 없고 잊었을 리가 없다. 본래 첫 감격과 흥분이 가라앉은 다음 4·19를 어떻게 이름 할 것인가 약간의 논란이 있었다. 정변이냐, 혁명이냐 하는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역사에서는 그 사건 자체도 중요하지만 사건이 지나간 후 그것을 어떻게 규정짓느냐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거기에 역사 이해가 있기 때문이다. 신중히 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한동안 논란이 있은 후 혁명이라는데 낙착이 됐다.

4·19는 혁명이다!

생각해보라, 어떻게 혁명이 아니라 할 수 있는가? 욕심, 고집, 무쇠같이 녹이는 탈을 쓰고 몰록(Moloch, 고대 셈 족이 섬기던 화신, 필자주)처럼 버리고 서서 씨알의 피와 땀을 영원히 마시려던 독재자를 혼비백산하여 스스로 물러나 바다 속 외로운 섬에 울다 죽게 했는데, 그래 그것이 혁명이 아니란 말인가? 네게 이성이 있느냐? 소인의 무리, 간사하고 악독한 당파, 지식 기술을 악용하여 우상을 가운데 세워놓고 나라의 것을 도둑 하여 권세와 영화를 누리자던 자유당을 단숨에 밀어 바위에 부딪히는 눈덩이처럼 부서져 거품으로 꺼져버리게 했는데, 그래 그것이 혁명이 아니란 말이냐?

네게 양심이 있느냐? 마산에서 대구로, 대구에서 서울로, 고등학생에서 대학생으로 대학생에서 교수로, 교수들에게서 전 민중에게로 들불처럼 번져나가 개인이 없어지고 한 덩어리가 되어 노한 바다처럼 뒤흔들었는데, 그것이 혁명이 아니란 말이냐? 그렇지 않았다면 총탄을 쓰다 말고 항복했겠는가? 전체 민중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면 그래 그 권력구조가 무너졌겠는가? 무너진 후에 무엇이 남은 것이 있었던가? 죄악의 세력이 밑동에서부터 꺾이지 않았나? 그런데 혁명이 아니라는 말인가?

전 민중이 노했고, 일어났고, 이겼고, 기뻐했는데 그것이 혁명이 아니라면 그럼 도대체 혁명은 어떤 것이냐? 오천년 긴 역사를 가지면서도 역사적 민족의 대접을 못 받고 종교 도덕 예술의 빛나는 문화를 창조했으면서도 문화민족의 명예를 누리지 못하던 우리로 하여금 세계만방 앞에 우리도 자유를 사랑하고 정의를 위해 분개할 줄 알고, 사랑으로 원수를 용서할 줄 아는, 사람다운 사림인 것을 증명하게 하여 전날의 실패와 상처를 도리어 자랑으로 여기고 세계를 향해 어엿한 얼굴을 들 수 있게 했으며, 다른 여러 나라 학생 운동에까지 크게 영향을 끼친 것이 이 4·19운동인데 그래 이것이 혁명이 아니라는 말이냐? 아, 이렇게 분한 일이 어디 있을까? 이렇게 슬픈 일이 어디 있을까?

‘의거’, 그렇다 의거다. 옳은 일이다. 그러나 역사에는 스스로 그 역사의 의미를 밝히는 증인될 술어가 있지 않느냐? 폭동인가, 정변인가, 내란인가, 그렇지 않으면 혁명인가? 옛날 제(齊)나라의 최저(崔杼)가 임금을 죽이고 나라를 도둑질했을 때 그 사건을 최저시기군(崔杼弑基君)이라 직필(直筆)해 후세 사람으로 하여금 세 사람의 사관이 목숨이 끊어져야 했던 것을 아는가 모르는가? 글자면 다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으로 그 역사적 의미가 밝아지나 흐려지나가 문제다 그것으로 씨알정신이 올라가나 내려가나가 문제다 ‘희생자’라 했으니 그런 말을 어디다가 쓰느냐? 죽음을 당했으니 희생자임에 틀림이 없으나 죽음이 어디 다 같은 죽음이냐? 밖에 사람이 하나의 역사적 사실을 적는 것이라면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네가 어찌 밖에 사람이며 추념식을 하는데 그것이 어찌 하나의 사실 보고냐? 불쌍하다 생각해서 희생자라 했느냐? 네 마음 참 착하구나!

우리는 그이들을 죽은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산 영으로 우리 속에 모신다. 그이들은 산 씨알 속에 영원히 산다. 그러므로 그이들을 하나의 죽은 자로 대접했을 때 이 씨알 전체를 무시한 것이다. 또 그만이냐? 이것은 도리를 무시한 태도다. 하늘도 진리도 인정하지 않는 일이다.

분명히 알아들어라.

4·19에는 개인이 없다. 첨부터 전체다. 전체 그자체가 일으켰다. 전체 그 자체가 내밀었고, 전체 그 자체가 이겼다. 거기 나섰던 그 개인 개인에는 잘한 일도 있고 잘못한 일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는 아니다. 우리가 탑을 세워 기념하는 것은 그 개인의 공적을 나타내는 것만이 아니다. 전체의 생명을 우리 속에 살리기 위해서이다. 그 전체 생명에 들지 못하면 모든 기념행사가 무의미하다. 하물며 하나의 희생자 대접을 함으로서일까?

다시 말한다.

4·19에 영웅주의는 없었다. 권력주의는 그 냄새조차 없다. 그러니 영웅이 되려다 못됐다면, 또 혹은 일장공성만골고(一場功成萬骨枯), 장군 하나 되려면 만 명이나 되는 졸병이 죽어 마른 뼈다귀가 돼야 한다고, 남 권력 잡는 일에 나갔다가 불행히 죽어버린 것이라면 참말 희생자겠지만 그런 지저분한 것 하나 없는 이 거룩한 사건에는 희생자라는 말은 도리어 모욕이다. 모욕만이 아니라 그 정신을 죽이는 행동이다. 기억해라 4월은 부활의 달이란다.

4·19는 혁명이다!

4·19는 혁명이다!

천하의 씨알아, 씨알은 아니 죽는다. 죽을 수 없는 것이 씨알이다.

씨알아, 한 목소리로 다짐하자.
 

4·19는 혁명이다.
 

4·19는 영원한 씨알의 숨이다.

4·19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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