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당나라 景敎 _ 25

   

▲ 당나라 장안성 (현 시안) 서북문 궁궐 밖 실크로드 로마에서 당나라, 당나라에서 로마 출발지며 기착지. 카라반들의 석조상.

돌파구를 열어야 한다. 알레폰은 그의 제자들을 오리봉 산언덕에 모두 불러 모았다. 수리매(독수리과의 일종)의 기상을 떠올리기 위해서 수리봉으로 명명하려다가 소박하고 늘 서툴러 보이기는 하지만 꾸준하고 질긴 생명력을 가진 오리를 떠올리며 오리봉이라 했다.

“여려분, 오늘 이 시간 우리는 좀 더 심각하고 간절한 소원의 기도를 주께 드려야 합니다. 단순히 페르시아가 아라비아 이슬람에게 망했대서가 아닙니다. 이럴 수가 없어요. 이슬람의 무함마드가 아라비아 부족들 간의 세력 경쟁을 하던 때가 10여 년 전입니다. 더구나 그의 탁월한 지도력마저 그가 갑자기 죽으므로 소멸된 지금 그들은 아라비아 사막을 뛰쳐나와서 로마 제국과 기독교, 그리고 페르시아와 조로아스터교의 무대를 단숨에 제압하고 있습니다. 이는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그 안에 숨어있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라비아 종교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계시의 말씀을 해독해야 합니다.”
알로펜은 슬픈 표정으로 가끔씩 그 의 눈가에 비치는 눈물자국도 숨기지 않으며 말을 이어가다가 쿰바홀을 바라본다.

“주교님, 제게 명령 내리실 일이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말씀하시면 기름통이라도 메고 불 속으로 뛰어들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쿰바홀의 딱부러진 한마디는 알로펜의 마음을 후련케 했다.
“그래, 쿰 부주교, 사람이란 그토록 분명한 소명이 있어야 해요. 내가 열다섯 살 무렵 이슬람 교주 무함마드와 다마스커스에서 만나서 며칠 동안 토론도 많이 하고 서로의 성격을 비교도 해본 일이 있지요. 그는 기독교를 무신론집단이라고 하면서 언젠가는 하나님의 징벌을 받을 것이라고 했어요.”
“아니, 기독교가 무신론집단이라니요?”
다비드가 성깔 있는 목소리로 외쳤다.

“다신교이니 무신론과 같다는 거지. 무함마드는 하나님, 성자, 성신의 3신이니 다신이요 다신교는 잡신이니 그건 무신론과 같다는 거야.”
“그럼, 그때 주교님은 무함마드에게 뭐라고 답변하셨나요?”
아베스의 질문이다.
“하나님 아들 예수님이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이다. 성신 곧 성령은 하나님의 영체로서 이 3위의 관계는 이 세상의 사람과 만물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창조 완성의 열쇠요 해법이라 했지.”
“그랬더니 무함마드는 뭐라고 했나요?”
“억지라고 그러더군.”
“주교님, 저 아베스도 주교님의 인격과 신앙을 믿으니까 그 말씀에 아멘 하죠. 다른 사람이 말했으면 믿기가 어렵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 동역자들 앞에서 솔직한 고백입니다마는 저는 아직 어느 누구에게도 삼위일체 신학에 대해서 설명하거나 강조를 못했어요. 저야말로 반쪽짜리가 분명합니다. 용서해주세요. 그리고 가르쳐주세요.”

“오, 아베스여! 장하오. 당신의 고백은 진실하고 아름답소. 주께서 지금 곧 도와주실 겁니다.”
“주교님, 저 안토니의 판단으로는 해답이 이미 나왔다고 봅니다. 아베스 목자가 말하기를 자기는 아직 확신이 없으나 주교님 말씀이기에 믿을 수 있다고 했어요. 이는 놀라운 진리의 비밀이 아닐까요. 다시 말하면 믿는 자의 인격과 신앙이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을 책임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소. 안토니 목자, 그 말이 맞습니다. 복음의 진리는 화육(化肉), 또는 육화(肉化)입니다. 이를 이사야 선지자는 ‘임마누엘’(사 7:14)이라 하였고, 얍복강 씨름판 야곱에게는 ‘이스라엘’(창 32:28)이라 가르치셨죠. 불교에서는 중생의 가슴에 부처가 있다, 깨달으면 부처다, 사람이 곧 부처라고 불교 경전 화엄경은 더 솔직하게 말해주기도 한답니다.”
“와하, 주교님!”
쿰바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왜 그러세요 쿰바홀 부주교님?”
마리아가 웃으면서 말했다.
“….”
쿰바홀은 말 없이 알로펜을 바라보기만 했다.
“순진하시긴, 부주교님. 알로펜 우리들의 선생님이 모르시는 것이 있는 줄 아세요? 부처는 물론 공·노자 맹·장자 등 말입니다.”
“허, 참. 마리아….”
“또 교수님 소리 하려고 그러죠!”
알로펜의 말을 뚝 자르고 마리아가 일어섰다.

“여러분, 우리는 당당해야 합니다. 예수를 품으면, 예수 하나님을 모시면 하나님처럼 사는 겁니다.”
마리아의 자신감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말이 쉽지 말이 삶의 모습으로 옷 입혀지지 않으면 위선이 됩니다. 위선은 힘이 없고, 결국은 그 자신을 눈멀게 합니다.”
안토니였다.

“바로 지금 우리가 고뇌하면서 나누는 대화부분이 기독교의 한계가 아닐까 하고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저의 트빌리시 시절 지도자였던 요한 사제께서 늘 고뇌하시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한계’라고 탄식하셨습니다. 기독교 사람들의 설익은 지식의 한계입니다. 중국식으로는 구조(構造)의 한계입니다.”
“좋아요. 바로 핵심이 나왔군요. 보세요.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늘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라 하셨지요. 또 누가복음 9장의 경우는, 내가 주를 따르겠다고 하는 이에게 공중의 새는 둥지가 있고 여우도 굴이 있으나 나는 하늘 아래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시지 않던가요. 이 말씀이 의미하는 뜻이 무엇인지 알아들어야 합니다. 이 대목과 어울리는 부분으로 불교도 초보자들이 배우고 익혀야 하는 기본 가르침에 ‘집착거부(執着拒否)’라는 말씀이 있지요. 이 어휘의 뜻은 기대지 마라, (사사로운 욕심을 위해서) 의지하지 마라, 부처님의 가슴팍이라 해도 기대고 의지하지 말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 말씀이 매우 어려운데요?”
“드보라여, 그 말이 맞습니다. 집착거부는 일정한 수순과 정상적인 방법으로가 아닌 개개인의 욕망을 위한 구도의 방법은 옳지 않다는 뜻입니다. 부처가 되고자하는 욕심이 간절해도 욕망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교님, 제게는 아직도 충분한 이해가 어렵군요. 성경의 가르침에는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집착거부라는 말의 뜻이 참 고약스럽군요.”
“아마 문화적인 차이가 아닐까요. 우리 기독교는 먼저 덤벼드는 것이 장점이고 불교는 기다리는 방법이 먼저입니다. 다시 말하면 욕망이라는 것은 그것이 비록 선한 목적이라 해도 내던져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 주여, 지금 내게 깨달음이 왔습니다.”
많은 이들이 이 말을 하는 쿰바홀 부주교를 향하여 시선을 모았다. 쿰바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주교님, 예수님의 말씀대로입니다. 주 예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를 버리고(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이 말씀 안에 집착거부가 들어있습니다. 또 있지요. 주여, 주여 하는 자가 아니라 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여야 한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렇군요. 적당히 하려 들지 말고 정직한 진리 배움의 절차가 필요하다는 뜻이기도 하겠군요.”
드보라가 쿰바홀의 말에 화답을 했다. 알로펜을 위시하여 강당에 모인 사람들 모두가 침묵의 기도 속으로 빠져들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숨 막힐 듯한 침묵의 시간이었다.
10여분이 지난 후에야 한 사람씩 또 한 사람씩 밖으로 나왔다.
“여러분, 우리들 오늘 매우 진지한 대화를 나눴어요. 이제 우리는 기독교의 앞날을 짊어지고 나갈 용사가 되어야 합니다. 이는 알로펜 주교님이 배려한 우리의 아시아 행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마리아 교수의 말을 이어 안토니가 한 번 더 강조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로마 기독교의 기초 위에 아시아의 불교를 학습하는 절차를 통해서 미래의 기독교, 제3의 교회시대를 열어가야 합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들이 신학자가 되고, 교회의 정통성을 지켜내는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는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최선의 길이 될 것입니다.”
안토니였다.
“안토니, 고맙소. 우리는 우리가 깨닫고 또 말한 내용들을 위해서 우리의 생명을 주의 제단에 올려야 합니다.”
“저희 모두는 뼛속에 주교님의 말씀을 새겨두겠습니다.”
“아니오. 이는 주 예수의 명령입니다.”
“주교님, 맞습니다. 주 하나님의 명령임을 명심하겠습니다.”
“내일부터는 이곳 장안은 물론 낙양 등 주변의 도시와 농촌으로 가서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알로펜은 숨 가쁜 심정으로 제자들을 독려했다.

작가 조효근 : 1976년 『월간 문학』 신인상 소설 등단.
대학에서 세계교회사 및 종교사 38년째 강의. 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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