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릭스 만츠가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그는 5개월 정도 감옥에 있다가 탈옥했다. 이듬해인 1526년 10월 다시 붙잡혀 취리히 의회의 사형선고를 받았다. 만츠는 사람들로부터 조롱을 받으며 림마트 강에 던져졌다. 형 집행자들은 만츠의 두 팔을 등 뒤로 잡고 차디찬 강물에 머리를 처박았다. 재 세례 주장자들을 비웃는 행위였다. 그러나 펠릭스 만츠는 찬송을 부르면서 죽어갔다.

만츠는 같은 프로테스탄트로 분류되는 개혁자들로부터 죽임 당한 최초의 순교자였다. 그의 죽음을 시작으로 재세계파는 급속한 박해에 휘말렸다.

정부나 가톨릭은 물론 프로테스탄트 개혁자들의 한 술 더 뜬 박해 열풍은 재세례파의 씨를 말릴 지경이었다. 더구나 교육받은 지도자들은 2년 안에 모두 죽임을 당했다. 재세레파는 구심점을 잃었고, 흉흉한 민심에 떠밀려 급속히 이단화 되어 갔다.

2) 치욕의 뮌스터 사건
수난의 연속이다. 재세례파 지도자는 물론이고 신자들의 희생이 얼마인지는 다 모른다. 수만 명, 또는 수십만 명이라는 설이 있다. 그러나 재세례파 신자들의 죽음의 숫자보다 그 치욕적 방법을 안겨서 죽게 한 부분은 유럽의 신구 기독교가 영원히 책임져야 할 몫이다.

독일의 북부 뮌스터는 로마 가톨릭을 압도한 개혁의 도시가 되었다. 개혁자들이 자유를 찾아왔고, 각 지역에서 쫒기는 재세례파 신자들도 몰려들었다. 여러 유형의 이민자 그룹에서 얀 메테이스존이라는 이름의 일명 빵 장사가 지도자로 부상했다.

그는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권세자로 자칭하면서 뮌스터를 새 예루살렘으로 명명했다. 그리고 천년 왕국이 멀지 않았다고 유혹했다. 사유재산을 부정하고 모든 개인의 재산을 시 당국의 소유로 돌리도록 했다. 성경을 제외한 모든 서적을 불태웠다. 무서운 폭정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는 시민들 중 로마 가톨릭 세력과 프로테스탄트 일부가 합세한 세력들의 저항에 밀려 죽임을 당했다.

메테이스존의 후임으로 라이든의 얀(Jan of heiden)은 만만치 않았다. 반대세력들을 상대로 전쟁을 준비했다. 얀은 전제 군주적 강압과 스스로를 다윗 왕이라고 말했다. 그는 일부다처제를 도입하였다.
라이든의 얀은 재세례파의 이름으로 뮌스터 왕국을 이끌어 가면서 재세례파를 광신자 집단으로 만들어 버렸다. 라이든의 얀 집단은 1535년 6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세력에게 무너졌다.

뮌스터 사건이 터졌을 때 요한 칼빈도 한몫을 했다. 그 무렵 칼빈은 ‘정부의 지시를 거부하는 자들은 덤불 속의 쥐떼들처럼 갈 바를 모른다’ 또는 ‘수천 의 사람이 지옥에 가느니보다 한두 명이 화형을 당하는 것이 더 낫다’고 말했다. 재세례파를 겨냥한 발언이었다.


재세례파는 뮌스터 재림왕국 사건으로 말미암아 기독교 역사 속에서 그들의 순수와 순결, 그리고 참되고 아름다운 진리의 길에 씻지 못할 오명을 남겼다. 이 또한 무차별 희생과정에서 벌어진 해프닝으로 간직해야 할 것 같다.

5. 중흥기 지도자

멘노 시몬스
멘노 시몬스의 등장이다. 네덜란드의 가톨릭 신부 출신 멘노 시몬스(Meno Simmos, 1496~1561)는 재세례파 소탕 작전이 극심한 때, 어느 날 오후 그의 사제관에서 휴식을 취하던 중 쫓고 쫓기는 재세례파와 가톨릭 그리고 개혁파 기독교도들의 충돌 과정을 직접 보게 되었다. 그의 사제관 옆 오래된 수도원 마당으로 뛰어든 재세례파는 막다른 골목에서 그들을 잡기 위해 달려온 무리들에게 붙잡혀서 정원 복판에 있는 우물 속으로 던져지고, 잡혀 가기도 하고, 즉결 처분을 당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벌벌 떨면서 그 광경을 지켜보는데 시몬스의 친형이 산채로 우물 속에 집어 던져졌다.

멘노 시몬스 신부는 그날 이후 드디어 결심했다. 재세례파 신앙에 뛰어들기로 했다. 성경 말씀을 다시 읽으면서 그가 입고 있던 사제복을 찢어서 던져버리고 필립 옵베 형제(집사)로부터 세례(재세례)를 받았다.
그는 1524년 경 28살 나이에 로마 가톨릭의 사제가 되었으나 3년쯤 후에 미사를 드리다가 갑자기 자기 신앙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떡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살과 피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곧바로 성경을 펴고 연구를 시작했다. 성경뿐 아니라 루터의 책과 다른 개혁자들의 책도 읽었다. 그러나 그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다가 드디어 결심했다.

그에게 세례를 준 필립 옵베는 저명한 재세례파 지도자였다. 곧이어서 시몬스는 옵베로부터 감독, 즉 교역자가 되는 안수도 받았다.
멘노 시몬스의 등장으로 재세례파가 지상에 나타난 이후 10년 동안 최대의 위기, 결정적 위기, 소멸의 위기를 맞이했던 유럽의 재세례 개혁운동은 다시 살아났다. 부활했다.


재세례파 초기의 지도자들, 그들은 유럽 밤하늘의 별들이었다. 콘라드 그레벨(Conrad Grebel), 펠릭스 만츠(Felix Manz), 게오르게 블라우럭(George Blanrock), 한스 뎅크(Hans Denck), 그리고 한스 후트, 미카엘 잣틀러, 빌헬름 로이블린 등도 1년 정도의 활동을 하다가 화형장의 불길 속에 사라졌다.

헤아릴 수 없는 탁월한 지도자들이 제대로 꽃을 피우지도 못하고 쓰러져가는 때에 멘노 시몬스는 재세례파의 큰 별로 뜬다.

조효근 / 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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