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국가가 기독교일 수 있다. 아니다. 기독교다. 교회가 국가 되었고, 그래서 국가 또한 교회다. 이는 로마제국 교회의 형식이다.

이 법칙에 따라서 개인은 태어나서 유아세례를 받는다. 개인은 교회에 헌금하듯이 국가에 세금을 낸다. 재세례파 영웅적 리더들이 핍박과 학대로 순교하면서 더욱 가혹해진 핍박을 피하여 스위스 재세례파들은 모라비아 지역으로 피신했다. 이곳 리흐텐스타인(Liechtenstein) 지역의 영주들이 재세례파들을 보호해 주었다.

이 소문이 전해지자 티롤, 오스트리아, 스위스 및 독일 지역에서 쫓기던 재세례파들이 몰려들었는데 1527년에는 무려 1만2천여 명이나 정착했다.

영주들의 보호가 한계에 부딪쳤다. 국가교회, 곧 정부로부터 재세례파를 추방하라는 압력을 받았다. 영주들 중 가장 적극적인 재세례파 보호자인 레온 하르트는 재세례자들을 한 자리에 모으고, 국가의 명령에 저항코자 하니 함께 성을 지키자고 제안했다.

이때 재세례파는 무기를 들 것인가에 대한 의견으로 나뉘었다. 무기를 들고 성을 지키자는 데 동의한 후브마이어 사람들은 슈버틀러(Schwertler:검을 가진 자)라 했고, 위드만을 따르는 자들은 지팡이를 들고 성을 떠나기로 했다. 이들은 스태블러(stabler:지팡이를 소지한 사람들)라 하였다.

그러나 후브마이어를 따르는 슈버틀러는 모두 화형장의 희생물이 되었고, 위드만의 스태블러들은 길 잃은 양떼 같은 모습이기는 해도 당분간 목숨을 보존하였다. 이들의 최종적 이름이 후터라이트로 떠오르는데, 이들 재세례자들은 유무상통의 공동체이다. 비폭력을 신뢰하는 스태블러들, 그들을 보호해 줄 특별한 보호처가 쉽지 않았다.

1535년 후터라이트는 더욱 가혹한 위기에 몰렸다. 영주들에게 압력을 가했던 페르디난트 왕(King Ferdinand)이 직접 방문하여 귀족들을 압박하자 후터라이트 형제들은 최소한의 소유를 간단히 정리하여 유랑길에 나섰다.

비폭력과 무소유. 이 길을 선택한 16세기 초 재세례파 신자들의 영적이고 정신적인 가치를 어떻게, 무엇으로 보상받을까. 그들은 보상이나 위로 따위를 기대하지 않고, 자기 신앙 때문에 선택한 길을 따라 길 잃은 양떼들 모습으로 살아야 했다.

목사인 마르틴 말러(Martin Maler)와 함께 밀가루 공장 조수로 일하던 16살 소년이 있었다. 그들은 체포되어 42주간 감옥에 있었고 고통 받다가 참수형을 당했다. 그런데 정부 감독관이 16살 소년을 돕고자 했다. 그는 소년에게 “네가 만약 후터라이트 신앙을 버린다면 나의 양자를 삼겠다”고 했다. 그때, 그 소년은 “감사합니다. 그러나 나는 후터라이트 신앙을 버릴 수 없습니다” 하면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조효근 / 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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