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터를 따라서 재세레파 기독교의 명예와 품위를 지켜내는 자들을 보라. 한스 크랄은 타우피스 지역에서 선교하다가 체포되었는데 아주 잔인한 고문을 당했다.

그는 형틀로 온 몸을 잡아늘이는 아주 잔인한 고문을 당했다. 그런데도 자신의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고, 자기 조직도 발설하지 않았다. 크랄은 또 성답 밑에 자리한 지하 감옥에 갇혔는데 그곳은 아주 습하고 물기까지 많았다. 그의 옷이 썩어갈 정도였다. 죽음 직전까지 갔으나 굴복하지 않으니 출감시켰다. 그의 몸은 만신창이였다.

개인별 소개를 하려면 끝이 없다. 많은 후터라이트 형제들의 줄기찬 신앙의 지조와 인내로 드디어 황금기가 잠시 찾아왔다. 1565년부터 1592년까지다.

이 기간 동안 형제단은 유능한 지도자를 많이 확보하였고, 급속한 성장을 이루었다. 공동체의 환경도 개선되었다. 주로 한 마을 단위로 운동장을 만들고, 운동장을 중심으로 2층 건물을 지어 1층은 공동작업실과 예배실, 학교로 사용하고 2층은 결혼한 부부들의 가정으로 사용하는 등 그들의 공동체는 차츰 짜임새를 갖추어 갔다.

중세의 후터라이트는 지금처럼 농사를 짓는 것이 아니라 책 제본, 양조, 목수ㅡ 수송기구, 마차 제작, 칼, 가죽공업, 간호업, 약국, 신발 제조업, 도예, 시계제작, 외과와 치과를 겸한 이발사는 물론, 깡통, 자물쇠 제조업까지 다양했다.

후터라이트를 증오하는 사람들도 그들 공동체가 제조한 도예품이나 시계를 가지고 싶어할 정도였다. 특히 후터라이트의 교육제도는 탁월했다. 유치원이나 작은 학교 등 교육 방법은 다른 재세례파들보다도 후터라이트가 앞섰으며, 일반적으로 1800년대의 독일보다 250년 정도 앞서 있었다.

그러나 1593년 오스만 투르크와 전쟁을 치르게 되는 신성로마 제국의 영토 안에서 생존하던 후터라이트의 황금기는 전쟁과 함께 끝이났다. 이 전쟁은 무려 1606년까지 13년간이었다.
전쟁 뿐 아니라 종교개혁 기간에 타격을 받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보복이 더 심했다. 로마 카톨릭은 프로테스탄트 운동에 의해 타격을 입은 부분을 후터라이트의 영역을 지배함으로 보상받으려고 했다.

전쟁은 1606년에 일단 끝났으나 본격 전쟁이 터졌다. 소위 30년 전쟁이다. 로마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교회 빼앗기 전쟁이 1618년 부터 1648년까지 30년, 이를 두고 역사는 신·구교 30년 전쟁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전쟁은 아주 사악한 전쟁이었다. 아침 저녁으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바뀌는 숨바꼭질 곁에서 17세기의 후터라이트도 쇠약해지고 그들의 터전인 모라비아에서 추방되었다.

조효근 / 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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