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세례파’로 호칭해왔던 기독교 개혁파들은 AD 1648년 신ㆍ구 기독교 전쟁 전과 후로 그들의 역사와 운명을 나눌 수 있다.
후터라이트 공동체의 기록은 1648년 헝가리에서 추방 또는 로마 가톨릭 귀화로 일단 그들의 17세기를 정리하였다.

프로테스탄트 개혁 선언의 해인 AD 1517년 이후 신ㆍ구 기독교는 AD 1618년부터 30년간 서로 교회 빼앗기 전쟁에 몰두했다. 그 여파로 그들의 교세 쟁탈전과 상관 없이 신앙의 진실을 찾아서 현실의 안녕을 포기하고 고난의 삶을 선택한 후터라이트 사람들은 신·구교 교회 빼앗기 전쟁과 전투현장에서 울고 웃어야 했다.

한동안 대부분 프로테스탄트의 기반을 지켰던 모라비아 지역은 1620년 어느 날 밤 가톨릭 군대의 공격으로 무너졌다. 모라비아의 후터라이트 공동체가 절반쯤 인명 살상으로 말미암아 무너졌다. 절반 남아있는 60여 명도 전쟁 포로로 끌려가서 감옥에 갇혔다.

여자와 아이들은 물론 남자들은 빨갛게 달구어진 철판 위를 맨발로 걷는 형벌을 받았다. 발바닥이 늘어붙고 발톱이 다 빠지고 손가락과 귀가 떨어져 나가기도 하였다.
더구나 뒤늦은 흑사병까지 몰아닥쳤다. 흑사병은 무서운 질병, 발병한지 하루나 이틀이면 피를 토하고 죽어야 하는 병이었다.

질병과 함께 가톨릭 군대의 공격으로 1621년 경에는 모라비아는 물론 슬로바키아(헝가리) 지역으로 쫓겨가면서 살아남고자 하는 시간을 연장해 갔다. 함께 죽어도 좋다는 모라비아 귀족들도 27명이나 함께 수난을 당했다.

후터라이트는 모라비아를 완전히 떠나야 했다. 남아있고자 한다면 단 한 가지, 가톨릭으로 남아서 사제들의 지시를 받아야 했다.

모라비아 귀족들의 눈물겨운 후터라이트 공동체 보호도 더 이상 견뎌낼 힘이 없었다. 30년 전쟁이 끝나고 나면 혹시 살아남을까 했으나 처절한 박해로 리더십망이 모두 소멸되어 공동체 존속이 쉽지 않았다.
AD 1648년 이후에도 후터라이트에 대한 박해는 계속되었다. 1685년 무렵의 헝가리 후터라이트는 다양한 방식의 고문으로 공동체가 와해되어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헝가리 후터라이트는 최후의 수단으로 네덜란드 멘노나이트(Dutch Mennonites)에 재정지원 요청을 했다. 멘노나이트는 재세례파 운동을 후터라이트와 같이 해 온 동지들이지만 재정 지원을 주고 받기는 처음있는 일이었다.


조효근 / 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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