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푸(Bapu=father) 함석헌의 삶-(50) / 문대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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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상계> 속표지(1961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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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준하, 중정(中情)에 연행되다


함석헌의 글 ‘5·16을 어떻게 볼까’를 참 무거운 마음으로 7월호에 실어 내어보낸 장준하는 밤새 불안했고, 다음날은 군정으로부터의 폐간령이 있을 것을 예상하고 전 사원들을 요정 ‘대하’에 불러 모아 해산주(解散酒)를 ‘퍼마시며’ 온밤을 지새웠는데 그러나 다음날 아무 일이 없었다.

‘그냥 넘어갈 리가 없지. 무사할 리가 없어….’ 천하의 장준하로서도 긴장감이 가실 수가 없었다. ‘사상계는 없어질 것이고, 선생님과 나는 투옥을 피할 수가 없을 거고….’ 장준하는 사장석에 앉아 깊은 묵상에 들었다. 쉬 해쳐나가기 어려운 역경에 부딪힐 때마다 그가 취하는 자세였다. 거의 하루를 그렇게 보냈다. 발간된 잡지 7월호를 시중에 반포하고 4, 5일쯤 되는 날이었다. ‘혁명군’에서 나왔다는 군 작업복 차림의 몸집 좋은 두 사람이 사상계를 찾아왔다.

계급장은 없는 군복을 입고 있었다. 분명한 자세에 상대를 대하는 태도가 놀랄 만큼 정중했다. 사장과 편집책임자를 만나러 왔다는 것이었다. 당사자들이 부재중임을 확인한 혁명군부의 두 사람은 “내일 아침 일곱 시 사장과 편집책임자를 모시러 오겠으니 그 시각까지 사(社)에 나와 있도록 전해 달라” 하고는 두말없이 돌아갔다.

사실을 보고받은 장준하는 다음날 아침 취재부장인 고성훈(高聖勳)을 불러 동행케 했다. 다시 찾아온 두 사람은 자신들의 소속을 역시 아주 정중히 밝히는 것이었다. “선생님!”, 두 사람의 장준하에 대한 호칭은 ‘선생님’이었다. “저희들은 혁명군부에서 나왔습니다. 명(命)에 의해 온 것이니 함께 가주셔야 되겠습니다.” “왜, 무엇 때문입니까?” 연행의 이유를 묻는 장준하에게 두 사람 혁명군(?)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저희들도 모릅니다. 명령을 받았을 뿐입니다. 가보시면 압니다.” 연행의 이유조차 모른다는 사람들과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래요? 그럼 가야지.” 장준하 역시 군소리가 없었다. 장준하는 고성훈과 함께 혁명군부가 보내온 검은 지프에 동승했다.

장준하가 그 혁명군이라는 이들을 따라 내린 곳은 남산 밑 회현동의 한 민가형 건물로 거기 준비된 한방에 놓인 채 찾아주는 자 한 사람 없이 무려 3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자신을 연행해온 자들까지도 기다리라던가 하는 따위의 한마디 말도 없이 나가버린 후 장준하는 그렇게 버려져 장장 3시간을 말없이 자신과 싸워야 했다. 버려진 방은 천장, 바닥, 사면 벽이 진노란색을 도배되어 있고, 백열등의 조명과 광열로 달구어져있다 해야 옳을 것이었다.

수 시간이 흐르면서는 고성훈에게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뭐라 위로를 해야겠는데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런데 고성훈이 되레 자신을 격려(?)하는 것이었다.
“사장님, 저는 염려 마십시오. 저는 이 고난을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사장님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장준하는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 슬퍼서도, 두려워서도 아니었다. 이제까지 역사가 명하는 의의 길을 올곧게 걸을 수 있었다는 사실에서였다.

그는 그의 하나님께 감사했고, 이후에도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이 역사의 도상을 걸을 수 있기를 기원했다. 장준하는 자신의 삶을 통해 의의 길에서 당하는 수난이 자신의 삶을 얼마나 정화, 성화시켜주었는가를 절절히 체감하고 있었다.

“고 형, 크게 고맙소….” 장준하는 고성훈의 두 손을 굳게 쥐어주었다. 그렇게 흐른 3시간쯤 후 이전 자신을 연행해온 이들이 아닌 또 다른 군인 복장의 한 사람이 나타났다.
“나오시오. 나를 따라오시오.” 장준하와 고성훈을 찾은 이 사람이 한 말은 딱 두 마디였다. 역시 검정 지프가 대기하고 있었다. 잠시 후 도착한 곳이 바로 저 민주혼(民主魂)으로 호곡(號哭)을 금치 못하게 한 남산(南山)이라는 곳이었다.
 

  • 장준하와 김종필의 대면


거기 금새 알아볼 수 있는 한 조사실에서 다시 기다리기를 한 시간여, 또 다른 두 사람의 안내로 또 다른 곳으로 인도되었는데 그곳이 바로 한 달여 전 5·16 군사반란의 주모들로 조직된 소위 그 중앙정보부의 부장실이었다.

아직 방 주인은 없고 안내자의 지시로 두 사람은 접객용 소파에 앉아 기다렸다. 한참 후 요란한 군화 발자국 소리들을 내며 호위병들과 함께 비로소 방 주인이 들어왔다. 장준하는 물론 초면이지만 신문 등에서 익히 본 얼굴인지라 상대가 누구인지를 바로 알 수 있었다.

계급장이 없는 군 작업복 차림의 그는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릴 중앙정보부장 김종필(金鍾泌)이었다. 그의 소위 중앙정보부는 조금 후엔 “여자를 남자로, 남자를 여자로 바꾸는 것 말고는 못하는 것이 없다”는 기구가 된다. 기형(奇形)이었다. 천하의 기형! 김종필은 당시 두 자루의 권총을 차고 있었다. 그를 지키는 것이 총이었고, 대한민국의 합헌정부를 탈취한 5·16 쿠데타에서 제일의 보호수단이 바로 김종필의 좌우 허리에 찬 두 자루의 권총이었다.

김종필은 그 두 자루의 탄띠를 풀어 그의 책상에 신경질적으로 내던졌다. 김종필이 지금 소파에 앉아있는 둘 중의 한 사람이 장준하라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 사람, 장준하를 말이다. 그런데도 김종필은 자신의 부하들과 딴소리만 계속 하는 것이었다. “한 치도 흔들림 없이 혁명과업을 완수해야 한다”느니, “혁명과업 수행에 방해물이 되는 어떤 세력도 용납할 수 없다”느니….

장준하는 지금 김종필의 하는 소리가 자신을 겁 먹이려 하는 것임을 모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그저 묵묵히 앉아 있었다. 천하의 장준하라 한들 인사조차 해주지 않는 자에게 뭐라 할 것인가?
김종필은 자기 자리에 앉아 서류를 뒤적이기도 하고 무슨 메모를 하기도 하고, 보좌관들은 다 자기 자리로 돌아갔고, 고성훈과만 함께 있게 되었는데도 말이 없었다. 철저하게 무시하는 태도였다.

장준하는 홀로 견딜 수 없을 만큼의 쓴웃음을 지었다. 김종필이라! 장준하에게는 예비역 육군중령 김종필의 이력서가 지금도 자신의 서류집에 들어있다. 4·19로 자유당독제가 종식되고 7·29 총선을 거쳐 장면 정권이 수립되면서 설립된 국토건설본부의 기획부장직을 맡아 있을 때 국토건설을 위한 요원 모집에 접수된 이력서였다. 지그시 눈을 감은 장준하는 만감이 교차했다.

아, 그 김종필이었어…. 그런데 다시 정보부장실의 문이 열렸다. “부장님, 여기…”, 부장의 보좌관으로 보이는 역시 계급 없는 군복의 한 착용자가 들어와 두툼한 책 한 권을 전달하고 돌아간다. 김종필에게 전달된 이 책이 바로 5·16 군부반란 세력에의 저항의 칼이 된 함석헌의 저 유명한 ‘5·16을 어떻게 볼까’가 실린 사상계 7월호였다. 그 책은 흰 종이로 그 표지가 입혀져 있고, 함선헌의 그 글 ‘5·16을 어떻게 볼까’는 빨강, 파랑, 노란색들로 거의 도배질이 되어 있었다. 김종필은 그 책을 장준하 앞에 놓인 테이블에 내던졌다.

“장 사장, 목숨을 걸고 일으킨 구국운동을 이렇게 악평을 할 수 있소? 이건 도저히 용서할 수 없소. 도대체 ‘정신분열증’ 들린 영감쟁이의 이따위 글을 어떤 저의로 당신 잡지에 실은 거요? 어디 당신 이야기 좀 들어봅시다.”

이미 김종필은 장준하에게 정상이 아닌 듯 했다. 김종필의 책상에 놓인 두 자루의 권총은 무섭지도, 걱정되지도 않았지만 그 권총의 주인 김종필은 정말 문제라 여겨졌다. 그런데도 일말 다행스럽게 여겨진 것은 김종필의 어투였다. 함석헌을 ‘정신이상자’, ‘정신분열자’라는 과언 이외에는 의외로 낮은 음성에 격(格)마저 잃지 않는 것이었다.

당시나 그 후에나 박정희의 유신 전두환의 신군부치하에 ‘남산’으로 통칭되는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다 하면 받는 대우는 오직 하나 ‘개 취급’이었는데, 장준하의 함석헌 변론과 구국의 길 논(論)을 제지하지 않고 두 시간여 귀담아 들은 김종필은 장준하마저 의외라 생각할 만큼 인간적(人間的)이었다.

김종필은 마지막으로 장준하의 5·16혁명 당국에 대한 견해를 듣고 싶다고 했다. 장준하의 답 또한 명쾌했다.
“한시라도 바삐 과업을 완수하고 군대로 돌아가야 합니다.”

  • 함석헌이 말하는 4·19와 5·16

그것은 함석헌의 ‘5·16을 어떻게 볼까’에서 외친 말이기도 했다. 함석헌은 인류사(人類史)에 있어 용서할 수 없는 범과는 ‘칼을 쓰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때는(4·19, 필자주) 맨주먹으로 일어났다. 이번은(5·16, 필자주) 칼을 뽑았다. 그때 믿은 것은 정의의 법칙, 너와 나 사이에 있는 양심의 권위, 도리였지만 이번에 믿은 것은 총알과 화약이다. 그만큼 낮다. 그때는 민중이 감격했지만 이번은 민중의 감격이 없고 무표정이다. 묵언이다. 그때는 대낮에 내놓고 행진을 했지만 이번엔 밤중에 몰래 갑자기 됐다.’ 함석헌의 4·19와 5·16의 의미와 그 가치의 비교는 계속된다. ‘학생이 잎이라면 군인은 꽃이다.

5월은 꽃달 아닌가? 5·16은 꽃 한번 핀 것이다. 꽃은 찬란하기가 잎과 비교할 수 없다. 저번은 젊은 목청으로 외쳤지만 이번은 총칼과 군악대로 행진을 했고 탱크로 행진을 했다. 그러나 잎은 영원히 길어야 하는 것이지만 꽃은 활짝 피었다가는 깨끗이 뚝 떨어져야 한다. 화락능성실(花落能成實)이다. 꽃은 떨어져야 열매 맺는다. 5·16은 빨리 그 사명을 다 잊고 잊혀야 한다….’

함석헌은 이어서 어떤 경우에도 민중 없이 혁명은 없다고 선언한다. ‘혁명은 민중의 것이다. 민중만 혁명할 수 있다. 민중의 전적 찬성, 전적 참여 없는 혁명은 거짓이다. 그러므로 독재란 있을 수 없다. 민중의 의사를 무시하고 꾸미는 혁명은 아무리 성의로 했다 해도 참이 아니다. 또 민중의 의사를 모르고 하는 것이 자기네로서는 아무리 선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성의는 아니다. 강아지를 아무리 잘 길러도 그것이 참 사랑은 아니다.

…민중을 내놓고 꾸미는 혁명은 참 혁명이 아니다. 반드시 어느 때 가서는 민중과 바그라지는 날이 오고야 만다. 즉 다시 말하면 지배자로서 본색을 나타내고야 만다. 그리고 (민중을) 오래 속였을수록 그 죄는 크고 그 해는 깊다. …그러므로 할 일을 다 한 후에는 곧 정권을 민간인에 물려주고 본래의 자리로 물러간다 선언한 것은 참 군인다운 말이다.’

이런 함석헌이 무사할 수만은 없었다. 구국혁명세력을 거스르는 자는 용납하지 않는다. 그래서 칼을 뽑아든 무리들이 그 거사를 통째로 거부해버린 늙은이, 교수도, 박사도, 신부목사도 아닌 정말 별 볼 일 없는 늙은이를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는가?드디어 국가재건 최고회의는 함석헌 단죄의 칼을 뽑아들었다. 이른바 ‘함석헌 처리 件’이었다. 이 함석헌 처리 건의 최고회의 사회자는 바로 김종필이었다. 김종필을 포함해 7인의 의원, 역사적인 사건이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함석헌의 구속이냐, 불구속이냐를 놓고 의견들이 3:3으로 정확하게 나뉘어졌다.

사회자 김종필의 결정이 문제를 좌우하는 순간이었다. 김종필은 순간 남산을 다녀가며 남긴 장준하의 말이 그대로 가슴에 남아있었다.

“김 부장, 김 부장께 내 긴히 청이 하나 있소이다. 이 일로 누군가가 감옥에 가야 하는 일이 생긴다면 내가 가게 해 주시오. 만일 함석헌 선생이 투옥된다면 이것은 김 부장과 이 장준하 모두에게 두고두고 큰 부끄러움이 될 것이외다.”

생명교회 원로 목사
전 함석헌기념사업회 이사장

※ 함석헌의 삶 연재는 매달 마지막 주마다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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