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푸(Bapu=father) 함석헌의 삶-(51) / 문대골

   
▲ 신학자 안병무와 함께한 함석헌 선생(1970년대).

 

함석헌의 ‘5·16을 어떻게 볼까?’는 이미 누누이 언급해온 것처럼 실로 엄청난 파고를 일으켰다. 한순간만이 아니었다. 1961년 7월호 사상계에 그 글이 발표된 후 그가 그 육을 벗고 유명을 달리하는 1989년 2월 4일까지 함석헌이 일으킨 파고는 꺼질 줄을 몰랐다. 적어도 함석헌을 통해 이후의 민중들은 ‘칼’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정말 무서운 것은 ‘참에 사무친 혼’이라는 것을 배우기 시작했다. 박정희가 뽑아든 그 날 선 칼날 앞에서 “한마디 하자”며 천연(天然)히 내어놓는 그 한마디는 실로 무거운 것이었다. 그의 박정희의 군부세력을 향한 질타는 집요했다. 그것은 이미 그의 생명을 접어놓고 하는 항의였다.


“그거는 어미 아비가 아니라 강간한 놈.”
“언론인 다 죽었나? 죽였나?”
“선의(善意)의 독재라는 말 하지만 그것은 내용 없는 빈말이다. 선의인데 독재(獨裁)가 어떻게 있으며 독재거든 어떻게 선(善)일 수 있을까? 강간이 사랑인가?”
그는 특히 언론의 탄압을 질타하면서, “…사람됨이 어디 있느냐? 자유(自由)지. 자유에만 (사람됨이) 있다. 자유가 무엇이냐? 정신의 맘대로 자람 아니냐? 정신이 어떻게 자라느냐? 말함으로만, 말 들음으로만 자란다. 제발 이 오천년 아파도 아프다 소리를 못하고, 슬퍼도 목을 놓고 울어보지도 못한 이 민중을, 이제 겨우 해방이 되려는 민중을 또다시 그 입에 굴레 씌우지 말라. 정신이 이상이 생겼거든 지랄이라도 맘대로 하게 해야 할 것이다.”

그는 자유언론(自由言論)을 신명을 걸고 외쳤다.
“왜 말을 못하게 하나? 왜 말을 못 듣게 하나?”
꿀 먹은 벙어리 같던 신문, 방송, 잡지들이 그 군사폭력을 향해 저항의 몸짓을 시작한 것은 상당부분 함석헌의 그 글 ‘5·16을 어떻게 볼까?’를 통해서였다.
함석헌에게 열린 세계유람의 문(門)

그런데 이 글 후 함석헌에겐 참으로 묘한 일이 일어난다. 그가 미 국무성 초청으로 미국의 조야를 돌아보고, 교포들을 만나고 이어서 세계여행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 일의 시작은 장준하를 통해서였다. 함석헌의 글 ‘5·16을 어떻게 볼까?’를 세상에 내보낸 장준하는 외부로부터 가해질 자신에 대한 위해(危害)에 대해서는 별 무관심이었으나 함석헌에 대한 염려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제까지 형언하기 어려우리만큼의 고난의 생(苦難史)을 살아온 사람인지라 한번쯤은 밖에 나가 큰 바람 쐬면서 세계를 돌아보게 하는 것은 어떨까? 함석헌에 대한 장준하의 관심은 실로 지극한 것이었다. 세계의 지도를 놓고 ‘세계사’를 말할 수 있으리만큼 한국역사는 물론이요, 세계사에 정통한 그였지만 그는 이제까지 그가 공부한 4년간의 교육대학 과정의 일본을 제외하곤 외국이라곤 나가 본 적이 없었다.

“그래, 선생님께 미국을 비롯해 세계여행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드리자….”
장준하는 어떤 생각이 점을 이루면 그 실행에 머뭇거림이 없는 사람이었다. 장준하는 이후 계속될 한국사(韓國史) 속에서의 함석헌의 자리까지를 그려보고 있었다. 장준하가 글 쓰지 않겠다는 함석헌을 붙들고 “선생님, 글 쓰셔야 합니다. 말씀하셔야 합니다”라며 간청했던 것은 결코 사상계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함석헌은 장준하가 자신을 역사의 사람으로 믿어줌이 고마웠고, 그래서 “글은 무슨 글, 말은 무슨 말, 안반덕(함석헌의 씨알농장:필자 주)에나 가 있으면 좋겠다” 하면서도 그는 장준하의 권유를 따라 글쓰기, 말하기를 쉬지 않았다. 함석헌 주위의 사람들은 장준하로부터는 “선생님을 위해서라면…” 하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지만, 함석헌으로부터는 “장준하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할 테야” 하는 말을 듣는 게 드문 일이 아니었다. 김대중보다도 장준하에게 거는 기대가 더했다.

정치(政治)라는 그 ‘정’ 자에도 담을 쌓고 사는 그였지만 그런 그가 주위의 상당한 반대와 오해를 개의치 않고 훌쩍 당시의 제일야당이었던 신민당 당원이 되었던 것도 장준하를 위해서였다. ‘박정희의 맞수’라는 이름으로 장준하의 이름이 널리 오르내리던 때, 1967년 5월 8일 대통령선거법 148조 위반으로 투옥되는데, 그해 6월 8일 국회의원선거에 박정희의 충복으로 민주공화당 서울시당 위원장 강상욱과 옥중 출마로 대결하게 되자 (당원만 정당의 선거운동원이 될 수 있다는) 당시의 선거운동법에 따라 장준하의 당선을 위해 “참 체질에 맞지 않는 일”을 자원한 것이다. 장준하는 미 대사관의 문정관 그레고리 핸더슨(Gragory Handerson)을 찾았다. 핸더슨과는 거의 10여년에 이르는 교우를 지속하는 관계였다.

장준하가 피난수도에서 <사상계>의 전신인 <사상(思想)>을 창간하여 발행하던 때 앤더슨은 USIS(United States Information Service: 미국문화정보국)의 요원으로 재직하면서 장준하의 <사상> 창간호를 받아보고서부터 말없이 음양으로 장준하의 언론운동을 지원한 이였다. 그는 한국어를 읽고 이해하고 쓰기까지 하는 이였다. 장준하는 핸더슨 앞에 그의 잡지 <사상계> 1961년 7월호를 내놓았다. 함석헌의 글 ‘5·16을 어떻게 볼까?’를 간단히 설명하고 일차 정독해 줄 것을 요구했다. 핸더슨은 웃으면서 “미스터 장, 나 이미 그 글 두 차례나 읽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이 군정치하에서 그런 글을 쓸 수 있단 말이오. 언론탄압이니, 검열이니, 언론실종이니 하는데 말이오?”

장준하도 조용히 웃으며 함석헌에게 미국을 위시한 세계여행의 선물을 마련해드리고 싶은데 방법이 없겠는가고 핸더슨의 지혜를 구했다. 핸더슨은 장준하의 제의를 받자마자 이내 ‘5·16을 어떻게 볼까?’를 영역해 미 국무성 한국과에 보냈고 이를 받아본 미 국무성은 “이런 글이 보도되고 있는 걸 보면 코리아가 군부의 국가는 아닌 것 같다” 했고, “도대체 이런 글을 쓴 사람이 누군가? 그 노인 한번 보자.” 이래서 함석헌의 국무성 초청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군부반란을 질타한 함석헌의 ‘5·16을 어떻게 볼까?’, 핸더슨의 손에 의해 전달된 이 글이 미 국무성으로 하여금 코리아의 군부정권에 대해 오히려 안심하게 하는데 적지 않은 일조를 했다는 것이다. 이보다 더한 아이러니가 있을 수 있을까?

이래서 함석헌은 1962년 2월 9일, 미 국무성 초청으로 도미의 장정에 올랐다. 혁명군의 의지를 관철(?)하는 대로 지체 없이 정권을 민간에 이양하고 자신들은 군대로 복귀하겠다던 박정희 군사정권의 민정참여를 발표하자 1963년 6월 23일, 군정의 민정참여 저지를 선언하며 귀국하기까지 1년 5개월 동안 계속된 함석헌의 세계여행은 그로 하여금 ‘한 생명’의 동양사상과 개인권의 자주와 민주주의의 이상을 자신 안에서 용해(溶解)하여 세계 구원의 새 세상을 염원하는 그에게 적지 않은 자원을 형성케 했다.

1964년 말경까지로 계획된 그의 세계여행이 63년 6월에 마감되어야 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국무성 초청기간 3개월, 팬들힐에서의 종교 체험 4개월, 재미교포들과의 강연, 좌담, 관광을 통한 친교로 수개월, 도합 1년여, 그리고 영국 외무성의 초청으로 1963년 1월 런던에 도착해 우드브룩의 퀘이커 대학을 거처로 4월 말까지 머물고, 그리고는 그가 “정말 좋은 친구”인 안 형(함석헌은 열한 살 아래인 안병무를 그렇게 불렀다)을 찾아 독일로 간다.

“일생에 못 잊을” 안병무를 찾아서

당시 안병무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예수 연구’에 전념하고 있었는데 함석헌이 미국 뉴욕 김용준의 숙소에서(김용준은 당시 대한민국공업연구소 연구원으로 미국의 AID(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 자금 지원으로 미국표준국중앙연구소 기술연구차 재미 중이었음. 후에 고려대 부총장. 김용옥 교수의 친형. 필자 주) 김용준과 함석헌의 미국 체류 이후 영국·독일 등의 여행 스케줄을 만들게 되었다. 영국에서 4개월여의 여행을 마치고 독일에 온 함석헌은 두 달여를 독일에서 체류하게 되는데 그 중 한 달은 안병무와 붙어서(?) 살았다. 함석헌은 그 한 달을 자주 떠올리곤 했다.

70년대 후반 무렵 함석헌과 안병무, 그리고 함석헌의 제자들이 신촌에 있는 한 레스토랑에 모였다. 함석헌이 ‘그 한 달’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그 한 달처럼 내 일생에 기쁜 때가 없었지….”
안병무 역시 꽉 찬 기쁨의 표정이었다. 제자 중 하나가 두 사람을 번갈아보며 “두 분이 동성애 하셨군요?” 했다. 모두가 즐거워했다.

그 제자들 중엔 여성도 몇 있었는데, 함석헌을 빤히 쳐다보던 안병무가 이번엔 자기 곁에 앉아있는 한 여 제자에게 그녀만 들을 수 있는 낮은 음성으로, “야, 저렇게 잘생긴 얼굴, 여자들이 가만 둘 수 있겠냐?” 했다. 그 소리를 안병무의 반대편 곁자리에 앉았던 함석헌의 또 다른 제자가 들었다. 안병무의 그 말 속에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으리라 생각했다. 함석헌이 “평생에 잊을 수 없는 기쁨의 때”였다고 말하는 그때, 선생을 직접 모시고 있었다는 사실에 안병무도 흐뭇해하는 그때, 1963년 5월! 그러나 그 두 사람 함석헌과 안병무의 가슴은 어두움과 답답함으로 덮혀 있었다. 두 사람은 한맘으로 예수와 민중을 섬기는 선각자들이었다. 후에 안병무는 민중신학자로 한국 기독교계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인물로 알려지고 함석헌은 그 민중을 ‘씨알’이라는 새 이름으로 부르며 씨알 철학의 창시자로 자리한다.

“삼십대에서 오늘날까지 내가 해온 것이 있다면 그저 ‘민중이란 뭔가?’ 하는 거예요. 나면서부터 임금이란 걸 모르고 자랐으니까 그랬고, 정치가 뭔지 모르고, 정치 혜택이 오지 않는 나라 서북 끄트머리 해변에 났으니…”(삼인, <끝내지 않은 강연> p. 111. 2001.4.21).

평생에 해온 생각 “민중이란 뭐냐?”

평생에 해온 것이 민중이라는 함석헌, 그런 그의 세계여행이 그 민중을 군사정권 폭정 아래 두고 평안할 수가 없었다. 후에 쓴 안병무의 글에서도 그런 내용들이 발견된다. 여행 중인 함석헌에게 안병무는 “어려운 시기에 세계유람이란 어딘지 석연치 않아서 간간히 그의 의중을 물었던 적이 있다”(안병무, <74년의 생애> <시대와 증언>, 한길사, 1983. p. 149~151, 이치석 <씨알 함석헌 평전>, 시대의창, 2005. 11.15.)고 했다. 함석헌과 안병무의 인격 값은 그들의 혼에 있다 할 것이다. 사람을 사람으로 살게 하는 것, 버티게 하는 것이 그 혼이요, 넋이요, 얼이요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늘이 그 혼의 사람들에게 하나의 역사적 계기를 제공한 것일까? 함석헌은 어느 날 아침, 안병무의 자취방에서 배달된 독일신문에 ‘한국의 군사쿠데타 세력이 군대 복귀를 거부, 민정에 참여한다’는 기사를 읽었다. 신문을 든 채 눈물을 쏟는 함석헌을 본 안병무도 함께 눈물을 흘려야 했다.
“나 한국에 돌아갈래….” 함석헌의 말이었다.
“그래요. 선생님, 돌아가셔야 합니다. 이번에 가시면 가만있어선 안 됩니다.”
“그래, 싸워야지. 싸울 거야!” 함석헌의 대답은 단호했다.

생명교회 원로 목사
전 함석헌기념사업회 이사장

※ 함석헌의 삶 연재는 매달 마지막 주마다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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