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사회가 차츰 안정되어가면서 아미쉬는 기독교 신교의 여러 교파들로부터 집중해서 박해를 당했다. 그들은 침례교, 감리교, 심지어 모라비아파 교회로부터도 핍박을 당했다.

아미쉬는 개종을 강요당하기도 했고, 더구나 인디안과의 전쟁, 독립전쟁, 남북전쟁 등을 통해서도 피할 수 없는 핍박의 연속이었다. 1755년부터 1763년까지 있었던 프렌치 인디안 전쟁 중에는 아미쉬가 인디안의 주요 공격 목표였다.

평화와 무저항주의를 제창한 아미쉬는 독립전쟁 때도 어김없이 핍박을 당했다. 1861년부터 5년동안 있었던 미국의 남북전쟁 기간에는 징집 유예의 대신으로 한 사람당 300달러의 세금을 냈다. 이 돈이 당시로는 거금에 해당했다.

1, 2차 세계대전 중에도 아미쉬는 양심적 병역거부자 혜택을 받기도 했으나 대체 복무기간 에 일반사회인과 어울렸던 젊은이들 중 복무기간이 끝난 뒤에도 아미쉬 공동체로 돌아오지 못한 이들도 있었다.

1880년대에 이르러서 아미쉬 공동체가 대강 정리되었다. 1개의 보수파와 4개의 진보파로 가닥을 잡았다. 이때부터 보수파는 올드 오더 아미쉬(The old order Amish)로 자기 위치를 지켜가며 타교파와 다른 자주성을 가졌다. 나머지 진보파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멘노나이트로 합류해 갔다.

끊임없는 시련을 겪어온 아미쉬는 소수자 집단이 되어 갔지만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아미쉬는 10년마다 실시하는 미국의 인구조사에서도 그 규모가 드러나지 않았다. 그들 스스로도 어디에 몇 명이 살고, … 식으로 자기들의 분포상황을 공개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 조직 구성에서도 공동체 전부를 관장하는 기구가 없기 때문에 그들 아미쉬는 큰 숲속의 작은 호수들처럼 살아가고 있다.

아미쉬는 오하이오 주에 401개 교구(약 6만 명), 펜실베니아 주에 364개 교구(약 6만 명), 인디애나 주에 281개 교구(4만2천여 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아미쉬는 다른 기독교 교구에 비해 교도 수가 적지만 숫자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러나 현대사회 구조가 안정되고 있어서 아미쉬의 공동체 운동은 다른 교파들에 비해서 더 활발하므로 2030년 경에는 50만 명, 2050년에는 100만 명에 육박할 것으로 메노나이트 주간신문인 메노나이트 위클리 리뷰지는 계산하고 있다.

 

 

 

조효근 목사 / 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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