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푸(Bapu=father) 함석헌의 삶-(53)

   
 


“참 정치가는 백성들로 하여금 죽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도록 일깨워 가야 한다. 그런데 거꾸로 정치한다는 자들 중에 민(民)으로 하여금 죽음을 가지고 겁먹게 하는 자들이 있다. 역사는(하늘은) 이런 자를 용서하지 않는다.”


# 한국의 예언자
1961년 5월 16일, 박정희의 군사반란 이후 군부정치(?) 30년 동안 민주회복을 외치는 사람들, 민주주의의 쟁취를 위해 반독재의 전선에 선 사람들은 물론, 이름없는 맨 바닥의 민초들의 세계에서까지 함석헌의 이름은 갖가지로 회자(膾炙)되었다. 사상가, 종교가, 철학자, 한국의 간디, 민중의 지도자, 종교적 예언자…. 이렇듯 갖가지로 불려진 함석헌의 별칭 중 필자로 하여금 주목하게 하는 것이 ‘예언자’이다. 예언이란 하늘 뜻을 풀어 밝히는 일이다. 그것은 어떤 의미일 수도 있고 사건일 수도 있다.

예언이란 말이 이후에 있게 될 어떤 사건을 미리 느끼거나 투시해 하는 것으로 이해하기 쉬우나 그것은 과거의 사실일 수도 있고 현재의 사실일 수도 있다. 과거의 사건이거나 현재의 사건이거나 미래의 사건이거나 간에 그 사건에 담긴, 혹은 그 사건을 통해 드러내려는 절대의 의지를 선포하는 것 그것이 예언이라면 함석헌은 가히 당대의 예언자였다고 단언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주변부의 사람으로, 삼류의 사람, 삼류들의 사람으로 생을 살아낸 함석헌, 그는 실로 현실적인 모든 것들을 버린 자였다. 그래서 얻은 것이 천지의 혼, 민중의 혼이었다. 그 혼이 함석헌을 예언자로 이끌었다.

이승만의 자유당 말기에서부터 박정희 이후 군인정치(?) 30년 동안 그렇게 격렬하게 이어진 그를 향한 민중의 환호와 감격은 그 민중들이 그를 통해 바로 자신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민중은 일인통치의 압박으로 인한 신고(辛苦)를 하늘에 울부짖었고, 하늘은 그 울부짖는 민중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예리하게 감각하는 함석헌을 불러 그 해방의 대임을 부여했던 것이다. 그래서 외치는 함석헌의 소리는 자유와 해방을 갈구하는 민중들에겐 바로 하늘의 소리였다.

함석헌은 하늘이 역사의 주체로 품는 민중을 압박하고 그 천부의 권리를 유린하는 군인정치, 그 군인정치의 총수(統帥)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자타가 공인하는 평화주의자 함석헌이었지만 그때, 그 민중 속에서의 함석헌은 실제로 박정희는 역사에서 제거되어야 할 자라고 확신했고, 함석헌의 이 확신은 박정희의 유신통치로 접어들면서 드디어 밖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역사에서 제거되어야 할 자라는 것이었다.

# 함석헌의 10·26 예언, “常有司殺者殺”
상유사살자살, “죽여야 할 자를 죽이시는 이가 하늘에 있어.”
범인으로서도 차마 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하물며 사상가요 평화주의자로 자타가 공언하는 함석헌 아닌가? 더군다나 그 살(殺)해야 할 대상이 대통령이라니….

1973년 7월 16일, 국제엠네스티 한국지부(지부장·윤현 목사) 주최로 당시 명동에 위치한 대성빌딩 흥사단 대강당에서 〈형벌과 인간양심〉이라는 주제의 강연회가 개최되었다. 강사는 함석헌이었다. 〈형벌과 인간양심〉이라는 주제는 주최측에서 제시한 것이었고, 상유사살자살(常有司殺者殺)이란 노자의 도덕경 74장 제혹(制惑)에서 인용한 것으로, 함석헌이 이날 밤 강연에서 하늘이 살(殺)해야 할 자로 박정희의 실명을 거명하지는 않았지만 듣는 청중들은 예외없이 함석헌이 박정희를 겨냥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었다. 함석헌이 풀어가는 제혹은 이랬다.

“참 정치가는 백성들로 하여금 죽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도록 일깨워 가야 한다. 그런데 거꾸로 정치한다는 자들 중에 민(民)으로 하여금 죽음을 가지고 겁먹게 하는 자들이 있다. 역사는(하늘은) 이런 자를 용서하지 않는다.”

함석헌이 이어서 한 말이 그 “상유(常有) 사(司) 살자살(殺者 殺)”, 곧 그 죽어야 할 자를 죽이는 이가 계신다”는 것이었다. 함석헌은 박정희의 박(朴) 자 하나도 언급하지 않았지만 듣는 이들은 “아, 하늘이 박정희를 내치려하는 소리로구나” 하고 있었다.

함석헌은 지나쳤다고 생각이 되었던지 노자의 다음말을 이어갔다.

“여러분 흥분하지 마시오. 죽이는 일 아무나 하는 것 아니오. 夫代司殺者殺, 是謂代大匠斲이라 했소. 夫代司殺者殺이라니, 그놈 내가 죽이겠오 하고 나서는 놈 말이외다. 是謂代大匠斲이라, 그건 톱질도 제대로 못하는 주제에 도편수하겠다고 나서는 꼴이라, 希有不傷基手矣라, (그래서는) 자기 손 다치지 않는 놈 없다 했습니다. 하늘이 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하겠다고 나서지 말란 말입니다.”

이 함석헌이 생유사살자 살 풀이를 해가는데 강사 함석헌이 서 있는 강단 바로 아래서 함석헌의 강연의 전 내용을 녹음기에 담고 있는 이가 있었다. 씨알의소리 편집장 박선균이었다. 그는 후에 그가 함석헌의 분신으로 살아온 7, 80년대 중, 박정희의 유신통치하에서 함석헌과 씨알의 소리가 어떻게 싸우며 살아왔는가의 뒷이야기를 묶어 “70년대 「씨알의소리」 이야기”를 출판했는데, 이 씨알의소리이야기에 그날 1973년 7월 16일 밤의 함석헌의 강연을 녹음하면서 느꼈던 감정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필자는 이 말씀을 들으면서 또 녹음을 다시 듣고 원고화하면서 이 말씀은 보통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2500년 전 노자의 말씀 자체도 놀랍지만 그 말씀을 선택하여 우리에게 소개해주시는 함 선생님 또한 놀랍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 말씀을 마친 다음 당국에서 또 문제삼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아무 일이 없었다”(70년대 「씨알의소리」 이야기 p. 105, 도서출판 善, 2005. 2. 26).

# 박선균이 전하는 함석헌의 10·26 예언
또 박선균은 같은 책 108쪽, 109쪽의 지면을 통해 박정희의 종말에 대한 함석헌의 예언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어느 날이었다. 원효로 선생님 댁이자 씨알의 소리사를 찾아온 몇몇 씨알들과 대화 중 선생님이 하신 말씀을 잊지 못한다. “내가 그의 끝을 보기 쉽지…” 하시곤 더 말씀을 잇지 못하셨다. 여기서 “그”는 박정희를 가리키고, “끝”이란 박정희의 최후를 가리킨다. 풀어 말하면 “내가 박정희의 최후를 볼 것이다” 하는 말씀이다. 이것은 장준하의 죽음에 대한 분노나 감정적으로 한 말씀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군사정권과 함 선생님만큼 철저하게 싸운 사람도 없지만, 대적이라도 미워하는 마음으로 해서는 안된다 하시고 언제나 평상심으로 돌아가 꽃을 가꾸시고 뜰을 쓸고 기도와 명상 가운데 자연스럽게 느껴진 어떤 영감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자연적 인생으로 볼때 선생님은 1901년 생이시고, 박정희 씨는 1917년생으로 16년이나 연상인 선생님이 박정희의 끝을 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부질없는 생각이지만 가정하여 박정희 대통령이 3선까지만이라도 하고 자연인으로 돌아갔더라면 지금쯤(2005년·필자주) 함선생님은 돌아가셨지만 박정희 씨는 존경받는 전직 대통령으로 국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살아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는 자연인이 될 리도 없었고, 3선도 모자라 유신헌법을 만들어 종신대통령 자리에 서서 국민주권을 얼마나 짓밟았던가. 모든 언론을 통제하고, 유신에 반대하고 영구집권에 저항하는 어떤 세력도 용납하지 않는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1호에서 9호까지의 긴급조치를 발동하여 철권을 휘둘렀던 것이다. 박정희 씨는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했다. “학생데모 뿌리뽑겠다.” 함석헌도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했다. “학생데모 뿌리 못 뽑는다. 학생데모 뿌리 뽑으려다가 너희 뿌리먼저 뽑힌다.” 우리는 어느날 박정희 씨가 이렇게 말했다고 함 선생님의 전하는 말을 들었다.

“내가 물러나간다고 그냥 물러날 줄 아느냐? 내 몸은 청화대 기둥에 묶어 놓고 끝까지 나도 총을 쏘다 죽는다.” 함 선생님도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셨다. 필자는 나도 모르게 소름이 죽 끼치는 것을 느꼈다. 그 후의 역사이야기를 길게 할 마음이 없다. 마침내 1979년10월 26일이 왔다. 함 선생님은 말씀하신 대로 “그의 끝”을 보시고 10년을 더 사신 것이다.”
박선균은 이렇게 박정희의 최후에 대한 함석헌의 예언을 전해주고 있다.

# 워싱톤한인교회에서 들려온 함석헌의 10·26 예언
함석헌은 박정희의 1972년 유신선포를 기점으로 이미 그가 역사로부터 유기된 자임을 내심 단정한다.
‘죽일 자를 죽이는 이가 계신다’는 常有司殺者殺이 그렇고, 박선균이 전하는 “내가 그의 끝을 보기 싶지…” 했다는 말이 그렇다. 함석헌은 박정희가 그 생명의 종말을 맞던 무렵 미국의 워싱턴에 있었다. 8월 11일 스위스에서 열리는 퀘이커세계대회에 참여하기 위해 출국, 대회를 마친 후 미 교포들의 간청이 있어 귀국의 방향을 틀어 워싱턴을 방문하게 된 것이다.

함석헌이 박정희의 종말을 다시 예언한 곳은 워싱턴한인교회에서였다. 1979년 10월 4일, 함석헌은 해당 교회로부터 워싱턴교포들의 연합강연회에 말씀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강단에 오르게 된다. 10·26 사건이 일어나기 12일 전이었다. 말씀의 제목은 ‘웃으면서 싸워봅시다’였는데, 그는 30대, 4~50대 때부터 감옥에 드나들게 되면서 앞에 올 일을 미리 알게된다든가 하는 미스틱한 경험을 늘 하게 되서 50대 후반, 60대에는 스스로 결단하기를 참 종교는 역사와 분리될 수 없는 것이고,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생각하는 힘을 키우는데 있는 것이라며 소위 그 신비체험이라는 것을 털어내기 위해 끊임없이 싸움을 해오고 있는 터였다. 그럼에도 언듯언듯 함석헌은 예언적인 말을 토해내곤 했다. 이날 함석헌의 일말의 내용이 입추의 여지없이 들어찬 청중들을 숨죽이게 했다. 그것은 10·26 사건에 대한 정확한 예언이었다.

“사람의 절을 받을 놈 세상에 없다”면서, “워십(worship)이니 듀티(duty)하는 거 다 절을 의미하는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께만 드리는 것으로 아주 엎디어서, 사지몸뚱이 납작 엎드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는 거예요. 하나님에게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고는 내 절 받을 놈 세상에 없어요.” 함석헌은 “그런데 임금이라는 것들이, 대통령이라는 것들이 민중의 절을 받으려 해요. 신이 되겠다는 거지. 그러나 그것들은 아버지의 이름을 쓴 밤나무조각 같은 거야. 옛날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 비교적 썩지 않고 오래가는 밤나무를 골라 패를 만들어 거기 아무개 신위(神位)라고 써서 세워놓고 그걸 보고 절을 했어요. 그렇다면 심볼과 실제를 구별할 줄 알아야지. 제가 실체인 것처럼 칼을 뽑아 들고 “내가 제일이다. 내가 나간다” 그러면 벼락 맞을 소리”, 여기까지 말한 함석헌은 한참 뜸을 드리고는 이렇게 말을 이었다. “그래서 벼락맞았지”(끝나지 않은 강연 p 17. 도서출판 삼인. 2001. 4. 21). 10·26 열이틀 전이었으니 그것은 분명 예언이었다.

 


문 대 골
생명교회 원로 목사, 전 함석헌기념사업회 이사장

<복음인in 들소리>는 하나님의 교회다움을 위해 진력하는 여러분의 후원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동반자로서 여러분과 동역하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함께 하겠습니다. 샬롬!

후원계좌 : 국민은행 010-9656-3375 (예금주 복음인)

저작권자 © 복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