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초기인 1517년에서 1525년까지 8년 정도의 시간 속에서 신·구 기독교는 자기 방향을 대강 자리 잡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루터나 쯔빙글리와 멜랑히톤의 합류 등으로 가톨릭의 몸통에서 문화현상을 일으키고, 개혁을 혁명 상황으로 몰고 간 농민반란과 토마스 뮌쩌 신부의 혁명에 루터와 영주들의 일관된 거부로 말미암아 독일을 선두로 북유럽 쪽으로 불붙던 교회의 개혁운동도 잠잠해져 갔다.

루터가 그토록 아끼던 토마스 뮌쩌가 화형장 불꽃으로 사라질 때, 농민반란도 함께 끝나고 루터는 그해 1525년 6월 13일 수녀원을 뒤로하고 나온 수녀 카타리나와 이틀 뒤 결혼했다. 그런데 농민반란 혁명의 주요 인물인 토마스 뮌쩌는 1525년 5월 14일 체포, 5월 27일 처형되었다.

토마스 뮌쩌에 대한 스페인의 종교개혁가 라스카사스 신부는 뮌쩌를 루터보다 더 큰 인물로 보기도 했다.
1525년 루터가 결혼했다는 것은 종교개혁기의 안정기에 들어갔다는 뜻이고, 또 한 사람의 영웅인 제네바의 칼빈에게 제네바 의회로부터 제네바를 지도해 달라는 공식요청도 있었다. 아직은 재세례파 문제가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으나 종교개혁의 루터와 쯔빙글리, 그리고 칼빈의 진용이 안정기를 유지하고 가톨릭도 반(反 & 半) 개혁을 시도할 환경을 맞이하게 된다. ‘예수회’ 설립자인 이그나시우스 로욜라의 맹렬한 가톨릭 지키기 운동은 성공적이었다. 가톨릭은 안정기로 방향을 잡았고, 루터와 개혁가들도 서서히 방향이 잡혀가고 있었다. 물론 1618년부터 30년 동안 신·구 기독교 전쟁이 다시 일어나서 또 한 번 양 진영은 교세 조정을 총칼과 폭력으로 하게 된다. 그리고 구교인 로마 가톨릭은 물론 신교인 프로테스탄트 또한 조직과 신앙적 방향을 설정하기 시작했다.

종교개혁 500년이 코앞으로 다가왔으나 가톨릭에 비하여 우리 신교는 세계적인 조직으로 단위 국가별로 보아도 엉성하고 빈약하기 짝이 없다. 로마 가톨릭을 욕하고 이단이라고 저주하는 사람들은 가톨릭이 세계적인, 그리고 세계를 향한 자기들의 질서가 얼마나 잡혀있나 살펴보라.

교회니까 하나님의 신비한 힘으로 통치하실거라고 자만하지 마라. 제발 오합지졸 노릇 그만하고, 행정질서가 제대로 잡힌 교회를 만들어야 한다.
1천만 명인데 어린애들 장난 식으로 운영이 가능한가. 착각하지 마라. 한국교회가 종교개혁을 기억하고, 기념예배 드리며, 만세삼창이나 하면 되는 줄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뒤늦게 출발했기에 겨우 130년이라 하지 마라. 한국교회가 어디에 조직이 있는가? 합동 측, 통합 측, 그리고 어디에 또 있는가? 그 많은 교파, 분파를 가지고 마치 어린아이들 소꼽놀이 하듯 하지 말고 종교개혁 500년 될 때까지 프로테스탄트, 즉 신교세력을 일관된 조직으로 묶어보라.

<無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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