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년 성역의 길을 마치는 서부중앙교회 김주학 목사

   
▲ 김주학 목사

1월 25일 원로목사 추대와 함께 담임목사 취임으로 바통 넘기게 돼
신학교 4학년 때 개척, 건축하고 신자 기르며 살다보니 ‘벌써 은퇴’
“파도가 치면 그 파도를 타고, 인내하면 목회도 인생도 성공하게 돼”

 

::: 무계획 속 드려진 개척이었지만

서울 은평구 응암1동 이마트 옆에 위치한 서부중앙교회는 김주학 목사가 개척, 5월이면 44주년을 맞는다. 그런 김 목사가 1월 25일 어느새 은퇴, 원로목사가 된다.

그런데 십여 일 전에 만난 김 목사는 “내가 원로목사라니,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제까지 모든 것을 은혜 가운데 인도하셨고, 후임목사님도 청빙하여 은혜롭게 바통을 이어주게 되어 감사한 마음이다”라고 고백했다.

말이 43년이지, 인생의 전체를 목회에 쏟아 부으며 살아온 대부분의 목회자들처럼 김 목사도 그렇게 살았다.

   
 

신학교(성결대) 4학년 졸업반 시절 개척을 한 김 목사는 1971년 5월 첫 주일에 폐쇄된 고시원 건물을 다듬어 십자가를 지붕 꼭대기에 달고, 목공소에서 간판을 만들어 예배를 드렸다. 조촐하게 드릴 것으로 생각했는데 신학생 동기, 부교역자로 사역했던 교회 청년들, 지나가던 이들 등 2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창립예배를 드렸다. 김 목사가 사회하면서 드린 예배의 설교는 마태복음 16장을 본문으로 한 ‘반석 위에 세운 교회’였다. 든든한 반석 위에 하나님의 교회로 서가야 함을 강조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렇게 교회 개척은 요즘처럼 절차가 복잡하고 까다롭지 않은 가운데 무계획 속에 순탄하게 진행됐다. 또 주변에 살던 타교회의 신자들이 새벽예배에 함께 동참해주어서 골격을 갖추기 시작했다. 북을 치면서 동네 한 바퀴를 돌면 아이들이 모여들게 되어 신학생들이 봉사하는 가운데 주일학교는 거저, 저절로 이루어졌다.

예배 때마다 김 목사는 열심히 설교했다. 얼마나 소리를 지르면서 열정적으로 했는지 주일에는 목이 쉴 정도였다.

“지금 생각하면 설교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아도 목소리 톤이 높았던 것은 기억합니다. 당시 함께 했었던 장로님도 ‘무슨 소리인지 잘 알아듣지 못했지만 어찌나 열심히 하는지 저절로 아멘 할 수밖에 없었다’ 고 합니다.”

그 당시 개척한 신학생으로서 교회 지하실에서 살고 있었는데, 성도들이 포기김치며 밑반찬 등을 제공해 주셨고, 그 이듬해에 졸업하고 결혼하니 조금은 안정되었다. 김 목사의 형님, 처남, 동서 등 경험있는 이들이 교회에 출석하니 교회의 조직이 튼튼해졌다.

::: 4년차에 건축, 채워주심의 은총

50여 명 정도의 성도들이 될 무렵, 개척 4년차 되던 해인 74년 건축을 시작했다. 보증금을 배나 올려달라는 요청에 차라리 터전을 마련하는 게 낫다는 판단에서 시작됐지만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입당까지는 만 10년이 걸릴 정도였다. 철골이 올라가다가 중단되어 녹이 슬 정도가 되니 주변 사람들도 ‘얼마나 어려우면 그럴까’ 하고 쳐다보기도 했다.

“83년도가 축복된 한 해였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어려운데도 신자들은 100여 명이 출석하게 됐고, 본당을 완공해 입당하게 됐으니까요. 대학원(서울신대)도 졸업했고, 두 달간 이스라엘과 유럽, 미국 등을 여행할 수 있었습니다.”

아무 경험이 없던 목회, 오로지 주님의 복음을 위해 헌신적으로 사명을 감당하는 데 몰두하니 하나님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하신대로 모든 것을 모자람 없이 공급해 주셨다고 김 목사는 고백한다. 주님을 위해 헌신하고 충성하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시는 것을 경험으로, 생활로 체득됐다.
“목회 초창기, 너무 어려울 때였지요. 아무런 먹을 것이 없을 때 김 목사는 ‘일부러 금식도 하는데, 금식하자’ 마음먹고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쌀 한 가마니를 들고 찾아오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생활에서 체험하게 되니 하나님의 존재를 더 실감하게 됐습니다.”

신학교 2년 다니다가 군대하고 복학, 개척했으니 한 번도 돈을 벌어본 경험이 없었던 김 목사는 군대 가서 첫 월급 받은 것을 십일조 하는 기쁨, 처음 전셋집 보증금 또한 교회 건축하면서 드리는 기쁨도 맛보았다. 그 기쁨은 지금까지 이어져 사례비를 받으면 제일 먼저 사용하기 전에 십일조를 드리는 습관, 그로 인한 하나님의 채워주심의 역사 아래 살게 하셨다.

::: 원로목사? 아직 실감 안나

요즘 설교에 대한 고민들이 많다고 하는데, 김 목사는 부족하지만 말씀 본문으로 복음만을 전하려는 중심에 서서 시종일관 살아오니 테크닉이나 이벤트 없이도 신자들이 말씀 가운데 든든히 서가는 것을 목도하게 됐다.

그런데 요즘은 경제적으로는 윤택해졌어도 다양하고 빠른 변화 때문인지 심리적으로는 힘든 시대라는 관점에서 볼 때 후배 목회자들이 더 힘들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짠해지곤 한다.
“그럴 때일수록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에 주목을 했으면 합니다. 인간의 모든 것이 드러나면 부족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지 않습니까. 사람이 잘하면 얼마나 잘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감춰주시고 격려하시고 이끌어주시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김 목사는 교회를 크게 성장시키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평생 욕심 부리지 않고 성실히 일궈온 만큼 하나님은 부흥을 허락하셔서 자립하여 선교하는 교회가 된 것에 감사한다. 또 빚 없이 교회에 몇 천만 원이라도 남겨 후임에게 인계할 수 있게 된 것 또한 큰 감사가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한다.

김 목사는 자신의 인생 전반을 보면 중상위 정도는 유지하게 됐던 것 같다고 말한다. 특출나게 잘하려 욕심 부리지도 않았고, 일등을 하려고 기를 쓰지 않고 평범하게 인생 전반을 다져왔다. 그것이 싹이 나고 잎이 나고 열매가 맺는 것을 김 목사는 목도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 개척했을 때 아무 경험, 신자도 없었는데 43년간 이 정도로 성장하여 복음 전파의 중추적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어 너무 감사한 마음입니다.”

은퇴 이후의 삶에 대해 묻자 김 목사는 “원로 목사라는 것이 실감나지 않아요. 마흔 살 나이가 될 때 벌써 40인가 하는 인식을 크게 한 이후에 나이 먹는 것 별로 생각 안 하고 살았는데, 벌써 은퇴라니…”라면서 “어디에 있든지 평생 사역해 온 중심을 잃지 않고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살면서 사람을 회복시키는 시간으로 이어졌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한다.

::: 더 어려운 시대에 목회하는 후배들에게

목회에서 어려울 때 어떤 한 선배 목사님이 들려준 얘기가 김 목사에게는 큰 힘이 되었다. ‘파도가 치면 파도를 파도를 탈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목회는 해보니 인내더라, 끝까지 인내하라’며 성공의 비결을 들려주었는데, 어려움이 닥칠 때마마, 좌절이 찾아올 때마나 약함을 떨쳐내고 참으며 지나오다보니 그 말이 맞는 것임을 실감하게 되었다.

“지금은 목회를 함부로 하겠다고 덤빌 수 있는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목회자는 학문적인 이론으로는 더 이상 영향을 끼칠 수 없습니다. 감동을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러기 위해서 오늘날 목회자는 더 많이 하나님께 의지하고 기도하며, 하나님 닮아가는 일에 올인해야 할 것이라고 김 목사는 강조한다.

김 목사 시대는 6.25와 4.19 등 사회 격변의 소용돌이를 겪으며, 견뎌내며 살았다면 요즘 세대는 그런 치열한 경험이 없다보니 조금만 어려움이 와도 쉽게 좌절하기 일쑤여서 미래 목회자 뿐 아니라 사회도 염려가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복음을 위해, 주님을 위해 헌신하고 충성하면 모든 것을 하나님이 다 책임져 주신다는 것을 김 목사는 경험으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며, 두려워말고 목회자의 소임에 충실해 나가라고 조언한다. 슬하의 1남 2녀 자녀들도, 좋은 후임목회자를 허락해주신 것만 봐도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을 알 수 있다며 그는 환하게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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