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조년 교수

내가 아는 한 신학교수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한 선교학 교수와 나눈 대화를 읽은 적이 있다. 그는 오늘 한국교회의 붕괴현상이 꼭 1960년대의 호주의 상황과 비슷하단다. 교회에 대한 실망과 ‘지도자’라는 사람들의 일탈에 대한 염증으로 인해 교회를 떠나는 방식으로 저항하기 때문이란다. 저항으로 교회가 달라질 것을 기다린다고 해야 할까? 그러다가 그것이 조금 더 지나면 저항 자체를 포기한단다. 완전히 관심 그 자체를 없애버린단다.

요사이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나온 영화 ‘쿼바디스’에 대한 논란이 많은 모양이다. 어느 교회에서는 교인들이 보지 못하게 광고하고 교육한다 하고, 어느 곳에서는 다 함께 보자고 했다 하고, 어느 곳에서는 그 영화에 대한 법적 대응까지 한다고 하였다고 한다.

나는 그런 것들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세습이냐, 조직이냐, 권력이냐, 교인이 늘었느냐 줄었느냐 하는 문제 따위에 나는 전혀 관심이 없다. 진정한 복음을 따르는 믿음이 나에게 있느냐, 나와 교류하는 친구들이 그러한 입장에 서려고 애를 쓰느냐, 어떻게 하면 공동으로 진정한 믿음의 자리에 서서 일상생활을 이끌 것이냐 하는 것에 관심은 참으로 많다.

내가 참여하는 모임에는 때로는 4명, 때로는 8명, 아주 많은 때는 12명 정도의 지극히 작은 믿음의 친구들이 찾는다. 숫자가 늘고 줄어듦이 나에게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다만 어떻게, 진정으로, 그러한 것을 통하여 내가 하나님과 직접 교섭하고, 내가 그를 직접 경험하며, 그가 주시는 말씀을 받고 사느냐 하는 문제에 집중한다.

원래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올 때는 순수하지 않은 경로와 과정을 가졌다. 선교하는 사람들이야 진정한 믿음으로 했겠지만, 그 들어오고 성장하는 과정에 다른 것들이 끼어들었다. 기독교(신교)가 전래될 때는 나라가 위태할 때이기 때문에, 민족주의와 손을 잡고 세력을 확장하여 왔다. 전달해 준 지역의 아주 강한 자본과 권력의 힘을 업어 성장하다가 전쟁을 경험하면서 가난과 피폐한 사회현상은 구호물자와 자본의 힘을 얻어 크기 시작하였다.

가난한 사회상과 억압하는 정치상황은 위로와 저항의 장이 필요하게 되었다. 교회는 그 역할을 잘 하였다. 그러다가 산업화가 잘 진행되고, 생활수준이 높아지면서, 온갖 문명의 이기들이 삶의 외형을 풍부하게 만들어 주면서 교회가 줄 것은 없어졌다. 교회 자체도 자본주의식 경영논리를 따르지 않으면 존폐의 기로에 설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다가 온갖 흥행물이 늘어나고, 많은 정보들이 홍수처럼 밀려들고, 생활습관이 떠돌이식이 되면서 교회는 그 길을 찾지 못하게 되었다. 거기에다 민주시대에 아주 비민주스럽게 교회를 운영하는 지도자들에게 실증을 느낀 이들은 다른 길로 가고 있는 형국이다.

이 모든 것들은 다 성숙하지 못한 믿음, 스스로 서지 못하고 남을 의존하는 믿음, 복음의 진면목이 무엇인지 모르는 무식함, 잘못 시작되어 틀로 박혀버린 제도를 벗어나려는 깨달음이 없는 몽매다. 하나님-성직자-일반신자라는 이상한 위계체계에서 허덕이는 믿음의 조직체계 따위가 오늘 한국교회를 보여주는 진짜 얼굴이다. 그것은 믿음도, 복음을 따르는 것도 아니다.

이제 할 일은 하나밖에 없다. 큰 교회조직을 버리고, 대형교회의 운영체계를 해체하고, 그 대신 나와 하나님 사이에 아무 것도 끼지 않는 직접소통의 길을 찾아 나서는 일이다. 우리 속에서 살아서 활동하시는 그분의 말씀을 직접 듣고 그것에 따라 살기를 힘쓰는 일이다. 위기는 교인 숫자가 줄고, 경영이 되지 않는 것에 있지 않고, 바로 그 님 앞에 직접 서지 못하는 내 엉거주춤하는 믿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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