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가 무너지는데도…

한국교회에 심각한 함정이 있다. 일부 많이 모인다 하여 대교회 자부심을 가진 몇 교회가 시대의 세속적 흐름을 책임질 수 있다고 자기 과신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시대의 흐름에 대한 정직한 고백이 먼저임을 모르고 있다. 시대 흐름이란 인위적 권위, 관념의 유희, 심지어 신의 권위까지도 용납지 않으려는 저항을 보이고 있다.

바로 이때쯤이면 교회는 신자들 앞에서 정직해야 한다. 신자를 향한 목사의 자세도 바뀌어야 한다. 신자와 신자 중심의 공동체를 형성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신자들이 ‘예수 실력’을 자부심으로 가질 수 있도록 수준을 높여야 한다. 신자들의 역량을 높여주어야 한다. 목회자들이 갖는 목양의 조건들도 목사들이 독식하지 말고 신자들과 함께 나눠야 한다. 모든 신자들이 ‘만인제사’의 대원칙을 수용하여 역동하는 신자의 힘을 강화시켜야 한다.

만인제사는 초대교회 예루살렘에서 자리잡을 수 있었는데, 그 좋은 시대를 교회 스스로가 포기했었다. 더 정확하게는 교회가 너무 어린 시대에 머리 좋은 승냥이 떼에게 먹히고 말았다.
오늘의 교회 또한 자유주의와 세속의 힘을 이겨내기에 역부족인 점도 있다. 사탄은 한 번 기세가 꺾인 교회를 향해 무자비한 공격을 가해서 항복을 받아내려 하고 있다. 이때 교회는 자신과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를 생각해야 한다. 교회 스스로가 거룩이요 진리의 터가 된 것으로 착각하지 말고 예수 앞으로 나아가서 그 발 앞에 엎드리는 순결과 진리의 자세를 찾아 바르게 세워야 한다.

한국교회의 담임목사들이나 각 교단장들은 교회의 터가 무너지고 있음의 참담한 현실을 어찌할 것인가를 깊이 고민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교회 스스로가 우상이 되고 금송아지 귀신이 되어 있다. 주 예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그 대상이 교회가 되어 있다. 그 이유는 교회가 교세 또는 교회의 힘을 믿고, 교회의 숫자가 세력이 되고, 자본주의 방식으로 말하면 교회만으로 시장이 형성되고 또 교회가 여론을 생산하는 능동적인 힘(폭력)을 가지고 있으니 교회 스스로가 무너짐의 조건이 되어버렸다.

세계기독교 역사 2천여 년 속에서 한국교회만큼 불행하고 위험스러운 시대와 마주친 나라들이 없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지금 철학적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오, 이를 어찌하는가?
 



CCK, 혼자서 부활절

아쉽다. 부활절만큼은 동서남북 기독교 모두의 절기여야 하며, 거기에는 교리적 갈등이나 혈통의 충돌도 없는 절기이거늘 어찌하여 연합하지 못하는가.
아직도 늦지 않았다. 가능한 한 더 많은 교단들과 교계 기관들이 참여하는 ‘2015 부활절’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인내로써 인내를 더하자. 그리고 아무런 이유나 조건 없이 하라. 아직 새벽날씨는 추울 터이니 옷을 든든히 입고 성경 찬송만 들고 오라. 스마트폰을 가진 사람들은 몸만 오면 된다.

주 예수, 무덤을 이기고 부활하셨다.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비용도 필요 없다. 다만, 얼마간의 수화물 운송비 정도면 될 것이다.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다. 예수 부활을 믿는 이들이 모이는 것이다. 모여서 서로를 향하여 축복하고 예수의 부활이 있으니 나와 당신도 부활의 생명을 받은 것이다. 다시 죽을 수 없는 생명이다. 영원을 현재 속에서 살아간다는 신비를 우리들은 알고 있는 사람들이니 누가 우리들이 받은 축복을 방해하랴.

아, 여러분! 나와는 지금 시공간의 거리로 복된 나의 모습과 마주치지 못하는 곳에 있는 주의 형제와 자매들이여, 영원을 현재 속에서 산다 또는 영생하는 인생의 출발점에서 산다, 더 쉽게 말한다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내생을 앞당겨서 현세로 살아간다는 신비스러운 인생이 부활 예수와 만난다.
우리는 이렇게도 오늘의 은혜를 말할 수 있는 부활의 백성들, 하늘의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 많은 날들 중 하루, 그 중에서도 한 시간을 내서 함께 모이는 일에 인색할 수는 없다.

결코 그럴 수는 없다. 예수의 부활에 참여한 우리에게는 너그러움이 있다. 설사 이해관계가 있어도 양보하는 법을 아는 우리들인데 한 시간 함께 정성을 모으는 일 외에는 손해될 것이 없는 그날, 약속된 한 시간을 가능한 한 더 많은 교단, 더 많은 교회, 더 많은 성도들이 서울광장같은 곳에서 모여 합심하여 기도하는 모습을 만들어보았으면 한다. 그러니 NCCK는 리더십을 발휘해보라. 너그러운 마음으로 더 여럿이 모일 수 있는 부활절을 위해 중간자역할을 더 해 달라.
 



지도자의 언어 선택력

정치나 종교를 포함하여 지도자는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태어나기도 하는 것 같다. 우리 민족의 역사 속에서도 빛나는 지도력을 발휘한 이들이 있었고, 세계사 속에서도 물론 탁월한 지도자는 많이 일어났었다.
오늘의 한국은 남북문제가 중심과제로 자리하고 있어서 뜻있는 이들의 관심과 염려가 크다. 그래서 지도자들이 등장하기를 조심스럽게 기다리는데 쉽지가 않다. 현재시간, 정치 일정으로 볼 때 차기 지도자는 물론 지도그룹이 기다려진다.

지난번 여당 대표가 국회연설하면서 느닷없이 ‘증세 없는 복지는 국민에 대한 속임수’라고 말했다. 이 표현을 보면서 여당 대표의 언어 표현력의 한계를 느꼈다. 국민에 대한 속임수라니, 분명히 정권 책임자인 대통령을 향해 ‘속임수’라는 것으로 대다수가 이해할 터인데 어찌 그토록 사려 깊지 못한 표현법을 내놓았을까? 당사자는 경제 부총리를 향한 발언이었다고 할 수도 있으나 증세 없는 복지는 현 대통령의 공약이었고 지금도 그분의 소신이지 않은가.

엊그제 제일야당이 당 대표를 선출했다. 새로 등장한 야당 대표는 박 정부와 전면전을 선포하겠다고 큰소리쳤다. 그 어느 나라에서 제일야당이 정부와 전면전을 치르는 경우가 있는가? 왜 이렇듯 언어를 고르고 선택할 줄 모르는가.

물론 그들이 뜻밖의 자리에 오르고 보니 갑자기 흥분이 지나쳐서 말이 서툴게 나왔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도자는 그 하나, 바로 그 하나로 승부가 결정되는 수가 있다. 그들의 발언대가 여야당 대표의 자격으로 말하는 것이니 망정이지 만약 대통령의 정책결정 또는 국익을 놓고 외국 정상과의 회담에서 어설픈 표현의 경우라면 이는 바로 국익과 직결되기도 하고 국민 전체의 인격과 관계되기도 한다.

말조심해야 한다. 어떤 경우도 우쭐한 감정은 금물이다. 자칫 콩가루 또는 물과 기름으로도 표현되는 바닥난 제일야당을 이끌어가야 할 야당 대표는 더욱 그렇다. 현충원 찾아가는 길에 함께 선출된 최고위원들을 대동하지 못할 만큼 열악한 자기 환경에서 덕스러움과 겸허함마저 모자라서 허덕이게 되면 국민 불안과 정치 불안이 동시에 나타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부디 건강하고 총명한 정치인, 또 실력자가 되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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