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길, 그 출발점은 여기다. 하나님의 품에서 나와 임마누엘 된 인생은 여기서 너를 기다린다. 여기 내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 고통 무한의 시간을 견디면서도 너와의 동행을 위하여 내가 여기서 기다린다. 바로 여기가 그래서 ‘양의 문’이다. 이 문을 통해서 믿는 자의 길이 열리고, 이 길 곧 십자가를 외면하는 자들이 갈 곳은 어디겠는가? 배신의 길. 위선의 길, 또 거짓의 길이니 그들 십자가를 외면하는 자를 어찌할꼬.

사람들은 종종 스스로 속는다. 내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를 안다. 그분은 세상 죄를 지고 죽으신 분임도 안다. 십자가에서 예수가 죽으신 것을 알지, 알고 있겠지. 그러나 그분의 죽음이 너와 나에게 무엇인지를 아느냐고 물으면 답변이 궁하다.

특히 목회자들, 가끔씩 뻔뻔한 말재주로 자기 행위를 치장하는데 그 같은 행동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목회자들이 때가 되면 주로 쓰는 문자가 있다. 바울의 완주 찬가! 완주라 함은, 자기가 가야 할 주행거리를 착오 없이 완료했다는 말인데, 그런 말 쉽게 했다가는 날벼락 맞는 수가 있다.

생각해보라. 바울은 말이지, 예루살렘 구제헌금 가지고 갔다가 잡혀서 총독부 감옥에서 시달렸다. 총독 벨릭스와 후임 베스도로부터 2년 동안 시달리다가 가이사에게 상소하여 로마로 갔다. 그곳에서 또 2년 동안 감옥살이 끝에 방면되어 나머지 기간의 선교에 열정을 바쳤고, 네로의 마지막 박해 시에 드로아에 있던 바울은 로마와 주변도시에서 어린 신자들이 희생되는 것을 보다 못하여 자청하여 로마로 갔다. 어떤 사람은 바울이 체포되었다고 하는데 체포가 아니라 자원(자청, 자수)하여 로마로 가서 순교했다.

바로 바울과 같은 목자(선교자, 전도자)의 일생을 사는 사람들이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딤후4:7~) 기다린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이지 아무나 입이 있다고, 아무나 목사라고 함부로 입을 여는 것이 아니다.

양심이 화인 맞아 마비된 자들, 목사라는 이름으로 온갖 호강을 다 누리고 잘난 놈들 축에 끼어서 살았다고 해서 천국의 상급도 네 마음대로 가져갈 수 있는 법 없다. 다시 십자가로 가자. 바울의 자기 찬가, 를 용납하는 것은 그가 예수의 죽음 같은 고난을 자기 몸에 짊어지고 살았던 사람이기에, 또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하는 자세로 예수를 증거했기에 바울에게는 해당되는 말씀이다.

요즘 한국의 목회자 중 ‘나요 나!’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군가? 한국교회의 값이 얼마쯤 되는 줄 아는가? 목사의 가격은…? 어느 누구도 감히 나는 큰 과오 없이 살았노라, 는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죽을 죄 지었나이다. 용서하소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의 피투성이 모습을 바라보면서 딴 말을 하거나 자기변명 하는 자마다 큰 죄인 아닌 자가 없을 것이다.

비껴가지 마라! 함께 가자. 너도 나처럼 피 묻은 옷을 입어라. 내 죽음에 먼저 동참하라. 내가 그때 너와 동행할 결심하고 너의 손목을 잡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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