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간절한 기도가 동행하는 절기이다. 아름다운 인생을 만들기 위하여 주 예수 가신 길 따라나선 우리들이기에 이렇듯 간절한 삶의 모범을 찾고 또 찾는다.

세상 한복판으로 보냄 받은 우리들이기에 어린양 예수의 별도 부담이 되지 않기를 원한다. 고난의 밭에 뛰어들어 두려움에 찬 눈물 흘리지 않기를 원한다.
주 예수의 고난은 우리의 선택이 아니라 하늘에서 온 자들이면 마땅히 겪으며 이겨내야 하는 과정,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명을 아름답게 가꾸기 위하여 온전한 인내를 원한다.

부활의 아침을 맞이할 때까지 불편한 현실들을 불편하다 하지 않으려는 인내로 이 길을 간다. 어떤 이들은 부활에 대해서 해석하고, 신학을 자기 마음에 들도록 만들어 보려하지만 하늘 생명은 자기 비위에 맞도록 만드는 것 아니다.

부활에 대하여 바울 선생은 그 고집불통의 율법학사 자격으로, 그것도 바리새파의 충성스러운 몰이꾼 같은 자세로 다마스커스 크리스천 소탕전을 위하여 진군하다 예수를 만났다. 부활하신 예수의 나타나심 앞에서 큰 변명 없이 굴복했었다.
아마, 그 경험이 바울에게는 생애 처음이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는 그 경험으로 단정적 부활론을 말해서 부활 신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신자들을 많이 만들어냈다.

오늘날도 부활과 영생의 관계를 정리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다. 부활이 현세냐, 내세냐. 부활과 영생은 단순관계냐, 아니면 해석의 절차가 필요하냐의 시비에 말려들게 되는 신자들이 많은 것을 보면 역시 바울의 부활도 신학의 흐름을 타고 있는 것 같다.

부활은 생명이다. 그 생명은 하늘 보좌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주 예수 오시듯이, 죄와 상관없이 다시 태어나는 은총의 사람은 다시 태어남의 절차에 따라 하늘로서 태어난다. 그 과정 속에서 어느 날 십자가의 절차, 곧 죽음의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그때 그 순간부터 사람이 변하여 생명이 된다. 이 생명을 다시 태어나는 절차를 밟았다 하여 부활의 생명이라 한다. 무릇 온 땅의 성도들은 십자가 절차를 통해서 부활의 아침을 맞는다. 그 모든 생명들은 다시 죽을 수 없는 영생하는 자의 대열에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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