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첫 주가 2015년 부활절이다. 해마다 오는 부활절은 예수의 부활 기념절이기도 하고, 그 무덤의 날 동산에서 믿음의 여인이 부활을 맛본 인류역사 두 번째이기도 하고, 그 여인으로 하면 인간에게 허락하시는 첫 번째 부활을 기념하는 날이 된다.

그러나 예수를 향하여 부활의 첫 열매라 하셨으니 마리아는 두 번째로 순번이 밀려난다. 인류의 생명은 두 번째부터 시작되는가 싶기도 하다. 두 번째, 세 번째가 문제가 아니고 오늘 우리 기독교는 ‘부활신앙’을 미래사로 취급함으로써 자칫 미신성을 지닌 부활론이 될 수도 있다. 세상 떠난 후에, 장례식장에서 부활의 옷을 갈아입는 신자의 과정은 부활신앙의 시제를 놓쳐버린 과오로 말미암아 대단할 것이 없지 않겠느냐는 것이 되기도 한다.

신앙이란, 부활이 있는 신앙이란 이 세상 사는 날들 속에서 성도가 지니는 권능의 삶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세상살이를 끝낸 다음에 무엇을 더 필요로 하겠는가.
이스라엘 민족을 생각해보자. 홍해를 건너 시나이 40년은 고난의 연속이었으나 그들은 요단강을 건넜다. 요즘 기독교 신자들은 요단강을 건너면 영의 나라, 신령의 나라로 가버리는 절차로 여기지만 이스라엘은 요단강을 건너서 천국으로 가지 않고 가나안 일곱 족속이 사는 땅으로 가서 정복자로서의 인생을 살아가지 않던가.

똑같은 요단강이면서 이스라엘 백성의 요단강과 요즘 기독교인들의 요단강은 전혀 그 모습이 다르다. 이스라엘 민족의 요단강은 이 세상 한복판에 있고, 기독교의 요단강은 이 세상과 저 세상, 금생과 내생의 갈림길에 버티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생명의 부활이 현재완료형에서 미래형으로 밀려나버리면서 예수시대의 세계관에서 많이 변개되어 버렸다. 예수의 부활과 오늘의 부활이 시제가 달라져 있으니 그 해석이나 삶의 경험 자체가 다르게 되어 있는 것이다.

기독교는 언제, 어디쯤에서 종말론 이해가 변질되어 버렸으며, 부활과 천국이 ‘너희 안에 있다’ 하신 말씀을 배반했는지에 대해 다시 공부해볼 필요가 있다. 부활신앙의 오늘을 살아가자.

<복음인in 들소리>는 하나님의 교회다움을 위해 진력하는 여러분의 후원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동반자로서 여러분과 동역하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함께 하겠습니다. 샬롬!

후원계좌 : 국민은행 010-9656-3375 (예금주 복음인)

저작권자 © 복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