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죽는 것은 만유의 이치라, 열심히 죽음 같은 껍데기를 벗자. 동남아 산 구렁이 중 허물을 벗지 못하여 다 죽어갈 때 동물 애호가는 정성스럽게 껍질을 벗겨 준다. 제때에 벗지 못하면 구렁이가 죽는다고 하더라.
삶과 죽음 사이, 죽음은 삶을 먹고 죽는다. 에덴의 사람이 불순종의 과일을 먹었다. 그리고 추방되었고, 하나님은 그것을 죽음이라 했다. 허물 벗지 못하면 죽는 뱀처럼 그는 불순종의 죄와 결별해야 한다. 죽음까지 각오하는 결단이 있어야만 삶과 죽음 사이에 생명의 문을 낼 수 있다. 죽음은 무엇인가? 창세기적인 죽음은 단절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단절 말이다. 단절의 비극은 이 세상에 노예제도를 탄생시켰다. 불순종이 부도덕의 결과라면 이 단절은 노예의 삶이 죄가 된다.
인류 역사는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 문명의 건축물에서 노예의 역사를 볼 수 있다. 고대와 중세를 거쳐서, 근세 현세까지도 인간은 노예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이는 인간 본성 속에 노예근성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지상에 등장했으나 그는 죄의 사슬에 묶였다.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의 아들이 ‘신성모독죄’에 걸려서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 이를 요한복음 기록자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했다. 대속, 곧 대신 죽어주는 희생양이다. 바울은 논리적 비약을 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라…’ 한다.
바울의 비약은 가히 천재적이다. 그는 예수 십자가에 달릴 때 (그와 함께) 자기도 달렸다는 표현으로 대속의 은혜를 고백했다.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아침까지 기독교 신자는 바로 이 지점에서 자기 고백을 이루어내야 한다. 반드시 해내야 한다. 아니면 노예다. 노예 같은 인생이 무엇인지 아는가? 현대판 노예는 혼과 영 그리고 육신마저도 빼앗기게 된다.
스스로가 노예 됨을 즐기는 사람들도 많다. 노예는 죄의 화신이요 생명 있는 사람의 영혼까지 뜯어먹는다. 노예 된 인생과의 결별은 그래서 예수의 죽음에 동참하는 길에서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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