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의 화려한 꿈은 다윗이고 다윗의 꿈은 통일 왕국을 실현했다. 솔로몬 시대의 방종은 다윗의 영광을 스스로 짓밟고 바벨론 포로기로 전락했다.
참으로 처절했다. 아브라함의 모리아 제단에서부터 홍해, 시나이 훈련을 지나 요단을 건너 가나안 족의 터전을 새롭게 단장하여 다윗의 통일 왕국, 그 왕국을 상속자에게 물려줄 때만 해도 하늘 아래서 부러울 것 없었다. 그러나 바벨론 노예생활 70년의 시련은 피눈물도 많이 흘렀고, 페르시아 지배로 넘어가면서 유대인들은 성전 복고와 회당시대 세력으로 양분되었다. 성전 복고파는 유대교 보존이라는 뜻으로 역사의 시간을 벌었고, 회당파는 유대교를 뛰어넘는 새 종교 자원을 찾고 있었다. 드디어 고난 받는 종의 이름으로 대속사가 열린다. 또 다른 의미로는 임마누엘의 현재를 새 역사로 받아들이는 고난의 종이 나타났다.
오늘의 기독교 또한 고난의 종으로 나타나신 예수를 본다. 서로의 눈은 아직 마주치기가 낯설지만 서로가 서로를 피할 수는 없다. 기독교는 여기까지를 축복으로 받았다. 그 다음은 이사야 53장의 ‘고난가’를 부르면서 스스로가 구도자적인 자질을 보여야 한다. 모든 것을 거저먹으려 해서는 안 된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고 했다. 믿음으로 사는 자가 의인이다. 의인의 자리에는 아무나 오를 수 없다. 의인과 믿음, 믿음이 있으면 의인의 길이 쉽게 열린다 하겠으나 그게 그렇게 쉽지 않다. 의인의 믿음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있다. 바울은 거기 그곳, 십자가의 한복판에 자기가 있다 하였고, 그에 대한 대가는 평생 동안 예수 고난의 상처를 자기 몸에 지니고 살아야 했다. 모두가 바울 같지는 않겠으나 그의 고난은 내가 동반의 아픔을 느낄 때부터 시작된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사 53:5)이라고 확신하는 자는 이웃과 더불어 아픔을 나누고 기쁨도 나눌 줄 안다.
오늘의 교회 사람들은 예수 십자가의 대속을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사야처럼 대속의 고난 깊이로 파고드는 구도자적인 자세에는 인색하다. 그러나 교회여, 고난과 대속, 서로의 아픔을 상호체감하면서부터 교회가 교회답고 신자는 신자 되는 길이 열림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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