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달라 마리아의 부활
안식 후 첫날 새벽 미명에 예수의 무덤을 찾아갔던 여인들 중 막달라 마리아가 빈 무덤 앞에서 떠나지 못하고 울고 있었다. 그는 예수의 시신에 기름을 바르기 위해서 동산에 왔으나 예수의 빈 무덤을 보게 되자 경악하였다. 주가 평소에 하신 죽은 지 3일에 부활한다는 말씀을 떠올렸다. 잠깐 스쳐간 착각이었을까. 평소에 영특하고 늘 주 예수 말씀을 지켜왔던 마리아로서는 잠시 부끄러움에 잠기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는 이내 마음을 가다듬었다. 어디 계실까? 그는 동산을 두리번거렸다. 조금은 멀다고 느껴지는 곳에 한 사내가 어른거린다. 동산지기이다. 물어봐야지. 내 주님 계신 곳 아느냐고 물어봐야지.


동산지기로 여기는 사내가 마리아가 가까이로 오고 있다. 내 주시여, 당신이 내 주 예수 계신 곳을 알죠? 그럼 내게 그 길을 가르쳐주오. 막달라 마리아의 말씨가 어찌나 애처롭게 들리는지, 가까이 다가 온 사내가 입을 열었다.
‘마리아야!’
은은하지만 힘이 있었다. ‘이건 주님 목소리인데….’ 순간 마리아의 눈이 밝아져서 부활하신 예수와 마주친다.


‘오 주여!’ 그 몸을 예수께 던지려는 순간 주님이 그녀의 다음 행동을 말리신다.


‘마리아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의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요 20:17). 이렇게 말씀하심으로 마리아의 부활신앙을 인정하셨다 할 수 있다. 내 아버지 곧 너의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의 하나님이 무엇을 말하는가? 예수와 믿는 자, 곧 부활에 참여하신 예수의 부활신앙에 참여한 자에게 부여하는 동격관계의 은총이다.
기독교 사람들은 드디어 부활의 처음 익은 열매이신 예수를 따라 두 번째 부활 참여자의 자격으로 예수 영생의 참여자가 된다. 순번으로나 또 그 수고의 결과로 볼 때 무덤 동산에서 예수와 마주친 마리아는 바로 이 신앙으로 부활의 두 번째 당사자의 축복을 누리고 있다.


오늘의 기독교 신자 또한 부활의 참여자, 처음 익은 부활열매이신 예수를 따라 부활신앙을 지켜내며 주 예수와 함께 내 아버지 곧 너의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의 하나님 되시는 은총의 자녀들이어야 한다. 추상이요 관념을 떠나 주님과 함께 나누는 부활의 아침이여!

 

통일 한국 신앙의 에너지 되는 부활신앙
엊그제 KBS 1TV ‘징비록’을 시청하는데 일본 본토의 침략군이 몰려와서 부산진과 동래진을 공격해 그들의 손에 넣는 동안 한양에서는 그들의 정체가 왜구인지 일본 본토의 정예군 인지도 파악하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1592년이니까 4백여 년 전 대한조선 현장에서 일어난 일로써 한양과 부산 거리가 지척인데, 파발만 2~3회 오고가면 모든 사정을 다 알 수 있었을 터인데 참으로 안타까웠다.


생각을 오늘의 대한민국으로 옮겨 보자. 지금 한반도는 미·중·러·일 등 4강국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고, 분단 70년인데도 남북 또는 북남 간의 통일을 논의할 아무런 힘을 갖지 못한 상태이다.


2015년 부활절 아침이다. 다시 죽을 수 없는 부활생명, 죽어서 다시 태어난 한국교회 신자들은 통일 대한의 시대를 앞당기기 위한 운동체제를 갖추자.
남과 북의 인권, 특히 북한의 살인적인 인권폐쇄 상황을 열어젖힐 수 있고, 북한 당국자들도 기쁘게 통일을 논의할 수 있는 힘을 기독교가 공급해 보자.


남북 이산가족은 최후의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가족 간의 만남이 이루어지게 하고, 남북한 간의 여행도 가능하며, 휴전선 DMZ 공간을 평화지대로 만들고 부산에서 유럽까지 대륙 간 실크로드를 여는 일도 한국교회가 일어나서 해보자.


한일 합방 이후 또 3·1 운동 이후, 세계 속에서 독립운동 하던 그때의 순수한 힘을 다시금 일깨우면서 기독교가 생명과 평화운동에 앞장설 수 있어야 한다.


여야 간의 정부도 연립정부를 한시적으로 구성해 정치인들의 소모적인 에너지를 통일운동으로 확대 재투자할 수 있는가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통일 독일이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을 허문 후 통일기금 때문에 많은 고통을 겪었다고 한다. 한반도의 통일기금은 독일보다 몇 배 더 필요할 수 있다. 지금 이 시간부터 한국교회가 통일기금 구좌를 만들어서 곧 다가올 수 있는 통일 대한민국을 위한 기금 조성을 위해 근검절약하며 이를 국민운동으로 발전시켜 가는 진원지가 되어 줄 수 있어야 한다.


한국교회는 능히 해낼 수 있다. 더구나 죽음을 이기신 예수의 부활신앙으로 단장한 우리의 힘은 통일 대한을 민족 구성원 앞에 선물하는 우선 모범이 될 수 있다. 되게 하자.

 

현재 완료형 부활신앙 가꾸기
많은 교회들이 요한복음 11장의 마르다처럼 ‘미래 부활’에 매달려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현재완료형 신앙을 말씀하셨다. ‘나는 부활이고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으리니…’라고 하셨다.


부활 신앙이 육신을 기준하여 해석될 때 자칫 미궁 또는 미신으로 빠질 수 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다. 영이 곧 생명의 중심이다. 바울 선생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 했을 때 그 자신의 생명 중심이 육신에 있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중에는 ‘하루 한 생’으로 사는 이들이 있다. 사설자도 하루를 한 생명으로 삼는다. 밤에 잠자리에 들 때면 그곳을 무덤이라 여기고 아침은 다시 태어남으로 새날이다. 아침마다 감격이요 밤마다 은혜에 감사한다.

이 생활의 반목은 어느덧 현생과 오는 생 간의 간격이 없어지는 듯 느껴지고, 살고 죽는 문제가 나와 상관이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미 영생의 삶을 출발한 지가 반백년이 훨씬 지났고, 죽음 따위가 나를 유혹하거나 겁줄 수 없음 또한 내가 누리는 복이기도 하다.


부활신앙은 바로 이 같은 삶의 흐름을 따르는 것이다. ‘죽어도 다시 살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 다시는 죽음을 보지 않는다’ 하시면 그 말씀의 명령자가 하나님이신 이인데 무엇을 더 망설이는가.


아직 이 신앙에 익숙하지 않을 경우 니고데모처럼 다시 어미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와야 하는지를 걱정하는 자들도 있다. (니고데모는 주 예수 말씀에 반발하느라고 해본 소리였지만) 신자들 중에는 마지막 중환자실에서 숨이 끊어지고서야 요단강을 건너 부활의 순번을 기다리는 것으로 아는 경우가 너무 많아서 주 예수가 믿는 자들을 상대로 생명의 권능을 행사하지 못하실 때도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여호수아를 만나니 그를 따라서 요단강을 건넜고, 요단강을 건넌 자들마다 가나안 지역에서 땅을 배분받고 여리고 7족속을 호령하면서 살았는데 오늘 예수의 부활신앙이 ‘여호수아의 요단강 신앙’ 수준에도 이르지 못해서야 되는가. 주여, 내가 오늘을 부활신앙, 영원한 자의 신앙으로 살면서 죄와 신앙을 이겨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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