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38주년 특집대담

   
 

● 일 시 : 2015년 4월 7일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 대 담 : 류 장 현 교수 _ 한신대학교 조직신학
           조 효 근 목사 _ 들소리신문 발행인

 

 

Q. 교파를 초월해 8명 신학자들의 종교개혁에 대한 논문을 엮은 <제2종교개혁이 필요한 한국교회>(기독교문사)에서 한국교회의 위기 원인으로 16세기 종교개혁을 비판 없이 수용하고 그것을 교리화, 신념화 시킨 것의 문제점을 지적하셨습니다. 한국교회 제2의 종교개혁은 16세기 종교개혁의 선봉자였던 루터와 칼빈을 제대로 보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하시던데, 참 신선하고 반가웠습니다.

A. 한국교회는 16세기 종교개혁을 개신교의 출발이자 뿌리라고 여겨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거든요. 하지만 그 당시의 종교개혁은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Q. 네, 동의합니다. 농민반란이 완전 제압되던 1525년 1월에 쯔빙글리 제자들 7명이 반란을 일으키잖아요. 제 교회관이나 신학관은 1525년도가 제2종교개혁의 출발 시점이고 지금은 제3개혁의 시대라고 봅니다. 그런데 역사는 그들 아나뱁티즘의 출발을 광신도들의 광란으로 취급해버렸거든요.

A. 저 역시 기독교사에서 이단으로 분류된 소장파들 가운데 사실상 주류가 있다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거꾸로 읽는 세계교회사를 다시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 역사는 주류신학으로 이어져왔거든요. 말씀하신 재세례파나 토마스 뮌처는 열광주의자라고 비판받았지만 사실은 그들에게서 교회의 본질을 엿볼 수 있습니다.

1525년을 제2 종교개혁 출발점으로 잡아야 한다는 좋은 말씀을 하셨는데요. 루터를 비판하려면 루터 이전에 예수로 올라가 하나님 나라 운동과 그것이 태동한 초대교회를 봐야 합니다. 저는 거기가 본질이라고 보거든요. 초대교회 공동체는 두 가지 성격을 드러냅니다. 하나는 기존 세계를 변혁시켜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만드는 종말신앙이었고, 또 하나는 오순절 성령 강림사건으로 성령의 능력 있는 교회, 이게 초대교회의 핵심적인 본질이었다고 봅니다. 루터는 이 본질로 돌아가지 못했어요. 예수가 했던 초대교회의 종말성을 회복하기는커녕 복음을 이신득의라는 칭의론으로 굉장히 축소시켜 놓았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개인의 영혼 구원으로 국한시켰어요. 그런 루터의 칭의론을 교회 구원론의 정석으로 못박아놓고 그 이후에 개신교 전통은 다 그 주장으로 일관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사회적 관심도, 생태학적 관심도 없고 개개인의 영혼 구원에만 관심 갖는 개인주의가 되었습니다.

16세기 종교개혁은 말 그대로 종교 개혁입니다. 지극히 협소한 의미였어요. 시작부터 한계를 안고 있었지요. 조금 전에 말씀하신 토마스 뮌처나 재세례파는 그 한계를 극복하려 했습니다. 16세기 종교개혁이 종교개혁으로 끝나면 안 된다, 사회개혁까지 동반돼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그런데 루터는 그것을 수용하지 못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루터의 종교개혁 지지기반 자체가 교황의 절대 권력에 반대하는, 로마의 지배권에서 벗어나려는 영주들 편에 바짝 서있었고, 봉건사회가 넘어지고 초기 자본주의가 태동되는 시기에 역시 교황권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신흥 지배계급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거든요. 그들 역시 교황과 싸우는 데 있어 루터의 지식적, 신학적 이론이 필요했습니다. 이들의 요구와 농민들이나 재세례파의 요구가 맞지 않았어요. 그런 역학관계 속에서 농민과 재세례파들이 들고 일어났고, 그들은 좀 더 본질적인 사회 변화를 촉구했어요. 루터도 고민했겠지요. 결국 자기들의 지지기반인 영주와 신흥 부르주아 세력의 손을 잡으려니 반대쪽을 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Q. 루터가 16세기 흐름의 추가 어디에 있는지 그것을 전체적으로 소화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1525년 7월 무렵 농민반란군이 완전 제압됐을 때 희생자가 10만여 명이었습니다. 그때로서는 엄청난 숫자예요. 한 가정을 5명으로 계산해도 50만 명입니다. 그들은 루터를 지지했던 신교도들인데 루터가 버리면 다시 가톨릭으로 돌아가서 노예밖에 더 되겠어요.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삶이지요. 그해 5월에 루터가 수녀였던 카트리나와 결혼하고 연회를 열더라고요. 그걸 보면서 이 사람이 정신이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5월이면 무수한 농민군이 죽어가고 있는 상황이었을 텐데 말입니다. 루터는 21년간 결혼생활을 하면서 6명의 자녀를 낳았습니다. 저는 종교개혁자 루터는 1525년에 죽었고 자연인 루터는 1546년에 죽었다고 봅니다. 루터의 강력한 무기였던 만인제사와 이신칭의에 대해서도 실질적으로 신학적 정리를 하지 못하고 끝나버리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한계 투성이 16세기 종교개혁을 교리화·신념화 시킨 한국교회의 잘못 만인제사·칭의론,
오히려 교권주의·성직주의 부추기고 복음 축소시켜

 

A. 네, 이신칭의와 만인제사는 루터의 종교개혁에서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좋은 신학적이고 영적인 자료인데 그걸 성공시키지 못했어요. 만인제사설이 실현되지 못한 이유 중 하나가 루터가 전제조건을 붙여 놓더라고요. 말씀 선포와 성례전 집전 등 7가지를 평신도도 하되 성직자가 없는 경우나 성직자가 교회에서 불신임 받는 경우만 가능하도록 해 놓았어요. 주장은 좋은데 제한조건에 부합된 경우가 아니면 성직자들이 해야 하는 거죠. 그게 제도로 굳어지면서 결국 성직주의와 교권주의가 강화되기 시작했어요.

Q. 다른 이야기지만, 뮌처는 역사 속에 묻히고 평가도 되지 않은 상황입니다. 다음 이야기로 재세례파 부분을 보고 싶어요. 당시 신부였던 멘노 시몬스가 필립 옵베 집사로부터 재세례 받고 다시 감독안수까지 받으면서 개혁운동에 뛰어드는데 멘노 시몬스의 재세례 운동은 완전 비폭력 운동이었잖아요. 이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거든요. 루터나 칼빈의 폭력과 멘노 시몬스 재세례파의 비폭력과의 거리를 보고 싶은 거예요. 그들이 스승인 쯔빙글리에게 도전할 때 한 말이 정부에게 굴종·맹종할 바에는 가톨릭에서 왜 나왔냐는 거였어요. 당신의 우유부단함을 받아들일 수 없다 해서 활동을 별도로 했잖아요. 재세례파가 곧바로 뮌처의 농민군들과 연결되거든요. 농민군들도 만인제사를 통해 우리가 드디어 짐승 같은 상황에서 인간다운 삶으로 바뀐다고 여겼는데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어요. 농민군들이 루터에게 요구한 것을 보면 평범한 건데도 그걸 짓밟아버렸습니다.

A. 그렇지요. 요즘 말로 하면 기본생존권 요구인데도 무시당했어요. 오늘의 퀘이커나 아미쉬 공동체의 뿌리가 농민운동과 재세례파 운동이거든요. 퀘이커의 경우 ‘내적인 빛’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저는 만인제사장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재세례파나 토마스 뮌처가 주장한 ‘하나님과의 직접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것이 참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과 나의 1:1 사이에는 그 어떤 것도 개입되어서는 안된다는 거예요. 목사가 들어오면 성직주의가 되니까 안 되고, 교회가 들어와도 교회주의가 되고, 심지어 성서도 성서주의에 빠지니까 들어오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내 영혼에 직접 말씀하시는 ‘내적인 빛’을 듣자는 거예요. 이 직접성은 교권주의, 성직주의, 심지어 성서주의까지 다 부정해버리는 것입니다. 만인제사보다 더 무서운 사상을 그들이 가지고 있었어요.

사실 루터가 그들을 열광주의자라고 비판하며 두려워했던 이유는 종교개혁이 이들에 의해서 실패하면 어떻게 할까, 그리고 바로 이 직접성 때문이었습니다. 이게 들어오는 순간 교회의 질서가 다 무너질까봐 그게 두려웠던 겁니다. 이것이 루터가 철저하게 이들을 부순 이유입니다. 저는 만인제사장보다는 하나님과의 직접성을 주장한 토마스 뮌처나 재세례파의 사상이 더 마음에 듭니다. 본질적인 문제니까요.

이신칭의도 통전적 구원을 말하는 복음을 개인의 영혼 구원 문제로 축소시키고 행위 자체를 약화시켜 기독교를 윤리가 없는 종교로 만들었습니다. 주관적 판단은 잘하는데 객관적 판단의 근거는 상실해버리는 결과를 칭의론이 가져오게 됐지요.

루터가 죽고 나서 바로 이 문제가 불거졌어요. 칭의론은 의롭다고 인정해 주는 법정적 개념인데 그럼 실제적으로 변화 됐느냐는 거예요. 한국교회는 이처럼 법정적 개념으로서의 구원에 대한 이해와 복음을 축소시킨 것을 계속 믿으며 가고 있는 겁니다.

Q. 루터는 원래 개인적인 소양이나 정서가 부족했던 것 같아요. 일단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개혁자들의 공과는 그것대로 인정해 주고 제2, 제3 개혁시대를 불러내야 할 오늘, 우리가 어떻게 해 나갈 것인가에 대해 얘기해보면 좋겠습니다.

   
 

A.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 한국교회의 대부분 분위기는 루터와 칼빈은 건들일 수 없는 사람으로 보고 그걸 어떻게 잘 발전시킬 건가만을 생각하거든요. 하지만 16세기 종교개혁 자체가 태생적으로 한계가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16세기 종교개혁에서 가져갈 건 딱 한 가지라고 봅니다. 바로 프로테스탄트 정신입니다. 아닐 땐 아니오 하는 저항 정신을 유산으로 받는 것이 종교개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비판할 건 비판하자는 겁니다.

또 하나, 종교개혁의 한계 때문에 개신교가 성서나 복음의 본질에서 굉장히 멀어져 있습니다. ‘오직 성서로’는 그때 당시 가톨릭의 반대이론으로 성서를 강조했던 면이 큽니다. 그러다보니 우리는 2천 년 간 내려온 교회의 전통을 잃어버렸고 성서에 대한 객관적 해석의 잣대도 약화됐어요. 그건 엄청난 손실입니다. 그리고 ‘오직 성서로’를 교리화 시키는 과정에서 소위 말하는 성서주의 내지는 축자영감설로 빠지면서 성서가 가지고 있는 역동성이 상실됐습니다. 루터는 그 정도까지는 안 갔어요. 루터 이후에 신념화, 교리화시키는 과정에서 그렇게 만든 겁니다. 대안이라면 예수에게 돌아가는 것이 우리 기독교가 사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Q. 다시 루터의 만인제사를 가지고 새김질 해보지요. 만인제사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어휘해석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것인데, 저는 그것을 요 2:19에 예수님의 성전 정리 대목과 대비시켜 이야기합니다. 그때 성전지기가 와서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이 같은 일을 하는가 하고 묻자 예수님은 ‘이 성전을 헐어라 내가 삼일 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시거든요. 이 성전, 여기서 지시어 ‘이’는 곧 예수 이전에 율법의 총아인 성전주의, 종교주의를 말했고, 다시 일으키리라 하실 때는 지시사가 자기로 변화되었다고 봅니다. 종교의 본체 변화를 시도하는 부분으로 저는 해석해요. 그게 새 종교 운동의 원시적인 출발점이라고 봤습니다. 종교지상주의를 청산하는 새 종교 운동, 종교 아닌 종교, 그래서 이것을 종교의 세속화, 종교의 생활종교화로 저는 봅니다. 생활종교가 되면 종교주의는 자연스럽게 청산되거든요. 이신칭의 명목도 확보하게 되고, 사회구원을 유발하고 발전시키는 단계로 가게 된다고 봅니다. 생활종교가 되면 종교의 모든 제도가 바뀌어버릴 테니까요. 지금처럼 예배당 중심의 문제를 가지고 시비할 것도 없고, 생활단위, 가정단위, 행정단위별로 종교조직이 구성되면 거기서 예수 운동의 원시적인 모델과 구상을 예수께서 시도하실 거라고 생각해요. 그 발전은 예루살렘 공동체에서 했던 것처럼 성찬과 애찬을 동시적으로 하면서 에브리데이 처치(생활교회)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A. 목사님, 굉장히 급진적인 분이시네요.(웃음) 예수님께서 당시 성전 체제에서의 탈피를 시도하셨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전 그걸 사마리아여인과의 대화에서 찾습니다. 유대인은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인은 그리심 산에서 예배드리는데 어디서 예배 봐야 하느냐는 질문에 예수는 두 체제가 만든 성전 체계를 벗어나 ‘영으로 예배드릴 때가 올 것’이라고 대답하셨어요. 저는 이걸 율법이든 당시의 유대 종교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을 억압하는 체제를 예수님이 부정하신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 면에서 루터는 거기까지 이르지 못했어요. 만인제사설을 이야기했지만 사제의 기득권을 포기시키지 않고 교회의 질서를 그대로 유지했거든요. 그런 면에서 예수님의 급진적인 개혁으로까지는 가지 못했고, 칼빈의 경우는 오히려 더 제도화된 교회를 굳혀가는 과정으로 이어졌어요.

Q. 제2개혁의 자원을 가지고 있는 재세례파 신자가 아메리카와 아프리카까지 하면 1천만 명 정도 됩니다. 그 사람들이 엄중하게 교육하고 관리하며 상당히 정돈된 신앙생활을 이어가고 있어요. 예수를 아는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서로를 긍정하고 연민을 가지면 좋겠어요. 그들의 역사적 가치도 인정해주고요. 또 하나, 신·구교가 500년 정도 따로 살림을 하다 보니 양쪽 다 절반승패를 했거든요. 이제는 서로 용서하고 용서 받으면서 만남을 시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에너지를 자원화 해서 교회의 새로운 활로를 열어야겠다는 생각을 해보는 거예요. 가톨릭과 더불어서 전향적으로 화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A. 저는 가톨릭과의 만남에 앞서 한국 개신교 안에 대화가 선행돼야 한다고 봅니다. 현재 이 부분이 상당히 어렵거든요. 보수교단에서 저희 한국기독교장로회는 아직도 좌파 빨갱이에요. 우리 쪽에서 볼 때 저들은 보수 꼴통이고요. 교회 간의 대화가 안 돼요. 보수 진보 간의 단절이 심각합니다. 가톨릭보다 우리 개신교 간의 대화 모델이 성립돼야 한다고 봅니다. 솔직히 교파주의의 배후 속에는 인간의 탐욕이 자리하고 있어요. 교파가 갈라지는 데 있어 형식적으로 교리와 신학을 말하지만 속내는 내가 교권 잡겠다는 거거든요. 이걸 벗어나지 못해요. 교파 간에 획일화시켜서 통합하자는 것이 아니라 독립적 성격을 가지되 공동의 사회 문제라든가 복음에 있어 일치해 갈 부분을 하나씩 같이 해 나가면 좋겠어요. 언제까지 서로 대립하면서 에너지를 소모할 순 없잖아요.

가톨릭과의 만남도 우선 교리적 일치는 불가능하지만 사안에 따라 힘을 모으는 정도에서는 가능하다고 봅니다. 한국교회는 이미 신·구교 간에 함께한 전통이 있습니다. 3.1운동 때 교파를 넘어 하나 됐었고, 민주화 운동 때도 함께했어요. 최근에는 세월호라는 국민들의 아픔에 가톨릭과 신교가 모여서 자연스럽게 기도회를 여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렇듯 우선 사안별로 종교간 대화를 이어가야 하지 않을까요.


역사에서 밀려난 재세례파 등 재조명, 거꾸로 읽는 기독교역사 시도해야 기독교 미래,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오는 복음 외친 예수께로 돌아가야

 

Q. 그렇습니다. 올해는 부활절 예배도 함께 드리지 못했고, 주요 일간지에서도 이번 신교의 부활절을 다루지 않았어요. 외형 1천만 신자인 기독교가 부활절에 사회적 이슈 하나 주지 못했다는 건 죽은 목숨이고 또 존재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이는 깊이 생각해야 할 부분입니다.

A. 한국교회의 신뢰도 하락과 교세 감소에 대해 일각에선 한국경제가 부흥해서 혹은 인구가 줄어듦에 따른 것이라고 보기도 하지만 저는 더 중요한 원인은 교회의 내적 문제에 있다고 생각해요. 더 나아가 그것은 16세기 종교개혁의 한계성에서 온 귀결이라고 봅니다. 또 한 가지는 우리가 복음의 핵심을 잃어버렸다는 겁니다. 칭의론과도 연결되는 얘기인데요.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때가 가까이 왔다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말씀하셨어요. 성서에도 천국 복음, 하늘나라의 복음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왔다는 게 기쁜 소식인데 그걸 칭의론으로 축소시킨 것입니다. 복음을 개인 영혼의 구원으로 이끌어 가면서 복음의 핵심을 잃어버렸어요.

우리나라의 경우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거치면서 우리도 잘 살아보자는 욕구가 발산되었는데 그에 딱 맞아떨어진 것이 번영신학이었습니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복음을 더 심하게 왜곡시켰어요. ‘최고 경영자이신 하나님’, ‘돈 얼마 바치면 축복을 더 받는다’는 둥, 예수천당 불신지옥도 번영신학의 유형입니다. 이게 목회자와 성도들 가치관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Q. 복음의 핵심을 잃었다는 것도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를 제대로 발전시키지 못했다는 얘기와 맞물린다고 봅니다.

A. 그렇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이신칭의에서 ‘오직 믿음’이 한국에 잘못 소개되면서 좋은 유산을 왜곡시킨 측면이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했을 때 믿음이 우리 구원의 조건이나 원인이 될 수 없습니다. 개신교의 원리는 우리가 믿음이 아무리 좋아도, 행위가 아무리 많아도 그것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잖아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것이지요. 그게 롬 3장에 있는 바울의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구원 받는 것이고 그 은혜를 받아들이는 통로가 믿음인데 이걸 잘못 이해하니까 믿음이 원인이 돼 버렸어요. 그러니 믿음이냐 행위냐로 밤새 싸우지요. 무엇을 원인으로 보느냐는 겁니다. 하지만 믿음과 행위는 결코 분리되는 것이 아니죠. 구원의 원인이나 조건이 아니니까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를 믿음이나 행위로 충족시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 한국교회의 철저한 반성이 필요합니다. 개신교가 미래를 열어가는 길은 루터와 칼빈의 신학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거 가지고는 안 나옵니다. 그들은 16세기 한 시대에 하나님이 쓰셔서 그 역할을 충실히 다한 겁니다. 21세기의 새로운 교회는 루터와 칼빈을 넘어서 예수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예수라면 오늘 뭐라고 말씀하실까, 어떻게 하실까를 물을 때 거기서 뭔가 답이 나오지 않을까요. 예수께 돌아가서 거기서부터 대안을 찾아가는 큰 호흡이 필요합니다.

Q. 현재의 의식으로는 예수께 돌아가도 그 예수가 아니에요. 예수 자신도 다시 오신다고 하잖아요. 다시 온다는 건 그 사람, 그 문화 양식, 그 해석법에 의한 예수가 다시 오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원시시대의 예수가 지금 와서 해석이 되겠어요. 우리가 돌아가야 할 그 예수의 기준점마저도 재해석돼야 할 상황인데 그 중간 다리 역할 했던 사람들이 왕좌를 지키고 있으면 안 되지요.

A. 맞습니다. 루터와 칼빈만 얘기했지만 사실 기독교의 신학을 많이 왜곡시키고 잘못 해석한 사람이 어거스틴입니다. 그가 종말사상을 세속화시켜버려요. <하나님의 도성>에서 천년왕국은 이미 교회에 다 이뤄졌다고 했어요. 그러다보니 종말신앙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죠. 루터 칼빈의 장벽과 함께 어거스틴의 장벽을 넘어서야 예수께로 갈 수 있습니다.

신학교 다닐 때 금관의 예수, 시멘트 안에 갇힌 예수를 많이들 말하고 연극도 했는데요. 복음서에 나타난 갈릴리에 사셨던 예수가 아니라 신학과 교리로 더덕더덕 치장된 예수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걸 이제는 깨야 합니다.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복음을 선포하시는 그 예수에 제대로 접근해 들어가면 미래의 답이 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Q. 명쾌한 말씀 감사합니다.

A. 감사합니다.

 

 

류장현 교수는…
한신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독일 베를린훔볼트대학교에서 종교사회주의자 레온하르트 라가츠의 하나님 나라에 관한 연구로 조직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신대학교 조직신학 교수인 그는 전통적인 서구신학의 논리와 구조를 비판적으로 숙고하면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과 한국인의 종교성에 근거한 새로운 신학의 형성에 전념하고 있다. 또한 그리스도의 삶의 재연을 통한 교회 개혁과 사회 변혁을 위해 활발한 저술 활동과 사회 활동을 하고 있다. 저서로는 <하나님 나라와 새로운 사회>, <한국의 성령운동과 영성>, <포스트모던 사회와 교회>, <한국교회를 말한다(공저)> 등이 있다.

 

 

정리=정찬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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