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신교) 수도원 집회에서 나눈 진리 탐구하는 구도자의 자세, 말씀의 향연

성인들의 삶은 말씀에 의지한 것 끝까지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말씀 성도는 외면치 말고 살아내야

십자가의 법칙에 따라 가룟 유다를 신원해야 하는 자세, 기독인들의 몫

나와 예수님을 분리하는 것은 우상, 성도가 제시한 사면권의 엄위성

 

 

   
▲ 오늘의 우리, 여전히 ‘38년 병자’아닐까?

+ 나를 가르치는 진짜 선생은 나

“나를 가르치는 진짜 선생은 나 자신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매섭도록 자기 관찰을 하고 제3의 자리에 객관화시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자기를 끊임없이 가르쳐야 합니다.”

경기도 성결수도원 영성집회. 남녀 독신수도사와 재속수도회 소속 수도사 70여 명이 자리한 가운데서 73세의 한 목회자(정통 교단) 목소리를 높였다. 부흥사 같은 열정으로 성경 속의 핵심을 말하다가 성인(이용도 목사, 프랜시스)들의 삶을 조망하며 오늘의 삶에 투영시켜볼 수 있는 이야기 속으로 청중들을 사로잡았다.

독특한 것은 기독교(신교) 수도회라 그런지 찬송하는 시간에 여느 교회들처럼 박수를 치며 뜨겁게 찬양했고, 통성이나 방언도 쏟아져 나왔다. 아멘 소리도 시원시원했다.

첫 시간부터 성 목사는 요한복음 3장 3~9절의 니고데모의 거듭남에 대해 강조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서원하며 진리의 길을 가는 여러분 앞에 거듭남을 들고 나와 송구스럽습니다. 그러나 이 부분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나는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인가.”

이어 요한복음 5장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 된 병자 대목에서는 이를 문자 그대로 38년의 병자는 아픈 병자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홍해를 건너 38년이나 광야생활을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 여전히 율법에 사로잡혀 있는 유대인들, 그리고 그 병자처럼 복음의 핵심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자기 안에 갇혀서 사는 크리스천들 역시도 ‘38년 병자’에 속한다고 말했다.

“38년의 기간이 길다고 할 수도 있지만 진리 배움의 원칙에서는 결코 길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를 만나기 위해 38년의 시간이 걸려서 만난 병자는 어쩌면 행복한 사람입니다. 아직도 예수를 만나지 못한 숱한 많은 사람들에 비하면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다 알지 못하면서도 안다고 착각하며 교만한 이들도 거기에 속합니다.”

한국 일제 치하의 이용도 목사(1901~1933)는 ‘눈물의 성자’로 불릴 정도로 많은 눈물을 흘린 영성의 삶을 살았는데, 그는 독립만세를 외치다 죽어가는 젊은 청년들을 보면서 슬프고 애통하며 울고 또 울었다고 성 목사는 말했다.

“이용도 목사의 울음 신앙에는 자기와 인간에 대한 애통함뿐 아니라 민족의 아픔이 접목돼 있었습니다.”

또 한 사람 13세기 성자인 프랜시스(1182~1226년)는 로마제국 교회 전성기에 기독교 절망을 말했고, 예수의 가난과 절대 사랑의 실현을 위해 살았으며, 교황부터 바릿대를 들고 탁발행에 나서고 거리에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파격적인 인물이라고 소개했다.

특히 제5차 십자군 전쟁터에 직접 달려가 이슬람 총 사령관인 알 카밀과의 담판을 짓고, 그를 감복시키고 종교와 평화문제 해결에 일치점을 서로 나누며 십자군 전쟁 종결의 수순을 밟게 한 인물을 통해 오늘 우리 기독교의 책임있는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설파했다.
“이 두 인물의 공통점은 죽음을 통과한 사람이었습니다. 사욕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에 사로잡힌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이 그들을 자신이 아닌 복음을 위해 살게 한 것입니다.”

   
▲ 성도의 권능과 사명은 십자가에 기반해 있다.

+ 소경이 눈을 뜨고 하늘로 살려면 시간이 걸린다

그러면서 성 목사는 ‘100년의 배움’을 강조했다. 성 안토니우스가 105세까지 살았지만 35세까지 ‘하나님이 아는 체하지 않았다’는 고백을 말하면서 무덤 속 동굴에서 긴긴 생활을 살았지만 그는 죽을 때까지 성공적으로 살았음을 주목하라고 말했다. 진리는 긴 호흡으로 느긋한 마음으로 추구하되 무릎이 닳도록 치열하게, 자기를 타자화시켜 하나님의 사람으로 키워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누가복음 18장의 소경 바디매오가 그래서 행복하다고 오버랩시켰다. ‘무엇을 원하느냐’고 묻는 예수님께 바디매오는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면서 보기를 원한다’고 명쾌하게 답변하는 것을 주목해 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 누가복음 18장의 바디매오는 예루살렘의 십자가 길에 유일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수행하고 있는 수행자, 즉 영적인 측면에서 12제자는 모두 탈락자이며 소경 바디매오만이 유일한 수행자로 자리하고 있다고 말했다.

예수님은 바디매오의 간청대로 그를 ‘불쌍히’ 여기셔서 병을 고쳐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처럼 한없는 긍휼과 자비, 불쌍히 여기는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품성을 소유하는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고 말했다.

성 목사는 요한복음 6장으로 청중을 안내했다.
“이 장은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기 몇 주 전, 제자들의 옥석을 가리는 시간, 승부수를 띄우는 대목입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떡이니 이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51).
‘생명의 떡’은 너희와 나의 간격을 없애고 하나의 자리에서 만나는, 생명을 공유하자는 예수님의 간절한 마음임을 언급하면서 “그런데 크리스천이라고 하면서도 나와 분리하여 예수님을 우상으로 섬기려는 모양새들이 적지 않습니다. 대속신앙에 못 미치는 신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어지는 말씀 본문은 요한복음 12장 4~8절, 마리아의 값비싼 향유의 장면.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는 것에 유다는 그 값을 계산해서 야단을 치고 있었지만 마리아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돌아가실 날이 멀지 않았음을 알았고, 그래서 그의 장례를 치르는 의미로 행한 것입니다.”

열두 제자를 제치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준비한 유일한 여인이 막달라 마리아라고 사도 요한이 말하고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고 성 목사는 말했다.

그러면서 성 목사는 진실을 입으로가 아닌 몸으로 밝혀낸 한 수녀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버지가 출가를 하겠다고 하니 딸이 하는 말이 ‘남장을 하고 저도 따라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강간범으로 몰려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그냥 쫓겨나가기가 싫었던 수녀는 수도원 밖에서 움막을 짓고 평생을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녀가 그렇게 죽자 수도원에서는 ‘그래도 장례는 치러줘야 하지 않겠느냐’며 시신을 가져다가 염을 하려고 하는데, ‘아, 여자의 몸’이었습니다.”
송 목사는 이 말을 하면서 “진실은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바로 말해서 밝힐 수 있지만 손해 보면서도 진실이 드러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도 있는 것입니다.”

+ 성도의 거룩함을 담보하며 살기 위해서는

성 목사는 요한복음 13장을 ‘유다의 장’이라고 명명하며 ‘사랑하라’(34~35절)는 말씀을 명심해야 한다고 말한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판 자라고 해서 ‘영원히 저주 받아야 할 죄는 아니다’라며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이 그를 저주할 입장은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하다. 오히려 “잘못은 했지만 그 역시도 예수님의 십자가 법칙에 따라 용서받아야 할 사람이라고 신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집트 피난교회에서 보니 예수님의 제자들이 함께 앉아있는 탁자가 있는데, 그 기둥이 11개 밖에 없었습니다. 가룟 유다의 것은 빼놓은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수준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며 전체를 하나로 보라는 의미에서 끊임없이 제자들에게 사랑을 강조한 예수님의 마음을 여전히 외면하고 있지 않습니까?”

기독교인들이 자칫 자기는 옳고 남은 틀렸다면서 구분하는 논리가 강한데, 타인의 그런 부분을 감싸 안고 일으켜 세워 함께 가자고 하는 자세가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는 더욱 필요해 보인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지는 본문은 요한복음 20장, 예수님이 부활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사건에서 성 목사는 성부, 성자, 성령의 동격, 이 삼위일체 속에 성도가 포함되어있는 놀라운 사건이 있음을 강조했다.

“21절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에 성도의 권능이 있습니다. ‘하나님=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성도’의 동격이 말하는 바를 여러분은 믿고 따르고 누리고 계십니까.”

성 목사는 성도의 권능과 사명으로 23절을 제시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이 권능과 사명의 원칙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원칙에 기반하고 있어야 함을 말하면서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 극대화시킨다.

“전도할 때 우리는 ‘예수님이 너의 죄를 모두 용서하셨어’라며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그가 더 이상 죄인이 아님을 선포합니다. 그런데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전도받은 자는 여전히 변화된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되면 전도한 자나 주변사람들 모두가 ‘그럼, 그렇지’ 하면서 ‘사면장’을 거두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됩니다.”

성 목사는 거기서 그치면 아무 소용이 없다며, 자세(믿음)를 바꾸면 안 된다고 강조한다.

“전도받은 자의 삶이 어떻든 간에 예수님이 그 사람을 위해서 죽으셨고, 용서하셨고, 사랑하고 계시다는 사면권을 거둬들이면 안 됩니다. 성도들이 실패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제한하는 것입니다. 그가 변하지 않아도, ‘그래 아직 네 모습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예수님은 너를 용서하시고 사랑하고 계시는 것만 잊지 말고 믿어’라며 그를 끝까지 독려해야 합니다.”

아직 사함 받은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단계일지라도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는 사면권을 준 자는 그것을 잊지 말고 믿어줘야 하는 십자가의 원칙을 선포했다.

참석자들은 모두 아멘으로 화답했고, 앞서 걸어갔던 이용도 목사나 프랜시스 등 성인들의 삶은 철저히 말씀에 근거하며 힘입어 살았듯이 오늘 현재 우리도 그 말씀에 근거한 삶임을 재다짐하는 시간이었다고 고백했다.

*2회에 걸쳐 집회를 인도한 성 목사는 자신의 이름이 보도되는 것을 조심스러워했다. 가명을 사용하기로 하고 게재했음을 양해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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