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21세기 이렇게 대비한다 / 38-17

예수께서는 어느 날 제자들에게 인자가 예루살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죽임을 당하게 된다는 말씀을 하셨다(마 16:21~, 막 8:31~, 눅 9:22~).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감당하지 못하고 반발과 저항으로 예수의 말길을 짓밟아버린다.

민망하신 예수, 그러나 그렇다고 그냥 무심코 지내치기에는 너무나 깊고 큰 내용이다. 다시 제자들의 마음을 열고자 했다. 제자들 중 셋, 베드로·요한·야고보를 이끌고 높은 산행에 나섰다(마 17:1~, 막 9:2~, 눅 9:28~). 높은 산언덕에서 예수는 모세, 엘리야, 급기야 하나님까지 동원해 십자가와 예수의 죽음 이야기를 하셨다. 그러나 여기서도 제자들은 초점을 비껴 지내쳐갔다. 마가복음에서는 이 말씀을 깨닫기는커녕 생각만 해도 두려움뿐이었다(막 9:32).

일명 ‘변화산 이야기’로 말해지는 예수의 두 번째 십자가 죽음 예고는 엉뚱한 변화산 교훈에 먹히고 만다. 대다수의 설교자들이 변화산 이야기에서 예수와 모세, 엘리야가 입은 세마포의 하얀 색깔에 취해 십자가 계시를 놓치고 말았다. 누가복음에서는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 십자가를 말하고 있다(눅 9:31)는 힌트까지 주셨는데 아직도 설교자들은 모세와 엘리야를 예수의 동급으로 착각하는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의 당시 수준에 머물고 있다.

두 번째 십자가 죽음에 대한 계시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대속죄(代贖罪), 곧 대속량(代贖羊)의 죽음임을 간곡하게 표현하심인데 세 제자는 물론 오늘의 설교자들도 변화산 모습에서 새하얀 도덕성, 영광된 훗날의 세계 수준에서 해석을 끝내고 있다.

더는 지체할 수 없는 예수는 마지막 예루살렘 길, 곧 십자가 죽음 직전에 다시 한 번 제자들을 향하여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로 시작해 십자가 대속죄의 죽으심에 대해 간곡하게 말씀하셨다(마 20:17~, 막 10:32, 눅 18:31~).

이 말씀 하실 때도 마태와 마가의 반응은, 세베대의 아내는 물론 그 자식들인 요한과 야고보가 하는 말로 답변을 대신하고 있는 자들이다. 주께서 영광에 오르실 때 자기네를 좌우 보좌 자리에 앉게 해달라는 엉뚱한 청탁을 한다. 누가의 기록은 멍청한 제자들이 예수께서 성경 역사상 가장 중요한 십자가 죽으심을 말씀하고 계시는데‘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더라’(눅 18:34)였다.

이 기록들이 예수 당시 제자들의 수준이다. 또 제자들의 수준은 초대교회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대속 신앙과 신학의 무지와 좌절을 겪으면서 기독교의 가치는 어느덧 소멸의 수순까지 오고 말았다.

앞부분에서 열거한 예수와 제자들의 ‘십자가 죽음’에 대해서 제자들이 예수께서 왜 그렇습니까? 꼭 그래야 합니까? 그 방법이 최선입니까? 그럼 우리는요? 해가면서 대화를 한마디라도 연결했더라면 예수께로부터 예수의 죽음과 그것이 인류 구원이며, 대속의 유일가치임을 한 마디 더 배울 수 있었을 것 아닌가?

이제라도 오늘의 교회는 십자가 대속신학과 신앙의 가치를 다시 배우고 발전시키는 일에 몰두해야 한다. 대속신학에 실패한 유대주의, 헬라주의, 이슬람주의들, 그리고 아시아의 이원론에 기초한 범(凡) 단성론자들과 대화의 길을 여는 공부도 겸하여서 말이다.

無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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