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역사> 번역자 한제호 목사, “슐라터 만나니 주님이 더 깊게 느껴져”

자유주의 신학이 주도하던 시대에 보수주의 옹호 입장 견지한 슐라터는 바르트의 스승
이상주의 개입 거부한 견고한 성경 계시 중심 사상, 예수전(傳) 보다 기독론 최심장부에 도달한 ‘예수 중심’ 사상 주목
슐라터의 책 말하자 대형교회 목사 ‘독일신학은 한국 같은 총신에서는 받아들이지 않는다’-천박성 안타까워

   
▲ 90세의 한제호 목사, 그는 복음의 핵심에 접근했던 슐라터에 대해 얘기할 때면 미소가 절로 나왔다.

8년 전인 2007년 한제호 목사는 82세의 나이에 아돌프 슐라터(Adolf Schlatter, 1852~1938)의 <그리스도의 역사>를 번역했다. 많은 이들이 “슐라터는 20세기 초반 튜빙겐 대학의 신학 교수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피터 슈틀마허), “어거스틴, 칼빈, 슐라터 같은 과거의 저술가들은 시간을 초월한 통찰이 담겨 있다”(슈테펜 나일), “슐라터의 저술들은 신중한 학자들로 하여금 고전적인 자료들과 방법, 그리고 그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는 풍성한 내용을 담고 있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었다.
특히 영어로 번역한 안드레아스 쾨스텐버거는 “슐라터의 다른 저서들과는 다르게 신약 신학의 전반을 다루고 있는 <그리스도의 역사>는 복음의 운동을 대범하고 폭넓은 필치로 묘사하고 있어서, 그의 신학의 전모에 대한 접근의 길을 제공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초판 이후 재판 발행을 준비하고 있는 한제호 목사를 경기도 분당 자택에서 만났다. 슐라터에게 영향을 받은 기독교의 핵심, 본질에 대해 그는 주저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 여전히 슐라터를 대단한 분으로 생각하시며, 그의 책에서 보여지는 복음의 진수가 오늘 한국교회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보고 계신데, 어떤 분이었나.

- 슐라터의 제자 킷텔은 자신의 대작인 <신약 신학 사전>의 첫 권을 스승 슐라터에게 헌정할 정도로 높이 추앙했다. 슐라터는 40년 이상 교수직에 있었는데, 자유주의 신학이 주도하던 시대에 성경 해석과 신학의 분야에서 보수주의를 옹호하는 입장을 견지했었다. 그는 조직 신학의 유일하고 적절한 기초는 성경 주해라는 확신을 가졌었고, 이런 입장에서 슐라터는 칼 바르트의 스승이 되었으며, 그에게 영향을 준 것으로 안다.

슐라터와 동시대의 저명한 신학자는 아돌프 하르낙(1851~1930)을 꼽을 수 있다. 하르낙이 슐라터와 같은 베를린 대학에 부임하게 된 동기는 학생들에게 ‘나는 교회가 사도신경의 사용을 포기하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해 논쟁이 일자 프러시아 황제가 하르낙과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슐라터의 교수직을 칙명으로 정했던 것으로 안다.

로버트 모르간은 슐라터가 ‘불트만 이전 시대의 최대 보수주의 신학자였으며, 이는 당대의 신약 연구의 주류 밖에 서 있었다’고 보았으며 ‘아마도 벵겔 이후 바우어, 브레데, 불트만과 견줄만한 유일한 보수주의 신학자였다’고 평했다.

1907년 칼 바르트의 부친이 아들에게 슐라터의 강의를 들으라고 권했던 것으로 아는데, 바르트는 회고록에서 “부친은 내 사상이 자유주의 성향이라는 점을 아시고 좀 건전한 신학 강의를 들려줄 때가 됐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고 했다.

● 그렇듯 ‘복음주의자’로 명성을 떨쳤던 슐라터의 신학사상을 무엇으로 꼽을 수 있을까.

- 연구자들의 주관적이고 이상주의적 견해의 개입을 거부한 견고한 성경 계시 중심 사상, 그리고 예수전(傳) 보다도 기독론의 최심장부에 도달하고 있는 ‘예수 중심’ 사상을 꼽을 수 있다.

또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추상적 개념들과 이론들로 무장시키지 않으시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에 적응하도록 현실적으로 훈련시키신 부분은 주목할 만하다. 예수께서는 철저히 구체적인 것만을 말씀하셨는데, 복음서 기자들은 그들의 기록에서 예수의 이 뜻을 따라 고도의 생략법을 구사한 점은 주목할 만하다. 예컨대 ‘요셉과 마리아의 대화 기록이 없는 사실’에 대해 슐라터는 지적하고 있다.

슐라터는 예수 당시 유대의 군소 이단 종파들의 허상들을 열거하는 중에, 예컨대 열심당인 엣세네파에 관해 지적하기를 ‘신관과 도덕관이 근본적으로 혼잡했기 때문은 그들은 계속해서 계율을 창조해 냈고, 그들의 기도는 중언부언하고 있어서 실제로는 기도를 못하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그들에게서 명석한 신앙과 강한 믿음의 동반 관계는 찾을 수 없었으며,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지도, 순종하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을 저 만큼 멀리 두고 조롱하고 있었다고 질타했다. 슐라터는 이런 신앙의 목적성을 극복하는 길은 ‘참된 예수의 활력’만이 필요하다고 제시했는데, 이 부분은 한국교회의 갱신을 위해서도 절실한 부분인 것 같다.

●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하시고자 하는 부분들이 그 당시, 그리고 지금에도 여러모로 ‘전달’이 제대로 안 되고 있다고 보신 것 같다.

- 그렇다. 세례 요한과 예수의 회개 전파는 신자의 구속과 직결되어 있었으나 이미 2세기부터 천국 선포와 신자의 회개 교리 해석이 부패해짐으로써 교회의 신학에 변질이 발생했다고 슐라터는 지적했다. 이런 부분은 오늘 우리의 천국 선포에 무엇이 잘못되어서 신자들의 반복되는 회개가 구속(救贖)과 잘 직결되지 않는 것인지 숙고해야 할 부분인 것 같다(히 6:1~3).

슐라터의 이런 실존적인 성경 이해의 자세는 ‘나는 성경을 비판적으로 읽었기 때문에 그것을 믿을 수 있었고, 나는 성경을 믿기 때문에 그것을 비판적으로 읽었다’고 말한 바와 상통한다.

슐라터는 흥행(퍼포먼스)이나 의식을 종교의 주요한 요소로 만들지 말라고 거듭 말했다. 자의적인 위험 부담을 취하는 일은 ‘인간의 도박에 즐거운 종말을 가져올 뿐’이라고 말했다. 오늘 한국교회에서도 흔히 보게 되는 ‘열린 예배’의 오류나 물질만능주의 등을 경계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세례 요한 당시에는 율법이 강한 지배력을 갖고 있어서 모든 설교의 주제는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였고, 따라서 종교의 중심 문제는 ‘선행’이었다고 슐라터는 언급하면서 믿음 보다는 행위에 치우치고 있음을 경계했다.

예수께서는 예배 형식에서 제사장이나 물질적인 사랑을 말씀하지 않았고, 신자는 의지(意志)를 제물로 삼아서 하나님께 예배 드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영지주의자와 신비주의자들이 윤리를 무시하며 마술적 수완, 감상주의, 신앙의 내적인 감미(甘味) 등을 강조하고 있는 현상을 슐라터는 경계했는데, 이는 신비주의가 결국 신앙에서 필수적인 윤리를 파괴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성령의 개념에서 분명한 윤리적 조건이 결핍하게 되면 그것은 인간의 의식에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한다는 점에서 경계한 것이다.

● 그 부분을 조금 더 설명 해주신다면?

- 신비주의자들이 내세우는 소위 ‘성령 충만’이라는 은사는 ‘흥분과 소동을 일으키면서 초인 만들기’에 몰두하게 되는데, 이는 영리하게 고안된 속임수로서 하나의 마술적인 수완에 지나지 않는다고 슐라터는 진단했다. 사람 자신이 ‘성령을 특별하게 소유했다고 자찬하게 되면 그는 최대의 타락에 빠진다’고 슐라터는 경고하면서 영지주의는 언제나 교회의 윤리에 파탄을 초래해 왔다고 보았다.

● 한국교회가 현재 여러모로 난관에 부딪혔는데, 근원적인 부분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 그 역사가 신자와 교회마다에 자리잡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들이 있다.

- 한국교회가 비교적 역사가 짧고 피상적으로 공부하고 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슐라터가 말하고 있는 복음서 이해만 제대로 해도 신앙이 견고해질 것이다. 슐라터 같은 귀한 분을 알게 되어 제 인생에 참 감사한 생각이 든다(이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엔 흐뭇한 웃음꽃이 피었다).

안산의 큰 교회인 김 모 목사에게 슐라터의 책을 재판할 수 있도록 협조를 요청하자 그가 하는 말이 ‘독일신학은 한국 같은 총신에서는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말하더라. 그 정도의 생각밖에 가지지 못하는 천박성을 확인하게 되니 참으로 안타까웠다.

   
   
 

● 슐라터가 이야기하고 있는 구속사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달라.

- 그리스도가 성전을 폐기함으로써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가 생겨날 수 있다는 사상때문에 예수의 재판자 모두를 그의 적으로 만들었다. 예수는 하나님을 계시하셨고 또 그 공동체를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셨다는 이유 때문에 이스라엘은 그를 용납하지 않았던 셈이었다. 동시에 예수는 그를 참 성전으로 만드셨던 하나님과 그와의 밀접성으로부터 우러나는 그의 승리의 기쁨과 삶에 대한 부동의 확신이 일어났었다.

대적들 앞에서의 심문은 ‘예수가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인가 아닌가를 스스로 직접 선언하시게 하는 것’으로 끝났다. 대제사장의 논박을 피하지 않으시고 죽음을 당하심으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게 될 것이며, 그의 재림을 통해 영광 가운데 나타나실 것을 표명하셨다.

그리고 부활절 기록의 성공이라는 것은 단순히 제자들이 계속해서 믿음을 추구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그들 안에서 현존하는 것이 되었고, 그들 안에서 확인된 것이 되게 했다는 점에 있다. 예수의 메시아 신분은 죽음 이후 부활로 제자들에게, 오늘의 크리스천들에게 현실이 되었다. 예수를 부활하신 이로 소유하게 되었을 때 그가 그리스도이심이 확실해진 것이다.

예수 십자가로 인해 성취되었던 이스라엘과 전 인류에 대한 의(義)의 집행이 부활절 기록 안에서 확증되고 완성되었다. 부활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믿는 모든 이들의 죄를 넘어서 그들 속에 직접 들어오신 것이다. 성령의 선물에 참여하는 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들에게 주님의 은혜가 임하게 되는 것이다.

● 슐라터를 만나기 전과 후의 구속사에 대해 어떤 부분이 달라졌나.

- 실제로 읽어보면, 구속사에 대해서 이분처럼 잘 알았던 분이 흔치 않다는 것을 공감할 것이다. 슐라터의

   
 

 책을 읽기 전에 성경을 이해하는 것과 후가 차원이 완전히 달라졌다. 학문이나 신앙적으로 정확하게, 깊이 기독교를 이해하게 된다.

예를 들어서 슐라터는 그리스도의 유년기(나사렛에서 자랄 때부터 예수의 생각들을 잘 보여주고 있다)부터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 예수님의 마음에 있었던 깊은 생각들을 가장 잘 표현한 분이다. 기독교의 본질을 꿰뚫어 본 분이 슐라터 같다.

슐라터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원어를 통달한 분이며, 교수시절에 팔레스타인에서 몇 년 씩 살면서 원어연구 한 분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의 책은 어렵고 깊다. 복음서 중심에서 기독교를 튼튼하게 세워놓은 분 중의 한 분을 통해 소중한 신앙을 키워가기 바란다.

부활하신 주님을 가장 늦게나마 직접 뵈었던 도마가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나도 이 책을 번역하면서 여러 번 고백하게 됐다. 주님을 뒤에서나마 직접 만져보았던 혈루증의 여인이나 또는 처음 미 대륙을 발견하고 그 땅에 두 발을 딛고 섰던 순간의 콜럼버스의 감격을 되풀이해서 느꼈다. 슐라터를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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