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로펜의 아시아(AD 610~1625) 천년여행 156

“그래요. 다시 죽을 필요가 없지요. 나는 예수 십자가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어요. 이 죽음은 내 생명의 값이기 때문에
양보할 수 없지요. 한 번 죽는 것은 정하신 이치라 하였으니 나는
십지가 예수님과 동반 죽음을 경험한 나의 신앙을 천금보다 귀하게 여깁니다.”

 

 

 

   
▲ 중국 서안시에 자리한 한 예배당. 경교 예배당으로 사용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건 너무나 추상적인 말씀이기도 하고 눈속임과도 같습니다. 백년에 한 마디만 하라는 것이야 말을 조심스럽게 하라는 교훈이기도 하지만 현실적이지 않아요. 갖가지 미신 속에서 허덕이는 사람들, 절반은 저게 짐승이냐 사람이냐 싶은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살아가노라면 인생은 한 치 앞의 이해관계로 허덕여야 합니다. 내가 너무 무례하게 말했나요?”

부하라의 실라는 점점 자신감 있는 태도로 나왔다. 말은 마리아를 어른으로 대한다 하면서도 가끔 무례하다 싶은 말을 하기도 했다.
마리아는 한참을 생각 속에 잠겨 있었다. 그도 부하라의 실라가 쉽게 물러설 사람이 아닐성 싶다는 느낌을 가졌다. 저 사람이 왜 말꼬리를 잡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면서 마리아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실라 선교사가 생각은 생각으로 받아줄 줄 알았는데 말꼬리를 잡고 늘어집니까. 그렇다면 좀 다른 시각에서 예수에 대해 말해 볼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한 품성 안에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쉽게 만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분 안으로, 영적인 그분의 세계로 뛰어들면 하나님의 무한 방대하신 세계를 알게 되지만 그것을 다시 육신의 언어로 표현해 보려고 할 때는 또 다시 인간의 제한된 목소리밖에 낼 수 없어요.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예수를 역사의 무대로 불러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를 부르세요. 예수가 여러분 앞에 여러분과는 또 다른 모습으로 서게 하세요. 여러분 모두는 그런 권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부하라의 실라는 이제 마리아의 턱을 지키고 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노려보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실언할 때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던 날 그의 무덤 가에서 막달라 마리아를 만났습니다(요 20:11). 또 엠마오 길 가는 제자들 발길을 예루살렘으로 되돌리기도 했고(눅 24:13~) 나는 고기 잡으러 간다(요 21:3~)고 불신앙의 말을 했던 베드로와 그 밖의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 잡을 때 달려가서 그들을 다시 가르쳐 주신 예수를 봅니다. 그때 그 예수는 제자들 중 어느 누구의 몸을 사용하셨을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들도 우리 안에 오신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오늘도 예수는 어느 누구의 몸으로 자신의 하실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를 부르세요. 예수를 만나세요. 예수의 몸으로 나타날 자를 찾으세요. 그리고 만나세요. 요한복음 20장 21절에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중요합니다. 이 말씀이 기독교의 다음 세대를 위한 열쇠일 것입니다. 아버지가 나를 세상에 보내심 같이 나 예수도 너희를 나와 같은 자격으로 세상에 보내노니 너는 가서 나의 하는 일을 행하라. 나의 하는 일은 너희도 할 것이요. 경우에 따라서는 더 큰 일을 하리라고 말씀하신 예수를 우리는 오늘 여기 사마르칸트 회의실에서 만날 필요가 있습니다.”

부하라의 실라는 경악했다. 그는 이를 악물고 무슨 말인가를 해야 한다고 식식거렸다. 스데반이 그에게 가까이 와서 무슨 말인가를 하려 했다. 실라가 스데반을 뿌리치면서 자리를 옮겨 버린다.
회의 도중, 마치 정회를 한 것처럼 끼리끼리 둘러 앉았다. 실라는 다른 사람도 발언하기를 권유했으나 모두들 사양했다. 대신 의견의 일치를 보자고 다짐을 했다. 실라가 다시 일어섰다.

“교수님, 저희들이 자칫 수렁에 빠질 수도 있겠다는 예감이 듭니다. 지금 말씀하신 예수의 부활은 어디까지나 예수님의 부활인데 교수님의 말씀에는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 믿는 사람들의 부활을 뒤섞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안되잖아요?”

“실라 선교사! 내 말을 잘 들으세요. 예수 부활과 믿는 자의 부활을 혼돈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부활은 오순절 성령 강림시까지(사도행전 2장) 예수님이 중심이었고, 그 이후는 신자의 부활이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나는 예수님의 부활과 믿는 신자의 부활이 따로 있다고 믿습니다. 오늘까지 교회는 예수 부활이 아닌 신자의 부활을 너무 소홀히 하면서 교회 역사가 잘 못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당장 우리들 네스토리우스 교단이 중국과 아시아에서 고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럼 신자의 부활은 언제입니까?”

“바로 지금, 내가 주 예수의 부활을 믿는 그 순간 나 자신의 부활이 주어집니다.”
“아닙니다. 교수님. 부활은 마지막 날에 이루어집니다. 이는 모든 교회들이 다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럴까요? 요한복음을 읽으면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고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하셨지요. 이 말씀에 빼고 보탤 게 있나요. 말씀은 그대로 믿어야죠. 그리고 예수와 함께, 예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부활의 시간표가 나와 있지요. 그것은 예수 십자가 죽으심에 동참하는 그 시간(갈 2:20)에 내가 거기에 있을 경우 예수님과 ‘동반십자가’를 이루어 내는 것입니다. 자꾸만 자기 생각을 끼워 넣으려는 사람들 때문에 기독교의 생명이 좌절되어 왔습니다. 우리 여기 모인 여러분은 자기 생각에 빠져서 신앙의 혼돈을 잃으키지 마세요.”

“그럼, 교수님 하나 묻겠습니다. 교수님은 지금 부활의 생명을 가졌나요?”
부하라의 실라는 얼굴이 빨개졌다.

“네, 나는 부활의 신앙을 가졌습니다.”
“부활의 생명을 가졌느냐고 물었습니다. 다시는 죽지 않고 영원히 지금 모습으로 사시는 것입니까?”
“그래요. 다시 죽을 필요가 없지요. 나는 예수 십자가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어요. 이 죽음은 내 생명의 값이기 때문에 양보할 수 없지요. 한 번 죽는 것은 정하신 이치라 하였으니 나는 십지가 예수님과 동반 죽음을 경험한 나의 신앙을 천금보다 귀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내게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이 늘 흔적으로 남아 있지요. 예수님의 삶을 내가 함께 살아야 하기에 내 인생 일백여 년 동안 내 멋대로 살 수 없었지요. 앞으로도 얼마 남지 않았겠으나 함부로 내 기분대로 살 수 없답니다. 그리고 육신이라는 것에 여러분도 속지 마세요. 육신은 세상 사는 동안에 필요한 도구일 뿐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은 때가 되면 마치 이 가을에 나무들이 낙옆을 털어내고 새 봄이 올 때까지 인내의 겨울을 나듯이 우리 몸도 계절의 옷에 지나지 않아요. 나뭇잎들이 낙옆 되면 털어버리고 새 날을 기다리듯이 우리들의 영생 길에는 계절이란 말 그대로 계절일 뿐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미 영생길에 들어선 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감히 말하고 싶군요.”

“말도 않돼. 그건 영적인 세계잖아요. 교수님.”
“그래요. 그럼 영적인 세계를 부인하고 초라한 짐승이나 다를 바 없는 육신의 삶에 만족하려 했단 말인가요. 실라 선교사님! 그 정도의 영적 수련에 멈추다가 장차 사단과의 싸움을 어찌 감당하려고 그러십니까?”
“저는 받아들일 수 없어요. 그 같은 자세는 열광주의요 신비주의로서 초대교회 이후 세상을 현혹시켰던 몬타누스파 광신도들과 같습니다. 저는 죄송하지만 교수님의 신앙에 동참할 수 없습니다. 여기를 떠나겠습니다.”

실라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웅성거리던 선교사들 중 6,7명이 그의 뒤를 따라 나섰다.
“저런…. 저 사람들이….”
야고보 주교가 그들 뒤를 쫓아갔다.
“주교님, 관두세요. 저들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치 않겠어요.”

마리아 교수가 야고보 사마르칸트 책임 교수의 행동을 말렸다. 야고보는 되돌아와서 자기 자리에 앉는다.
“여러분, 사단은 우리의 마음에 혼란을 주어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과로움과 갈 길을 망설이게 하는 술수를 발휘합니다. 늘 이기는 능력을 가져야 합니다. 부활이 현재냐 미래냐의 문제는 하던 일을 멈추고 하룻밤 기도하면 곧 하나님이 응답을 주십니다. 이는 신자의 호흡과 같은 것으로 곧바로 응답을 주시죠. 기도하세요. 기도해 보세요. 앞서 말했지요. 부활 뿐 아니라 신자의 궁금증은 모두 기도세계에 몰두해 들어가면 그 안에 만가지로 넉넉한 해답이 모두 있습니다. 기도와 묵상은 수준 있는 신자의 기본 영양소입니다. 그 안에, 신령한 세계로 초대받는 신자는 영적인 통쾌함을 말로 표현할 수 없이 경험하게 됩니다. 세상의 부귀영화, 화려한 권세, 또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모든 쾌락을 모두 동원해도 하나님이 주신 신령한 만족과 기쁨은 다 표현하지 못합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들로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 아름다운 황홀경을 말이나 글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지요. 없고 말고요.”

말을 마치는 마리아의 얼굴에는 생기가 돌고 자신감이 넘쳐 흘렀다. 죄송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신들린 무당이 큰 굿을 마치고 희열에 찬 만족감에 젖은 것 같다고나 할까.

다음날도 모였다. 어제처럼 충돌은 없었다. 부하라의 실라와 함께 나갔던 7명의 동료들은 참석하지 않았다. 마리아와의 집회장 밖에서 만난 실라는 신학의 차이를 극복하는 데 좀 더 시간이 걸리겠다고 했다.
“오늘은 마음에 모두 자신감을 가지세요. 스스로 삼갈 것을 제외하고는 대화하는 기쁨을 잊지 마세요.”
마리아는 강단에 올라가지도 않고 무리들 가운데 앉아서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려고 애썼다.
“오늘의 사회자는 스데반 수도사이면 합니다.”

마리아가 추천했다.
“저는 스데반. 제 이름은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사울이라는 율법사와 정면 승부를 했지요. 결국은 돌무덤 속에서 죽어갔으나 그 장렬한 순교는 기독교 역사의 빛이요 영광이었죠. 저도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 받드는 순교자 스데반이 되겠습니다. 마리아 교수님의 부활신앙이면 능히 순교의 영광을 누릴 수 있겠죠. 여러분!”

“아멘입니다. 오늘 우리들 주변에서도 자기 학문과 관록을 뽐내는 사울과 같은 인간들이 많이 있지만 우리는 이미 받은 영생하는 자들의 힘을 발휘하여 이겨낼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데 저는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어요. 여기서 질문해도 될까요?”
다위드였다. 선교사님들 곁에 앉아 있기만 하라는 주의를 스데반 선교사로부터 받았는데 싱글거리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그래, 간단한 질문이지?”
스데반이 마지 못해서 허락했다.

“감사합니다. 내 질문은 할머니 교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어제 말씀하시는 중에 ‘내게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이 늘 흔적으로 남아 있다고 하셨고, 예수님의 삶을 내가 함께 살아야 하기에 일백 년 동안 내 멋대로 살 수 없었다’고 하셨는데 그 부분을 조금 설명해 주셨으면 합니다.”

“뭐야. 저런 어린애가….”
라는 말을 하는 이들도 있고 여러 사람들이 깔깔 웃기도 한다.
“우리 다위드가 참으로 영특하지, 또 분위기도 알고 말이야. 그러면 내가 말해 주지. 주님의 십자가 흔적을 내 몸에 가졌다는 것은 내 신앙사상을 지켜가는 고통이고 내 인생 일백 년을 내 멋대로 살 수 없었다는 말은….”

마리아가 하던 말을 끊더니, 다위드를 번쩍 들어서 올렸다가 내려 놓는다.
“아, 할머니. 나 무거워요. 허리 다치시면 어떻게….”
다위드가 울상을 짓는다.
마리아는 물론 선교사들이나 신자들과 선교사 지망생들도 따라서 웃었다.

“할머니는 일백 년 인생을 사시면서 때때로 고민이 많으셨지요?”
마리아가 답을 안하자 다위드가 다시 질문했다.
“그렇습니다. 다위드 님. 일백 년이 너무나 길어서 살아가는 데 종종 현기증이 나더군요.”

“어허, 할머니는 어찌하여 말씀의 핵심을 회피하려 드시나요?”
“아이고, 내가 뭐를 회피하려 드나요?”
“제가 꼭 집어 볼까요. 일백 년 고비고비마다 고민했다는 것 말입니다.”

“그래 어디 뭔지 말해 봐.”
“네, 좋습니다. 그럼 맞춰봅니다. 시집을 갈까 말까? 알로펜 총주교님께로 갈까 말까 였지요?”
“….”

마리아는 말을 잃었고 군중은 와하하,를 연발하고 어떤 이들은 발을 동동 구르기도 했다.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다. 각 지역 선교사들의 보고를 받는다. 지역 사정의 어려움과 핍박이 심한 곳에 대한 대책을 세웠다. 마니교와 이슬람과의 갈등 문제는 쉽게 답을 내지 못했다.
 

• 작가 조효근 : 1976년 『월간 문학』 신인상 소설 등단.
대학에서 세계교회사 및 종교사 38년 강의. 본지 발행인.

 

 

<복음인in 들소리>는 하나님의 교회다움을 위해 진력하는 여러분의 후원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동반자로서 여러분과 동역하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함께 하겠습니다. 샬롬!

후원계좌 : 국민은행 010-9656-3375 (예금주 복음인)

저작권자 © 복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