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가 이슬람으로 옷입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페르시아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믿고 그 주변국들을 모두 살핀 자신을 과신했는데 나의 예상과 달리 금번 이란 여행을 통해서 참으로 놀라운 것을 보게 되었다.
물론 오는 8, 9월 어간에 한번더 가야하고, 더 필요할 터이니 10회를 가야할 수도 있다. 이란은 물론,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타지크스탄, 아제르바이잔, 투르크메니스탄 등도 다시 가야 한다.
왜냐하면 나는 ‘아시아 기독교 역사’를 복원하고, 지난날 우리들의 아시아 선교 선진들의 활동을 더욱 더 정밀하게 찾아볼 필요가 있다. 물론 시리아, 아라비아 메키나 메디나 또한 예외는 아니다.
내가 한 사람의 복음 전하는 자요 공부하는 학도로서 사는 날까지 게으르지 말고 찾아 세워야 할 일이 이슬람과 기독교의 만남, 그리고 기독교와 유대교의 관계 개선을 위해서 수고해야 한다. 또 세계 기독교의 균형은 유럽과 아시아의 양면조화인데 아시아 기독교가 잠들어 있다. 아시아 기독교를 살려내고, 잃어버린 역사를 복원해내야 한다.
이 일들을 풀어가자면 페르시아, 곧 이란을 공부하는 일이다. 이란은 이슬람의 존재이해를 위한 필수 지역이다. 이슬람의 출발이 아라비아였고, 무함마드 사후, 정통 칼리파시대(AD 633~661)나 다마스커스시대인 우마위야 왕조(AD 661~750)까지는 아랍인들 중심이었으나 AD 750년부터 AD 1250년대까지의 압바스 왕조는 바그다드에 중심을 둔 페르시아 문명을 먹으면서 이슬람 종교의 세계화가 이루어졌다. 다시 말하면 아랍인 중심의 시대인 AD 750년 이후에는 세계 최대의 문명지인 페르시아의 문명과 문화로 이슬람은 성장했다. 다마스커스 우마위야시대도 페르시아의 오랜 역사가 터득한 제국 운용의 조직관리, 문학, 학술, 법률 등 배워야 할 것이 좀 많은가.
본격적인 바그다드시대는 페르시아의 문화가 사실상 아랍계 이슬람을 주도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역사가 이렇게 풀려갈 경우 아랍의 이슬람 정신은 페르시아의 고유 종교인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정치 사회의 영향쯤이야 늘 있을 수 있으나 신생종교인 이슬람이 조로아스터와 부딪히면 어찌되는가?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내가 4월에 다녀온 이란에서 나는 이란인들의 표정에서 쉽게 알아낼 수 있었다. 한 주간 살펴보는 도시와 사람들의 모습에서는 전혀 ‘이슬람 냄새’가 나지 않았다. 이슬람 사람들은 대부분 마주치면 조심스러워 하고, 경계하기도 하고, 피하려 드는 경우, 또는 거부하는 표정들이 많았다. 그런데 이란 사람들은 어른, 아이, 남녀 등의 모습에서 위축된 모습이 없다.
예를 들어 그들의 사원(모스크)에 갔을 때에도 중앙아시아나 인도에서 보다 시리아 다마스커스나 테헤란 등의 도시 사원에서도 그들은 거부감이 없었다. 테헤란 팔레비 궁 근처 ‘12이맘 기념사원’에서다. 그곳은 ‘알리’ 이후 12명의 대표 이맘(쉬아파의 종교 지도자)의 기념사원이기에 경계가 있을 줄 알았으나 그 안에 들어가서 책(꾸란)을 보거나 사진촬영 또는 앉아서 이야기를 해도 눈길을 주거나 주의를 요청하는 이들이 없었다.
이스파한에서다. ‘이맘 광장’에 있는 거대한 사원에서다. 마침 금요일 예배시간인데 많은 사람들 틈에서, 또는 우리 일행이 여행자로서 이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는데도 그들은 퍽이나 관대했다.
어떤 이들은 이 글을 읽으면서 별 것 아닌 것을 과대포장 하는 것이 아닌가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중국, 인도, 중앙아시아,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등지에서도 심지어 동남아시아 모스크 들에서도 거절을 당해 본 일이 있다.
친절한 그들은 관광지에서, 또는 공원이나 유원지에서 마주쳤을 때, 먼저 말을 걸어오거나 몇 마디 친절한 대화를 통해서도 서로 공감하며 웃기도 한다.
이맘 광장에서 만난 젊은 부부, 그들 중 여자가 내게 말을 걸어온다. 남편은 옆에서 웃고 있다. 이맘 광장 이야기, 이란의 분위기, 사원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다가 저녁초대까지 해왔다. 스케줄 중복이라며 사양했더니 다시 만나자며 웃고 작별하였다.
뿐만 아니라 젊은이들, 고등학생, 중학생, 초등학생들까지도 저들은 너무나 밝은 표정들. 남녀 중^고등학생들이 어깨를 들썩이며 노래하고 웃는다. 핸드폰으로 내 모습을 찍으려 한다. 포즈를 취해 주었다. 남학생들은 달려와서 어깨동무를 하며 말을 걸어온다.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젊은 여인들, 식당에서 만나는 경우에도 눈길을 피하지 않고 적극적인 눈길을 주는데 나는 감격했다.
내 인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슬람이 왜 이렇게 자신감이 넘치나, 때문에 3, 4일 동안은 어리벙벙 이었다. 그러나 나는 알았다. 저들 이란인들의 자부심이었다. 고레스 대왕의 무덤과 그의 궁전, 아리우스 대왕, 아하수에로, 아리우스 3세 등, 그리고 에스더의 기념궁전 등을 보면서 페르시아의 자존심과 넉넉함을 보았다.
특히 고레스 대왕의 무덤에 갔을 때 들은 이야기. 정복자 알렉산더가 고레스 대왕의 무덤에 접근했더니 무덤 입구에 ‘친구여, 이제 오는가. 내가 많이 기다렸네’라는 글이 써 있었다고 전한다. 그 글을 읽은 알렉산더 대왕은 부하들이 도굴하려는 것을 막고 그 무덤을 잘 보존했다고 전한다(다른 황제들의 무덤은 대다수 도굴되었다).

쉬아파 이슬람이기 전에 페르시아 후손임의 자부심일까?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저들 이슬람의 모습이 저렇듯 쾌활할 수 없다. 페르시아는 ‘조로아스터교’라는 종교가 있다. 바벨론 포로기에 유대인들에게 영향을 끼쳤으며, 또 동일한 ‘유일신 종교’라는 이유로 고레스 대왕이 포로생활을 청산케 하고 예루살렘 귀환은 물론 느부갓네살이 파괴해 버린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짓도록 명령하고, 건축비를 모두 대주었음을 우리는 성경에서 읽는다.  그래서 고레스가 마치 메시아나 되는 듯이 칭송했던 일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여행 중 이스파한(사파위야 조의 수도)에서 만난 유흥태 선생(이스파한 대학 박사코스^건축공학 전공)이 대학원 시절에 ‘조로아스터와 이슬람’으로 학위 논문을 썼다면서 나와 대화 중 그는 조로아스터가 이슬람 옷을 입고 있는 현실이 이란의 쉬아파 이슬람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라고 했다. 나 역시 적극 공감했다.

여기서 우리는 이슬람과 기독교의 관계를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페르시아, 곧 오늘의 이란은 AD 640년 아라비아 이슬람 군대가 당시 사산조 페르시아 수도 크데시폰을 점령하면서 사실상 이슬람 점령지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라비아와 이슬람 종교 세력에게 지배를 받아 현재까지 1천4백여 년을 이슬람, 더구나 원리주의 세력의 시아파이지만 필자가 앞부분에서 말한 대로 저들 이란은 이슬람으로 변신했다기보다는 이슬람을 페르시아 정치문화와 그들의 조로아스터교가 연합하여 이슬람을 극복하고 있다는 사실 확인이다.
다시 말하면 실력이 있으면 이긴다는 사실 확인이다. 페르시아와 동로마의 중심인 콘스탄티노플을 비교해 보면 또 다른 생각이 난다. 동로마의 제국과 콘스탄티노플은 1453년 이전에는 주변에 유럽 기독교 국가들이 있었고, 동로마제국의 기독교가 1천여 년간 지배했던 곳인데 1453년 오스만 투르크 이슬람에게 점령된 후 1922년 오스만제국이 해체되기까지 거주인구의 절반이 기독교인들이었다. 그런데 제국이 해체되면서 현재 터키공화국으로 남아있는 터키 땅에는 이슬람이 99%이다. 터키는 수니파 이슬람이다.
페르시아는 AD 640년도에 이슬람에 병합되어 1천4백여 년간 이슬람 지배를 받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이란은 이슬람이라기보다는 조로아스터교의 자부심이 더하든지, 이들 두 종교의 힘을 받아서 저들의 삶의 표정이 저토록 자유로울 수 있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이슬람과 만날 수 있는 자신감을 길러야 한다.
그런데, 기독교 사람들은 이슬람을 대할 때 무슨 역병환자를 기피하듯이 하려든다. 그렇지 않을 경우는 마치 자기들이 이슬람 사람들의 운명을 책임질 ‘의무’가 아니라 ‘권리’가 있는 듯이 착각한다. 책임질 ‘의무’를 가져야 한다. 나는 백 번, 천 번, 만 번 고쳐서 생각해 보아도 이슬람은 기독교 때문에 잘못 태어나서 역사 속에서 저 고생을 한다고 생각한다. 병신 자식을 낳아놓은 병신 부모처럼.
이슬람은 기독교가 바로 태어났으면 세상에 기독교와 별도로 태어날 계획이 없는 `하나님의 자식들'이다. 기독교가 제 노릇을 바로 했다면 기독교 안에서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것으로 만족했을 터인데, 기독교가 딴 짓 하느라고 그 자신은 물론 아라비아를 책임지지 않으려하자 세상에 불가불 태어났다.
이제라도 기독교는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처럼 어울리고 함께 하면서 이슬람은 기독교의 또 다른 모습일 뿐이라고 어른스럽게 행동해야 할 것이다.
테헤란 공항에 도착은 인천공항 출발 이후 9시간 만이었다. 비행기가 착륙을 하자, 15명의 일행 중 여성이 8명이었는데 머리 스카프를 하려고 어수선했다. 준비가 안 된 이들은 수건을 두세 개씩 꺼내서 서로 묶어서 스카프를 만들고, 스웨터를 벗어서 머리와 목덜미를 가리느라고 끙끙거린다.
머리칼을 보이거나 목덜미를 보이는 경우 경찰이 검문을 하고, 어떤 경우는 초산을 뿌려버리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겁주는 이야기). 그러나 경찰에게 붙잡히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남자들이 반바지 입고 산책을 나가도 걸린다. 그럴 경우 조깅 중이라면서 계속 뛰든지 공을 하나 차면서 볼 다루는 연습이라도 해야 된다는 식. 잘나가다가 무슨 겁을 그렇게 주느냐고 할 사람들은 그곳에 한번 가 보세요.
조효근/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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