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조년 목사한남대 명예교수

고등학교를 다니고 대학에 다닐 때 부활절이 되면 이른 새벽에 넓은 공설운동장에 모여서 부활절 예배를 드렸다.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은 새벽거리에 어둑어둑하게 보이는 사람들의 그림자를 보면서 마치 옛날 예수님이 묻힌 무덤을 조심스럽게 가슴 졸이면서 찾아가는 여인들같은 맘을 가져보려고 했었다. 만나는 사람들과 조용히 ‘예수님이 부활하셨대요’라고 인사하고, 시간이 되어 색을 넣어 삶은 ‘부활달걀’을 받아먹으면서 왜 삶아서 죽은 달걀을 부활과 연결하였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지금도 삶아서 죽은 달걀이 새로 태어나야 할 생생한 생명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알지 못하면서 때때로 그런 달걀을 선물로 받기도 한다.

우리의 절기로는 봄이 되면 어김없이 부활절이 다가온다. 그때 하루, 한 시를 아주 거룩한 맘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여 스스로 먹는 것을 줄이고, 항상 하던 버릇을 약간 고쳐보기도 하고, 새로운 맘을 먹으면서 경건하게 살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나가지 않던 새벽기도에 참여하고, 먼지를 털어 성경을 읽어보고, 부활의 노래를 불러본다. 그렇게 예수께서 부활하셨다고 생각하여 본다. 그런데 그것이 나와 어떤 상관이 있다는 것인가? 그가 나를 위하여 죽고 다시 사셨다는데, 그것을 나는 진정으로 받아들이고 믿는가? 그의 부활과 나의 삶이 어떤 관계가 있다는 것인가? 그의 인격과 내 인격이 어떻게 만난다는 것인가? 조상의 제사를 드리듯이 일 년에 한 번 부활절을 경건하게 지키면 나도 부활하게 되는 것일까? 부활의 찬송가를 정성스럽게 부르면 그 경험이 나에게 올까? 그렇게 하면 거듭나게 되는 것일까? 그날이 지나가면 다시 옛날 뱉었던 것들을 하나하나 주워 먹어버리는 ‘되돌이’가 되는 것을 어떻게 할까? 일상과 떠난, 실제 내 인생 전체와 하나가 되지 않는 형식의 소식만을 듣고 마치 나도 따라서 부활했다고 믿어버린 탓일까? 일상에서 모든 내 삶이 거듭나지 않고 과연 부활의 체험이 나에게 올까?

만민 사제라더니 오로지 계급에 종속된 사제직만이 부활하고, 모두가 다 꼭같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은 죽어없어지고 살아나지 못한다. 한 어버이를 두고, 한 생명을 가졌다면서 색깔이 다르고, 눈이 다르며, 말이 다르고, 자라난 지역이 다르다고 차별하는 것이 아주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것에 의심을 던지지 못하는 형식이 곧 형제사랑일까? 사제직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아, 그런데 거기 모인 사람들이 다 정말로 부르는 소리를 듣고 온 것일까? 그냥 점수 따라서, 돈 따라서, 잠깐의 감정 따라서 쉬운 길을 찾아 나선 것일까?

한편 기고만장하게도 그때가 되면 정치계에도 발을 들여놓는 망둥이들이 날뛴다. 생활정치는 꿈도 꾸지 않고, 그때가 되면 기독정당이 필요하다는 논리를 전개하면서 못난 송아지 엉덩이에 뿔 난다는 식으로 이념도 정책도 없는 정당을 만들어 뿔 달고 나온다. 기독의 정신을 따르는 정치성이나 공동체성을 더럽히는 사이비 정치행동만이 난무한다.

그런데 그렇게 바라는 참과 사랑의 길은 왜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점점 더 중산층 이상의 교인들을 위한 목회는 왕성하고 활발한데, 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을 위한 교회는 짜부러들고 열악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할까? 조직과 행정이 밝아 몇 천 명, 몇 만 명 되는 교인들을 모이게 하고 관리하는 교회는 번창하고 비까번쩍하는 엄청난 예배당이 세워지는 데, 개척이라는 명목으로 소그룹을 지향하는 교회들은 맥이 빠지고 김이 빠진 것같이 느껴질까? 진리가 자유를 준 것이 아니라, 돈과 권력과 영예가 화려한 옷차림과 현란한 말씀으로 시대를 대신하는 것인가? 돈, 숫자, 계급은 아니라고 했는데, 왜 그것을 붙잡아야 하게 됐을까? 망상이다. 거기에 구원이 있다고, 거기에 그 님의 뜻이 있다고 믿게 하는 망상이다.

부당한 권력이나 재력에 아부하는 것을 넘어 그것에 노예가 되고 축복한다. 특히 대형교회라는 것을 이끄는 관리자들은 아주 애매모호한 입장으로, 고난을 피하는 길을 교묘하게 찾아 나간다. 그들을 하나님의 의로운 종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니고데모가 물은 진리가 무엇인가를 진정으로 묻고 답을 얻기를 기다려 보았을까? 소위 ‘성공’ 이라는 것 속에 부활의 체험이 있었을까? 그렇게 체험했다고 망상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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