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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보다 문화전달자로 인식, 지식층의 종교로 전락”<일본 기독교 선교의 역사> 출판기념회서 저자 나카무라 사토시 목사 밝혀
범영수 기자  |  dsr123@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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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0호] 승인 2016.09.13  18: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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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성사(대표 정애주)는 9월 8일 오후 7시 30분 양화진책방에서 <일본 기독교 선교의 역사>의 저자 나카무라 사토시 목사를 초청해 출판기념간담회를 개최했다. (우측부터)저자인 나카무라 사토시 목사와 번역을 맡은 박창수 목사.

일본에는 한국보다 긴 150여 년이라는 기독교의 역사와 부흥이 있었고 순교의 피 또한 다른 어느 지역 못지 않게 흩뿌려졌다. 그런데 어째서 일본은 기독교 인구 1%의 벽을 넘지 못하고 ‘선교사의 무덤’이라고 불리는 것일까? 그 해답을 일본인의 시각이자 복음선교의 역사적 측면에서 바라본 책이 한국어로 출판됐다.

홍성사(대표 정애주)는 9월 8일 오후 7시 30분 양화진책방에서 <일본기독교선교의 역사>의 저자 나카무라 사토시 목사를 초청해 출판기념간담회를 개최했다.

<일본기독교선교의역사>는 일본프로테스탄트 150주년을 기념해 출판된 일본기독교역사 서적으로 고대 일본 기독교(경교)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선교역사를 소상히 다루고 있다.

저자 나카무라 사토시 목사는 1949년, 일본의 제1차 베이비부머 세대로 16세에 예수님을 영접한 후 일생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서원했다. 그리고 21세에 일본 기독교의 역사를 연구해야겠다는 비전을 품었다. 현실의 문제를 바로 알기 위해서는 역사를 알아야 한다는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 현실의 문제는 바로 소수에 불과한 일본의 기독교이다.

나카무라 사토시 목사는 책을 저술하게 된 계기에 대해서도 “일본이 기나긴 기독교의 역사를 지니고 있음에도 어째서 1%의 벽을 넘지 못하는지에 대해 연구하고 싶었다”고 밝히며 역사 연구의 시발점을 이야기했다.

일본은 고대시대 당나라에 파견된 견당사를 통해 경교가 전래됐다는 설이 있다. 이에 마구간에서 태어난 쇼토쿠태자의 탄생설화가 예수님의 탄생에 영향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존재한다. 그리고 전국시대에는 예수회 선교사 프란시스코 자비에르가 일본에 입국해 기독교인 영주가 생겨난 적도 있다. 프로테스탄트 선교역사를 보더라도 한국보다 26년 전인 1859년에 시작됐다.

나카무라 목사는 “한국은 일본보다 기독교가 늦게 들어왔는데도 어째서 일본보다 부흥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뭐가 문제였는지 고민하다가 ‘선교’라는 부분에서 뭔가 잘못되지 않았나 생각했다”며 <일본기독교선교의역사>가 바로 그 물음의 답을 얻기 위한 연구의 산물임을 이야기했다.

일본에 신교가 들어온 것은 에도막부 말기에서 메이지로 넘어가는 변혁의 시대였다. 나카무라 목사에 의하면 당시 일본은 서양인에 대해 ‘서양문명을 소개하는 사람’, ‘개화의 역할자’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때문에 선교사들도 전도자라는 정체성보다는 서양문화를 전달하고 소개하는 사람으로 이미지가 강했다.

나카무라 목사는 “초기 선교사들 주변에 서양문물을 공부하려는 젊은 사무라이들이나 몰락한 에도막부 가문의 자손들이 모여들었다. 선교사들의 ‘영어를 통해 복음을 전한다’는 전략이 먹혀들어 교육이나 문화적인 면에서 기독교가 일본에 많은 영향을 줬지만, 지식층의 종교라는 이미지가 구축돼 일반 서민들이 가까이하기에는 힘들다는 선입견을 심어줬다”고 말했다.

선교사들의 도시중심적이자 지식인중심적인 선교형태가 지금의 1%라는 벽을 넘지 못하는 기독교의 현실을 구축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문제점은 천황제이다. 일본에서는 메이지정부가 들어서면서 천황을 중심으로 온 국민이 굳게 뭉치도록 하는 정책을 펼쳤다. 나카무라 목사는 “그래서 일본에서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국가가 내세우는 국책과 맞아떨어지지 않는 면을 갖는다”고 설명했다. 또한 일본인의 특성상 대세를 따르는 면이 강하기에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99%와는 다른 사람이 되겠다는 결단을 요구하는 어려운 결정이라는 것이다.

나카무라 목사는 “건강한 크리스천이 되려면 하나님을 앞세우는 신앙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신앙을 넓히기 위해 전도와 선교를 강조하는 것”이라며 “나는 아이들에게 어떤 일을 할 때는 남들이 하기 때문이 아니라 필요하고 옳기 때문이라면 하라고 가르친다”고 말했다.

또 하나의 일본기독교의 장애물은 외부인에 의한 부흥이었다. 일본은 1945년 패망 이후 미군이 진주했다. 당시 점령군 사령관이었던 맥아더는 일본을 기독교국가로 만들기 위해 보다 많은 선교사들이 방일해 줄 것을 교회에 요청했다. 이에 일본은 교회당마다 사람들로 가득차고 기독교인 총리 탄생은 물론 천황가 내에도 성서연구모임이 진행될 정도로 놀라운 부흥을 이뤘다. 하지만 점령군이 철수하고 나자 마치 썰물이 빠지듯 사람들은 교회를 빠져나갔다.

나카무라 목사는 “예수님의 씨 뿌리는 비유처럼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말라죽어버린 것이 당시 일본 교회의 상황이다. 일본인 자체에서 일어난 기도와 회개, 신앙의 붐이 아닌 외부의 영향에 의해 수동적으로 일어난 부흥이 이런 결과를 초래했다”며 한국의 평양대부흥운동같은 철저한 회개운동이 일본에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나카무라 목사는 그래도 150년의 일본기독교의 역사가 실패라고 평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일이다. 일본기독교에서도 1%든 그 이하든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려는 노력은 끊임없이 있어왔다”고 말했다.

나카무라 목사는 현재 일본 니가타 현에서 오래도록 사역을 해오고 있다. 이곳은 불교가 강한 지역으로 기독교인은 0.5% 이하이다.

나카무라 목사는 “사람들은 왜 다른 좋은 곳을 놔두고 이런 어려운 곳에서 사역하는지 묻는다. 나는 16세에 기독교인이 되고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께서 가라하신다면 어디든 가겠으나 용서해주신다면 제가 나고 자란 이곳에서 헌신하고 싶다고 말이다.”

일본의 대표적인 크리스천인 우찌무라 간조 또한 나카무라 목사의 사역에 강한 동기를 부여하고 있다. 우찌무라 간조는 니가타 사람들에 대해 “니가타 사람들은 마음이 강팍해 예수님을 영접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한번 받아들이면 끝까지 갈 것이다. 만약 니가타에서 부흥이 일어난다면 일본 전국에서 부흥이 일어날 것이고 현대에 마틴 루터가 나타난다면 니가타 사람일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나카무라 목사는 우찌무라 간조의 이런 발언을 소개하며 “나는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학생 중에서 일본의 부흥을 일으키는 사람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것이 내가 니가타에서 헌신하는 원동력”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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