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위드 총주교는 당 현종이 안사의 난을 당해 휘청거릴 때부터 영부주교를 도와서 당나라 기독교를 지켜 왔었다. 그리고 그는 초기 선교지도자인 알로펜의 선교방침 중에서 금기시 했던 다마스커스 파 인재들을 과감하게 등용하여 당나라 후기 경교 신학을 양성론과 단성론의 혼합성을 제시했었다.

후일, 어느 시대에 당나라 기독교 신학과 경교의 이름으로 활동했던 선교활동의 공과를 계산할 때는 기독론의 혼성시대의 인물로 다위드 총 주교(대덕)를 찾아야 할 것이다.

다위드는 양성론과 단성론으로 분리되는 로마 기독교의 대속론이 결과론에서는 같다고 보았다. 메시아 예수가 신이며 인간인 양성을 동시에 가졌다고 신앙하는 경우나 신인양성 중 하나를 선택하는 단성론 신봉자가 하나님을 만날때도 그들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 선택되는 동일한 결과지점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의 신학적 차이는 각자의 자유지만 결과물(구원받는 은혜)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선택이며 선물이니 신학을 각기 주장하면서 서로를 핍박하거나 죽이는 등의 행위는 신앙인들의 올바른 자세가 아니라는 견해다.

다위드는 “경교비”를 세우고 그 비석에 당나라 기독교의 공적과 역사기록을 남기는 모습을 지켜 보았고, 또 그 막중한 행사를 주도했으나 거기까지만 지도자의 길을 걸었고, 이후에는 수도자로 남기 위하여 서역의 초코국으로 떠났다.

다위드는 쿰바홀 주교가 닦아둔 초코의 진리 도장을 기반으로 학풍을 일으키는 수행자요 수도자로 여생을 살아가기로 했다. 그는 알로펜과 마리아 교수가 많이 흠모했던 쿠처의 키질 수도장의 고승 구마라습처럼 살아가고 싶었다.

학풍을 일으킨 학승, 특히 천축국 고대어로 된 불경을 중국어로 번역한 탁월한 그의 지식은 다위드 자신도 어느 만큼은 인정할 수 있다. 전해 오는 이야기 중 구마라습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그의 제자들과 나누던 대화가 있다.

“얘들아, 내가 번역한 불경이 정확하다면 다비식 때 내 몸이 다 타지만 그중에 내 혀는 타지 않으리니 그리 알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의 예견은 적중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얼마나 책임 있는 사람의 자신감인가.

다위드는 어릴 때 들은 고승의 덕망과 탐구력을 평생 존경해 왔다. 앞으로 남은 인생의 날 동안 성경 말씀을 중국어로 번역하는 일이나 진리를 온 몸으로 이루어 가는 예수의 제자로 부끄럽지 않게 살고 싶었다.

초코의 제자들은 다위드가 놓은 지위를 내 던지고 한 사람의 구도자 신분으로 돌아온 사실에 놀라움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맞이했다.

“총 주교님, 감읍이옵니다. 저희들을 가르치시기 위하여 화려하고 높은 지위를 사양하고 오셨으니 참으로 저희들의 복이옵니다.”

“이보시오들, 내가 먼저 일러준 대로 나를 총 주교로 호칭하지 마시오. 다위드 수도사로 부르시오 그리고 나는 여러분을 가르치러 온 것이 아니라 나이가 차고 늙은 몸으로 평소에 나의 모자란 공부를 하기 위해서 왔으니 그리 아시기 바라오.”

다위드는 그의 진심을 말해 주었다. 그리고 현직을 떠났으니 한 사람의 원로 수도자이기를 바랬다.

“말씀하신 대로 하겠나이다. 그러나 수도자로 호칭하기보다는 큰 스승님으로 부르고 싶으니 내치지 마시오소서.”

다위드는 답변 대신 빙긋이 웃어 넘겼다.

“스승님! 스승님께서 ‘대속죄 교리’ 해석을 하시는 중에 양성론과 단성론이 매듭지어지는 때, 곧 열매로 나타날 때는 둘 다 같은 것이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을 저희는 다 이해하지 못하겠나이다. 저희가 아는 대로이면 우리들의 네스토리우스 총 대주교님의 기독론마저 로마교회는 이단으로 정죄하였는데 스승님이 양성론과 단성론 교리가 그것들의 열매가 같다고 하셨으니 이는 로마교회가 알면 날벼락이 아닐는지요?”

“그래요? 그럼 내가 하나 묻지요. 여러분은 양성론은 옳고 단성론이 틀리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가요?”

듣는 이들이 서로서로 눈을 마주치기도 하고 몇 마디씩 주고받기도 하면서 망설이고만 있었다.

“왜들 답변이 없소?”

다위드는 흘러내리는 그의 양 옆머리를 두 손으로 걷어 올리면서 웃는다. 하얀 백발이 검은 머리 숱보다 더 많아서 반백이 아니라 백발노인이라 하고 싶었다. 의관을 벗어버린 맨머리의 모습이어서 한가롭고도 여유로워보였다.

“그야, 우리는 배워서 알고 있지요.”

“그렇죠. 배워서 아는 거 아닌가. 뭘, 그렇게 답변을 찾느라 애를 쓰는가요?”

초코의 사제들이 멋쩍게 웃고 있었다.

“그래, 지식은 배움에서 오는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께 배운 사람은 예수님이 하나님 자신이며 또 그 하나님이신 이가 사람으로 오신 당사자임도 우리가 하나님께 직접 배워서 아는 양성론 교리입니다. 그리고 단성론은 예수는 신이 아니며 인간, 이 둘 중 하나의 성품이라는 단성론은 사람에게 배운 교리입니다. 이 두 교리는 가르침의 주인공이 각기 신과 인간으로 나뉠 뿐입니다.”

“그렇지만….”

“아, 잠깐.”

다위드는 청년 수사인 사프르의 말을 가로막았다.

“여러분이 하고 싶은 말이 있겠죠. 하나님의 가르침과 사람의 교훈은 다르다고 말입니다. 그래요. 단성론은 사람의 이성과 철학의 방법으로 알고 있는 경험적 지식입니다. 내가 기독론 해석을 혼합식으로 했다고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 줄 압니다. 그러나 나는 사람으로부터 배운 신앙도 존중하고, 설사 그들의 지식이 틀리다 해도 그 틀린 부분까지 일단 존중하면 서로의 모자람이 충족되는 날이 온다고 믿고 싶소.”

“서로 다른 기독론 지식을 가진 자들이 나는 하나님께 배웠다고 우기면 어떻게 되나요?”

사프르 수사가 또 서둘러서 말하려다가 제지를 당한다.

“이 사람아. 자네는 조금 침착하게나. 너무 서둘며 실수가 많아지는 걸세.”

“네, 스승님.”

사프르는 얼굴에 홍조를 띠며 뒷머리를 긁는다.

“그래, 사프르 수사여. 주님이 제자들과 대화 중에 하신 말씀을 기억하는가? 나무는 그 열매로 안다는 말씀 말이지. 그래요. 그 말씀은 참으로 정확하지요. 배나무에서는 배가 열리고 감나무에서 감이 열리는 거죠. 다툴 필요 없어요. 예수님의 성격을 말하는 것인데 양성론과 단성론 신앙자의 결과가 어찌 다르지 않겠소. 흔히들 말하지요. 우리 기독교인들은 불교나 도교 신자들을 인간이 만든 종교를 흉내 내는 거라고 비웃기까지 하는데 그 같은 태도는 기독교 신자의 오만이거나 자기 과신이야. 겸허하지 않아요. 기독교 신자가 정통 기독론을 신봉한다면서 말을 앞세운다면 누가 그를 믿어주겠어요. 겸허한 덕망으로 보여주는 자세를 가져야지요. 내가 다시 더 말하지만 양성 기독론 신자는 신(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니 마치 신의 경지를 추구하는 자답게 살아가야 하는 겁니다. 그리고 단성론은 사람의 지식의 결과이니 그들은 어느날 깨닫기를 내가 신의 성품에 도달하기에는 불가능함을 깨닫게 될 거야. 깨닫는 그 순간 그를 향해 선물을 준비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겁니다.”

“아하, 그럼 최종적으로는 양성론이나 단성론의 귀결점이 같네요.”

사프르가 또 말을 서두르다가 다위드와 눈이 마주치자 오른손으로 자기 입을 틀어막고 있다.

“그래요. 해가 뜨는 곳이 동쪽이니 동쪽에서 뜨는 해를 마주보게 되고 서쪽을 고집한 자는 해를 만나기는 하지만 지는 해를 만나게 되니까 인생이 허둥지둥하겠죠.”

다위드는 말없이 듣고만 있는 초코의 제자들과 딱딱한 교리 이야기를 그만하자고 제안했다.

다위드의 방을 찾아온 제자들은 또 다른 고통을 꺼냈다. 초코에 와있는 무함마드 초기 제자들이 상당히 많은 무슬림들을 초코는 물론이고 쿠처나 허탄 등에 심어놓아서 가끔씩 논쟁이 있다고 했다.

“그건 나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어요. 그들 무슬림들은 우리 기독교 곁에서 마지막까지 함께 할 겁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우리가 지금 나누는 대화, 양성론과 단성론 이야기의 가장 큰 충돌자들이 이슬람 신자입니다. 그들은 기독교의 양성론, 곧 예수가 신이면 신이고 인간이면 인간이지 사람이 어떻게 신성과 인성을 같이 갖느냐고 그들은 출생 때부터 시비하는 종교입니다.”

“그래요. 저희들 활동에 상당한 지장을 주고 있습니다.”

“함께 지내야죠. 여러분, 우리의 하나님이 우리들 조상인 아브라함이나 특히 예수님이 신이요 인간이신 자신의 성품을 증거하시다가 목숨을 내주셨잖아요. 우리도 최종적으로는 불만 없이, 원망 없이 목숨을 내 줄 수 있는 신앙고백과 자신감이 있어야만 기독교 신자 노릇을 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

“양성론, 곧 정통 기독론의 확신을 가진 우리는 무한희생과 인내를 통해서 하나님처럼 살아가는 인간의 품위에 도전하는 자기 모습을 가져야 합니다.”

“네, 총주교님께 잘 배워서 저희도 하나님처럼 살고, 불교식으로는 생불(生佛)처럼 살아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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