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 왕 요한 <1>

우리는 이 글에서 십자군 전쟁의 비극을 볼 수 있고, 유럽 기독교와
아시아 기독교의 차이, 우월감, 열등감을 볼 수도 있고, 동서 기독교가 좀 더
긴밀한 협조와 공조를 이루었으면 늦어도 10세기 경에 중국은
기독교 왕국이 되었으며, 중앙아시아와 몽골리아 지역에는
이슬람이 끼어들지 못했으리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 야율대석 휘하 카라키타이 군의 서방이동로(김호동 교수의 <동방기독교와 동서문명>에서).

 

다음 주 본 란에 ‘사제 왕 요한’을 중심으로 한 중앙아시아. 중국, 몽골리카를 무대로 한 네스토리우스 파 대주교이면서 카라키타이(서요)의 카간(왕)인 그가 십자군 전쟁과 몽골의 징기스칸 시대를 겪으면서 아시아 기독교의 샛별로 등장하는 과정을 소설화 해 간다.

사람들은 소설 형식을 빌려 쓴 이 지면을 ‘소설이거니…’ 하면서 흘려보내지 말아주었으면 한다. ‘사제 왕 요한’은 소설 형식이면서 실화 소설, 또는 팩션이라 할 수 있다. 우선 내용 인물들 중 가공인물이 거의 없을 만큼 중앙아시아 12세기부터 14세기, 더 나아가서 17세기까지 5백여 년의 기독교 역사의 증언이다.

‘사제 왕 요한’ 이야기는 1139년 기독교 십자군이 1097년 탈환한 성지 예루살렘과 다마스커스, 안디옥, 에뎃사 등지가 이슬람 군대로부터 위협을 받을 때 이야기다. 이슬람은 자기들이 4백여 년 동안 장악했다가 빼앗긴 예루살렘을 재침략하기 위해서 공격해오고 있으나 십자군은 방어력이 부족해서 위기에 몰리고 있을 때였다.

그때, 정확하게는 AD 1145년 11월 시리아 교구의 위고 주교가 이탈리아 작은 도시인 비테르보 지역 순방 중인 교황을 찾아간다. 그는 레반트 지역의 전황 보고를 교황에게 했다. 급박한 소식을 듣고 낙담하고 있던 교항은 즉시 제2차 십자군 소집령을 내리는 등 위기 대처에 힘썼다.

그때 위고 주교가 교황에게 보고한 내용 중 ‘사제 왕 요한’ 부분은 독일 남부 바이에른 지방 프라이징 출신 역사가인 오토의 기록이다.

“…교황 성하, 페르시아와 아르메니아 저 너머 극동지방(중앙아시아를 표현한 것이다)에 요하네스(요한)라는 사제 왕이 있습니다. 그는 비록 네스토리우스 교도이기는 하지만 몇 해 전 그가 페르시아와 메데스를 지배하던 사미아르디 형제와 전쟁을 벌였습니다.

그는 왕국의 수도인 엑바타나를 공격했습니다. 이 왕들이 페르시아, 메데스, 아시리아 군대를 이끌고 그(사제 왕 요한)와 맞서 사흘 동안 싸웠는데 양측 모두 도망치지 않고 목숨을 걸고 겨뤘지만 결국은 사제 왕 요하네스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페르시아인은 처참하게 도륙되고 남은 자들은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보고한 위고 주교는 교황이 자기 귀를 의심할만한 놀라운 사실 하나를 더 밝혔다.
“…승리를 거둔 요하네스 사제 왕이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 진군했는데 티그리스 강에 도착했을 때 군대를 이끌고 강을 건널 만 한 배를 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북방으로 올라갔습니다. 그것은 겨울 추위로 인해 강이 모두 언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거기서 몇 해를 머물며 결빙되기를 기다렸으나 따뜻한 날씨 때문에 강이 얼지 않았습니다.…”

교황은 너무 기뻤다. 페르시아 저 너머에 이슬람 군대를 압도하는 기독교 왕국과 군대가 있으며, 그들은 성지 예루살렘을 보호하고, 성지를 위협하는 이슬람 세력을 몰아낼 수 있는 월등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다는 위고 주교의 보고를 듣고 만족하고 또 자신감을 얻었다.

이 이야기는 곧바로 전 유럽에 퍼져나갔다. 성지 예루살렘을 지켜내지 못하고 계속해서 싸우면서 이슬람에게 밀려 괴로움을 겪으며 자존심이 상한 기독교가 무려 3백여 년 동안 사제 왕 요한의 군대가 유럽을 구원해 줄 것이라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으며 중앙아시아로 사절단을 보내고, ‘사제 왕 요한의 편지’가 유럽에 나돌기도 하는 등 당시 로마 가톨릭 교황권은 중세기 현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사제 왕 요한’ 이야기가 꾸며낸 것이라고 하지만 아니다. 실제 이야기이다. 당시 중앙아시아와 그 일대는 27개 지역의 네스토리안 기독교의 대교구가 있었으며, 주교좌가 2백 개 처가 더 되는 광역 선교지대였다. 신자 숫자도 당시 세계기독교가 5천만여 명이었는데 7~8백만여 명의 신자를 가진 중앙아시아 기독교인 네스토리우스 파는 세계 최대의 교구였다.

그리고 이 소설을 읽는 기독교 사람들은 알아야 한다. 네스토리우스는 AD 451년 칼케돈 회의 때 누명을 벗을 기회가 있었으나 그때는 이미 네스토리우스 자신이 “나는 더 이상 사람들의 평가에 따라서 울고 웃지 않겠다. 나는 오직 주 예수의 심판만을 바라보겠다”는 문서를 남기고 그 해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마르틴 루터도 네스토리우스의 신학과 교리 사상은 우리와 다를 바 없다고 공언했다. 더구나 네스토리우스를 이단 정죄 추방한 사실상 장본인이고 그 배경 세력인 교황권이 AD 2005년 요한 바오로2세를 통해서 에베소공의회(AD 431년)의 저주를 놓고, 그때는 우리가 미숙했었다면서 화해했다. 교황 바오로2세는 네스토리우스 파와 공동교단인 앗수리아 정교회 본부에 찾아가서 총대주교인 마르 딩하 4세와 화해했다.

저 자신은 아시아 교회사 연구(공부)와 발굴 등의 과정 50여 년의 결실로 지금 아시아 교회사를 강의하고 있으며, 교회사 집필 중에 있고, ‘사제 왕 요한’을 통한 매우 중요한 중앙아시아 시대의 아시아 기독교를 전체 그리스도인들에게 선물하고 싶어서 연재를 시작하려 합니다.

우리는 이 글에서 십자군 전쟁의 비극을 볼 수 있고, 유럽 기독교와 아시아 기독교의 차이, 우월감, 열등감을 볼 수도 있고, 동서 기독교가 좀 더 긴밀한 협조와 공조를 이루었으면 늦어도 10세기 경에 중국은 기독교 왕국이 되었으며, 중앙아시아와 몽골리아 지역에는 이슬람이 끼어들지 못했으리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네스토리우스 파 기독교가 중세 유럽 교회보다 훨씬 더 우월했고, 성경적이며, 전향적이었다는 사실 확인도 할 수 있다. 이에 더하여 21세기 이후의 기독교 선교 모범을 아시아 기독교 역사에서 만날 수 있다. 로마보다 100배 1000배 이상의 순교자를 낸 아시아 각 지역의 기독교 수난사를 통해 또한 그 냄새를 맡을 수 있다.

독자 여러분의 애독을 통해서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가 갈망하는 기독교 아시아 시대의 운동력을 ‘사제 왕 요한’에서 경험하기를 바라고 애독하시면서 기도를 부탁드린다.

작가 조효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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