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파한'에서 아르메아를 만나다
 
 일주일 정도의 일정으로 페르시아(이란)를 구경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구경 ’시간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러나 먼저 페르시아의 역사를 알고 가는 경우는 다르다.
특히 기독교에게 있어서 페르시아가 어디인가를 공부해야 한다. 근래 터키와 이스라엘은 여행이 보편화 되어 있고, 또 기독교의 발상지로서의 가치를 내세우지만 페르시아 기독교를 알게 되면 지난날의 기독교를 다시 알게 되고, 앞으로의 기독교를 미리 볼 수도 있다.
우선 터키와 이란(페르시아)을 단순 비교해 보자. 터키는 로마제국, 이란은 페르시아 제국을 각기 배경으로 한다. 터키는 유럽의 출발지요 페르시아는 아시아의 본토이다. 이 대목에서 사도행전 16장, 바울의 ‘아시아 행’ 소원을 떠올려 본다. 바울은 아시아를 열어야 한다는 확신을 가졌다. 이는 오늘의 기독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기독교는 아시아에 자신이 없다. 아시아를 두려워하고 있다. 또, 이길 자신이 없다. 바울의 열정을 지켜보신 하나님께서도 그의 아시아 행 요구를 거절하심에서 깊은 뜻을 찾아내야 한다.
로마와 페르시아를 함께 얻을 수 없었던 것이 역사 기독교의 한계였다. 그것은 로마 제국 안에서의 기독교를 보면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로마 제국 안에서 기독교는 라틴파와 헬라파로 나뉘어져, 이것이 서로마와 동로마로 갈라선다. 그러니 그 실력으로 어떻게 페르시아를 얻을 수 있을까.
만약, 기독교가 로마제국과 얼마간의 거리를 두고, 로마제국과 페르시아 제국을 양 날개로 사용했더라면 오늘날 지구상에 ‘이슬람’이 등장하지 않았고, 기독교는 전체 인구의 70%는 신자로 확보했을 것이다.
뜬구름 잡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이 시간 여기서 이를 다 설명할 수 없으니 또 다른 기회에 자신감 있는 필자의 논리를 들어볼 기회가 있을 것이다.
오늘 여기에서는 페르시아의 수도 테헤란 다음으로 큰 도시 이스파한을 살펴본다. 이스파한은 사파위 왕조(AD 1501~1722) 페르시아의 수도였다.
이란은 고대 메디아 페르시아를 통일한 고레스 대왕, 페르시아 대제국의 다리우스 대왕, 그리고 헬라제국에게 패망했다가 파르티아가 기원전 250년 경 일어났고, 이어서 사산조 페르시아가(AD 227년) 일어났다. 그들은 AD 640년 아라비아 이슬람에게 복속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특히 사파위 조에 이르러서는 이슬람 2대 종파 중 ‘시아파’의 종주국으로 자리 잡는다. 이스파한에 가면 세계최대의 ‘이맘 광장’을 볼 수 있다. 거대한 광장이다.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명소이다.
이맘 광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산책을 나온다. 정한 시간마다 예배가 있고, 우리가 찾아간 금요일 정오에는 수많은 남녀들이 예배를 드리는 모습이 넉넉해 보였다. 중국 서안에 있는 ‘대 청진사’에 갔을 때는 그들의 불친절에 섭섭했으나 페르시아는 따뜻했다.
이스파한의 사람들은 매우 친절했다. 시내로 나갔더니 가족들과 나온 사람들도 다가와서 인사를 하고, 어떤 이들은 같이 사진을 찍자고 하며, 중고등학생들이 마치 외삼촌 앞에서 어리광하듯이 가까이 하는 모습에서 동질감을 느끼기도 했다. 이슬람권에 다니다보면 조금은 경계를 필요로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왜 이란의 도시들에서는 약간 음습한 무슬림들의 눈을 볼수 없고, 맑은 눈동자를 굴리면서 다가오는 페르시아인들의 모습뿐일까.
사파위 왕조의 압바스 대왕(AD 1588~1629)은 페르시아 고대 제국을 부활시켰다할만큼 제국을 크게 넓혔다. 모처럼 맞이한 페르시아의 영광이었다.
금번 여행기를 쓰면서 나는 이란 사람들의 친절, 적극성, 쾌활함, 자신감 등을 말했는데 여행의 날이 거듭되면서 내 마음에 확신처럼 다가오는 생각은 이란 사람들은 이슬람 신자이면서 고대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 신자인 점을 떠올렸다. 조로아스터가 무함마드의 옷을 입었다고 하면 이슬람에 대한 모독일 수 있겠다.
다시 내 생각은 또 한 번 발전한다. 기독교의 터전 위에 이슬람을 접목하면 어떤 환경이 될까? 조로아스터와 이슬람처럼 기독교와 이슬람도 서로를 나누어 가지면서 살 수 있지 않을까,를 궁리해 보았다.
나는 이제, 새삼스럽지도 않게 여러 ‘들소리’ 독자들이 저축을 해서 마련한 돈으로 이란 여행을 해 보았으면 한다. 금년 8, 9월 중 좋은 시간에 10일 정도의 시간으로 이란과 터키 동부(아라랏 산, 에뎃사(산 우르파), 하란)를 한바퀴 돌아보았으면 한다. 터키와 비교하면서 기독교 초기에 페르시아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앞부분에서 내가 말한대로 기독교가 로마 제국과 페르시아를 겸하여 지켜냈으면 과연 지구상에 이슬람이 등장하지 않았으며, 오늘의 기독교는 세계 인구의 70% 정도쯤 되었을까?
그렇다. 기독교가 로마에 푹 빠지지 않았으면 훨씬 어른스러운 모습을 갖게 된다. 그때 기독교 눈에는 로마 제국을 기초하여 유럽을, 페르시아를 디딤돌로 하여 중국과 인도를 경영할 수 있었다. 이 정도의 실력자는 아라비아에 소외된 자들을 보호하고 관리할 수 있었다. 왜냐, 아라비아의 주 종족들은 이스마엘과 에서의 자손들이었으니까. 이스마엘과 에서의 자식들을 뒤늦게나마 기독교가 이끌어야만 예수의 제자다운 모습이 될 것이다.
어려운 것이 아니다. 마음을 넓히면 가능한 일이었다. 어찌하여 이삭이 이스마엘을 끝까지 외면하며, 야곱이 에서를 내쫓아버린 채로 이긴 자가 될 수 있는가.
갈릴리와 사마리아를 사랑했던 예수의 마음이면 아라비아의 눈물을 씻을 수 있으며, 그만한 아량이면 아라비아 자식들을 친 형제로 예우하여 대접할 수 있다. 하나님은 아라비아에서 또 하나의 메시아를 낼 생각이 전혀 없으셨다.
이스파한에는 ‘방크’라는 이름의 교회가 있다. 아르메니안 교회이다. 아르메니아는 AD 280년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나라이다. 로마보다 먼저 기독교를 영접한 나라이다. 바로 그들의 교회가 이스파한에 있다.
교회 외벽에 프랜카드들이 걸려 있다. 터키 공화국 태동기에 아타 투르크가 터키에 있는 아르메니아인들 150만여 명을 학살했다는 사건이다. 이에 대하여 터키 정부는 부인하고 있으나, 터키 정부가 신청해 놓고 있는 유럽 유니온(EU) 가입조건에도 아르메니아인 학살의 진상을 밝혀야 한다는 조항이 있다.
방크 교회 건물 벽에 붙어 있는 아르메니아인 학살에 대한 항의문을 볼 때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당시 360만여 명 중에서 150만명을 살해했다는 것은 ‘전멸’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만큼 충격적인 사건이다.
이스파한에 아르메니아인들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압바스 대왕 치세때 이스파한을 제국의 수도로 건설하면서 부족한 노동력 보충을 위해 받아들인 노동자들이었다. 지난 1979년 이전까지는 20만여 명이 거주했으나 현재는 5만여 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이스파한에 살고 있다.
조효근/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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