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로펜의 아시아(AD 610~1625) 천년여행 [ 212 ] / 사제 왕 요한 ⑩

▲ 중국 란주의 한 동굴. 여기서도 사람이 살았다.

을지고는 야율 대석과 마주앉았다. 저녁시간 아내인 나비소와 모처럼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카간(황제)이 부른 것이다. 퇴청 후 한 번도 별도로 부른 일이 없었던 황제가 자기를 부르고 있으니 걱정스럽게 달려온 을지고는 가슴만 두근두근 말을 꺼내지 못했다.

“을지 장군! 모처럼 나비소와 쉬는 시간일 터인데 늦은 밤에 내가 함께 술 한 잔 하고 싶어서 불렀소. 괜찮은가?”

야율 대석은 술 한 잔 하자고 부하를 불렀는데 그 얼굴에 근심스런 흔적인 있거나 별도의 고민이 있어 보이지 않았다.

“폐하, 말씀을 거두소서. 황공하옵니다.”
“그럼 됐어요. 거기 누구 없느냐?”

두 여인이 조촐한 상을 들고 들어왔다.
술상을 바라보던 을지고가 웃는다. 술상에는 술이 없고 술안주도 특별히 보이지 않았다. 덜렁 감주 잔 두 개가 덩그러니 얹혀있었다. 잔을 들여다보니 잔 안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을지고는 등골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림을 느꼈다. 그는 몸자세를 다시 가다듬으면서도 먼저 말을 꺼낼 수도 없었다.

“을지 장군, 오늘 십자군 정보를 내게 보고할 때 장군의 얼굴에 고민이 담겨 있던데 그게 무엇인지 짐에게 말해 줄 수 있는가?”
“폐하, 아뢰겠나이다.”

을지고는 대답을 하고도 선뜻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는 눈을 내리감고 잠시 생각에 잠긴다. 네스토리우스 파 기독교를 이단 집단이라고 서슴없이 말했던 십자군 진영의 분위기에 그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유럽 기독교가 네스토리우스 파 아시아 교회의 신앙을 깔보고 있음을 들어서 알기는 하지만 그건 한 시대 훨씬 전의 감정일 뿐 지금은 세상이 달라졌다고 확신하는 그는 오늘 받은 충격을 마음에 간직하고 있었다.

“이 사람아!”
야율 대석은 을지고를 재촉했다.

“네, 폐하. 소인의 판단으로는 십자군 진영에서 우리에게 도움을 받지 않아도 이슬람 군을 격파할 수 있나봅니다.”
“아니야. 을지 장군이 내게 숨기는 것이 있는 거야.”

을지고는 앉은걸음으로 한 발 뒤로 물러서면서,
“폐하, 소인을 죽여주소서.”
“어허! 편히 말하게. 무슨 말을 해도 괜찮아요.”
야율 대석은 크게 웃어 을지고의 마음을 안심시켰다.
“네, 폐하. 말씀 다 올리옵니다.”

을지고는 십자군 부대인 유럽 교황 군이 네스토리우스 콘스탄티노플 총주교가 유럽 기독교의 싸움판에서 이단으로 몰려 추방된 이후 아직도 그들은 정통과 이단의 벽을 허물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또 셀주크 산자르 술탄의 패전 후 십자군과 셀주크 군을 괴멸시킨 후 우리와 연합작전을 생각했던 그들의 정보부대가 이단자들과 연합군을 만들거나 도움을 받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던 대담 내용을 야율 대석에게 다 말했다. 을지고의 말을 다 들은 카간은 말했다.

“을지 장군, 그 정도 내용 때문에 고민하다니 당신답지 않군.”
야율 대석은 이제야 술 한 잔이 생각났다. 그러나 을지고가 말을 잃고 있으니 술보다 더 좋은 것을 주고 싶었다.

“을지 장군. 유럽은 어리석어. 앞으로 유럽 기독교는 이슬람 십자군에게 크게 망신을 당할 거야. 그리고 그들은 아시아의 거대하고 다양한 세계 앞에서 많이 당황하게 된다고 보거든. 내가 감히 신앙을 말할 만큼 실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신자입네 할 수 없는 사람이지만 그러나 말일세, 우리 집안은 거란(요제국)을 창건하기 전 당 제국 때부터 가문 자체가 네스토리우스 교회당이었데요. 당나라 때 당태종의 선생으로 존경받았던 알로펜 총주교를 우리 집안에서 직접 모시고 예수교에 대한 신앙과 신학을 배웠고, 우리 집안 대대로 사제(司祭)나 수도사가 수백 년 동안 많이 나왔어요. 알겠는가?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나의 신앙고백 한마디 들어보려나?”

“네, 폐하. 소인이 귀를 모두 열고 듣사옵니다.”
“그래, 고맙소. 나는 우리 요 제국이 금나라에게 제국을 빼앗기고 저 북방 초원을 떠돌 때에 네스토리우스 주교단을 만났어요. 그들은 내게 전쟁 따위는 그만두고 교단으로 들어와서 사제의 길을 가라고 하더군. 그런데 그 무렵 내 신앙 안에 반란이 일어났어요. 내가 믿고 있는 기독교도 좋지만 북방인들의 텡그리(Tengrism, 샤먼) 신이 더 좋더라고요.”

황제는 이 대목에서 말을 멈추고 을지고의 표정을 살핀다.
“폐하, 하명하소서. 소인이 듣고 있나이다.”

“응, 그래. 그럼…. 텡그리 신앙은 관용이다. 신(神)은 영원히 하나님 한 분이시고, 신이 오직 한 분이기에 그분은 약간씩 다르거나 유사한 신앙(종교를 말함)끼리는 늘 관대함으로 상대를 맞이해야 한다고 하지. 그래서 나는 조상 때부터 기독교지만 기독교만 고집하지 않고 특히 내가 왕인데 내 백성들의 신앙을 편 가르기 식으로 대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지금 우리 카라 키타이(흑 거란) 안에 있는 기독교, 불교, 이슬람, 마니교, 조로아스터교 등의 신앙을 관용의 뜻으로 대하는 겁니다.”

“네, 폐하. 알고 있습니다. 저도 폐하의 가문 만큼은 아니어도 조상 대대로 기독교 신앙을 지켜왔나이다. 저는 폐하의 하늘같은 너그러움을 흉내 낼 수는 없으나 내 신앙은 마치 내가 내 아내나 부모를 지키듯이 지키되 타인들의 모범적 신앙도 존중하고 있나이다.”

“그래 맞아. 바로 그걸세. 그런데 십자군 전쟁을 일으킨 유럽 기독교는 실수한 거야. 그들이 먼저 이슬람을 침공한 일이 실수한 것이고, 다음은 우리 아시아 땅에서 어느 나라 군이 십자군을 지원하러 갈 만큼 여유가 있을지는 모르나 우리더러 이단자들의 기독교라고 했다니 그들은 앞으로 큰 낭패를 보게 될 거야.”

을지고는 황제의 현명한 현실 판단에 우울하게 했던 오후 시간의 근심을 모두 털게 되었다.
황제와 을지고의 신앙고백과 유쾌한 웃음소리를 듣고 있던 환관장 지성춘이 술상을 가져왔다.

“페하. 이 밤에는 소인이 이 꽃주 한 잔 폐하의 장쾌한 웃음 앞에 올리고 싶나이다.”
“그래, 그래. 그대는 눈치가 빨라서 언제나 나를 기쁘게 하지. 을지 장군께서도 한 잔 받으시오.”
“네, 폐하.”

며칠 후 케레이트족 군부에서 사절단이 다시 왔다. 케레이트 부족이면 몽골 초원에서 최고의 실력을 뽐내는 부족이다. 그런데 그들 부족에서는 무슨 일이 급했을까? 케레이트 사절단은 군부에서 온 사신이 아니고 종교부서에서 왔다. 케레이트는 전 부족이 모두 기독교의 네스토리우스 파이다. 나이만 부족과 경쟁하고 있을 뿐 크고 작은 북방 부족들 중 케레이트족은 세력으로는 물론 주요 국가들과 동맹 또는 연합국가를 만들려고 하는 큰 꿈을 가진 나라이다.

종교 부분 책임자는 을지고의 아내인 나비소였다. 초원의 부족들은 남자 여자의 구분이 없다. 여자가 남성으로 구성된 군부대를 지휘하기도 하고, 개개인에 따라서 다르기는 해도 본인의 역량이 있으면 지도자로 등장했다.

케레이트족의 기독교 사절단 책임자는 인도계 인물로 수르마와 디모데였다. 그들은 사제(목사)로서 업무 차 메르브(네스토리우스 교단 중앙아시아 본부)에 가는 길에 카라 키타이에 들른 것이다.

“사제님들 어서 오세요. 저는 나비소입니다. 군에서는 2군 사령부 부장관으로 병사들의 정신건강과 신앙지도를 합니다. 야율 카간께서 직접 지명하신 직책입니다. 혹시 제가 사제님들을 모시는 것이 불편하시면….”

“아, 아닙니다. 저희들은 말씀드린 대로 사제 직분자로서 나비소 장군과 마주 대화하려니 오히려 조심스럽습니다. 더구나 부군께서는 카라 키타이국의 문무를 총괄하시는 큰 어른이신지라 저희는 과분하고 결례를 행하면 어찌하나 하고 전전긍긍이옵니다.”

“아니오. 걱정 마세요. 저나 제 남편은 사제는 아니지만 신학을 함께 공부했고 네스토리우스 총대주교나 중앙아시아 기독교 선구자이신 알로펜 총주교님을 자나 깨나 흠모하는 그 어른들의 제자들입니다. 메르브와 여러분의 카라코룸의 중간지인 여기 발라사군에서 여독도 푸시고 저희를 지도해 주시기도 하면 저희는 대 환영이겠습니다.”

“아, 네. 광영입니다. 귀하신 부장관님.”

“좋습니다. 저희는 여러분의 케레이트국을 좋아해요. 저희의 모범으로 삼을 수 있게 해 주시면 영광이겠어요. 특히 기독교 신자들을 어떻게 하면 용맹하고 또 유능한 인재로 길러낼 수 있을까, 에 대한 경험과 지혜를 저희에게 나누어 주셨으면 합니다.”

“부럽습니다. 군웅이 할거하는 광활한 초원지대이니 용맹한 인물이 필요하고, 또 비슷비슷한 국가들의 경쟁장이니 용맹과 지략이나 지혜가 탁월한 유능한 인재를 찾는다 하셨으니 우리가 지금 이 시간 나비소 부장관님으로부터 중요한 한수를 배웠나이다.”

작가 조효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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