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500주년, 루터가 제창한 ‘만인제사장(사제, 목회자)’ 어떻게 하면 실현할 수 있을까?


“목사님이 계신데, 
목사님이 기도해 주셔야 더 좋죠”, 
“제가 하는 기도보다 목사님이 해주시면 
하나님께서 더 잘 들어주시지 않겠어요.”

목사와 신자가 나누는 
이런 대화를 가끔 듣는다. 
인사치레거니 생각했지만 목회자나 신자 모두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일까. 

 

▲ 구원의 길, 구도자의 길은 쉽지 않다.

올해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더 주목받고 있는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모든 직업을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했다. 성직을 수행하는 것만 소명이라고 여겨졌던 것에서, 성직은 거룩하고 일반 직업을 세속적으로 받아들였지만 루터 이후 기독교인들은 모든 직업을 똑같이 소명이라 여기는 길을 열었다. 야채를 파는 상인이나 강단에서 메시지를 선포하는 목회자 모두 똑같이 소명 받은 하나님의 생명인 것이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아직 요원한 모습이다. 여전히 거룩하고 세속적인 것의 경계를 허물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런 점에서 루터는 ‘삶의 신학적’ 측면에서 또 다른 ‘보이지 않는 길’을 제시한 것이다.

 

●● 다른 길을 낸 ‘만인제사장’

루터가 주창한 것 중 잘 알려지지 않았고, 여전히 활성화되지 않은 것이 ‘만인제사장(사제, 목회자)’이다. 신부였던 루터가 소속한 당시 로마 가톨릭에서는 사제만 미사를 집전하고 설교할 수 있었다. 사제가 하나님과 평신도 사이를 중재한다는 뜻이다. 이런 관점은 오늘의 가톨릭교회에도 여전하다. 구약의 ‘제사장’이 있어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대리했던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사제와 평신도의 질적인 구별을 거부했다. 모든 신자는 하나님께 직접 기도를 드릴 수 있고, 용서도 직접 받을 수 있으며, 당연히 직접 예배도 드릴 수 있는 것이다.

루터의 주창을 토대로 정리해보면 그리스도인들이 선택한 직업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소명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신자는 하나님께로 가는 길에 목회자가 없어도 얼마든지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고, 말씀을 읽고 성령의 도움으로 그것에 순종해나갈 수 있는 존재다.

신자 개개인은 그렇게 개인이 하나님과 일대일로 사귐을 갖고 긴밀한 관계를 형성해 나가는 존재인 것이다. 교회에 머물 때만, 기도할 때만 하나님과 함께 사는 존재가 아니라 호흡하는 모든 순간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임마누엘’의 은총을 받은 생명이다.

그런 개개인이 공동체적 모습으로 함께 모여 예배하고 교제를 나누는 곳이 교회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교회의 가장 최소 단위는 개인인 것이다. 루터가 주창한 ‘만인제사장’이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 ‘나’, ‘우리’가 교회라고? 

하나님과 함께 사는, 하나님의 은총에 화답한 ‘나’를 ‘신자’라고 규정지을 수 있을 때 ‘하나님의 몸’이 교회라고 한 그 최소 단위의 신자가 될 수 있다. 

한국교회 800만 신자 개개인이 “내가 교회구나”라는 인식이 자리매김 한다면 어떤 모습일까? 상상만 해도 너무 황홀하지 않을까. 

초대교회처럼 내 것을 내 것이라고만 여기지 않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두를 살피고 돌아보며 자신의 것을 적극적으로 내어준다면 교회는 싸울 틈도, 거짓된 것이 발붙일 틈도 없지 않을까?

그러나 모든 신자가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찬양을 드리지만 그런 지경을 향해 나아가기에는 한국교회는 수동적인 모습이 많다. 어린아이와 같은 초등학교 시절의 모습을 뛰어넘기 어려워 보인다. 여전히 부모의 보살핌이 있어야 하는 어린아이처럼 신자들은 교회나 목회자에게 ‘신자’ 정체성의 상당 부분을 의존한다.

그런 의미에서 신자 개개인은 ‘나’의 현재 모습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적게 잡아서 60% 이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지 10년 이상 됐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여전히 교회나 목회자의 울타리가 없으면 신앙생활이 불편하고 불안하다고 하면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 성숙한 교회여야 가능한 일

스스로 자신의 신앙을 일으켜 세우고, 주체적으로 교회와 사회 속에서 주님의 ‘대리인’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로 책임있는 삶을 살아낼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20년, 30년이 됐어도 여전히 신앙을 ‘보이는’ 사람에게 의존해서야 되겠는가.

이렇게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간다면 교회에서는 비본질적인 것을 가지고 시간을 낭비하거나 다투지 않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목회자와 장로의 갈등, 목회자도 일을 가질 수 있는지 없는지, 세습이 옳은지 그른지, 신자가 설교할 수 있는지 없는지…. 

성숙한 신앙인의 교회로 형성된다면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가 꼭 아니어도 신자가 메시지를 선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목회자도 자신의 육신을 위해 일을 갖고 ‘또 한 사람의 신자’의 위치에서 교회 일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흔히 사용하는 ‘시스템’이라는 말은 공장에서 물건을 정확하게 만들어내고 포장하고 판매하는 등 상업적인 부분에서 나온 것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한국교회 세계적인 규모의 대형교회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교회들이 대부분 ‘시스템’이 작동되지 않으면 규모가 크기 때문에 운영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교회는 ‘유기체적 교회’로서의 생명력이 지나치게 약화되어 교회의 모습을 잃게 된다고 우려한다. 유기체적 존재로 돌아가려면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가 되어 자립적으로 설 수 있어야 하는데, 시스템의 방식으로는 이뤄지기 힘든 구조라는 지적이 많다.

몇몇 목회자들은 인터뷰를 해보니 10년 전에는 “만인제사장”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어보였는데, “한국교회도 이제 그런 모색을 할 때가 된 것 같다”고 말했으며, “지금도 여기저기서 작은 시도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반응이었다.

또 “한국교회 70%가 미자립이라는 통계들이 많은데 이것을 비관적으로만 보지 말고 ‘신자 한 사람=교회’라는 등식을 만들어내기 위해, 목회자와 온 성도가 성숙된 신자로 가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다면 ‘아름다운 주님의 교회들’이 되지 않을까”라는 반응이었다. “큰 규모의 교회가 전혀 부럽지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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