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 명달교회, 전라도 구자도교회를 22년째 섬기는 낙도·오지 선교자 김영복 목사

신학교 시절 낙도 오지 단기선교 이후 지금까지 
척박한 땅 찾아 복음 전해

온 가족 몸 누일 곳 변변치 않으면서도 
양평, 구자도 양쪽 사역 감당…
주님의 인도하심과 가족의 전적인 협조 있어 가능

빚 해결위해 구자도에 온 사람들, 
그들에게 다가가 복음 전하는 일 쉽지 않지만 
이젠 주변 섬에서도 부러워해

 

▲ 전라도 구자도 섬에 위치한 구자도교회(왼쪽)와 경기도 양평 명달리에 위치한 명달교회.
▲ 김영복 목사와 안명옥 사모

경기도 양평과 전라남도 남단의 구자도 등 2개 교회에서 목회하고 계신다는 제보를 받은 건 몇 달 전이다. 교회가 없는 곳을 찾아 목회하신단다. 양평 명달리에서는 컨테이너 예배당, 항금리에서는 창고교회에서 목회한다는 것은 제보자가  알려 준 된 정보다. 그러나 편집회의에서는 왜 그 먼 곳까지 왕래해야 하느냐며 난색이었지만 “사람은 있는데, 아무도 그들의 영혼을 돌보지 않으니 가지 않을 수 없다”는 이유를 듣고서야 회의에서 통과됐다.

네비게이션에 주소를 치고 명달리에 도착해 열심히 컨테이너교회인 명달교회를 찾았다. “도착했습니다”라고 네비가 알려준 곳은 공기 좋은 곳에 위치한 산 아래 3층짜리 신축 건물이었다. 그때서야 둘러보니 왼편에 명달교회 글씨가 보였고, 멀리서 바라보니 십가가도 보였다. 어찌 된 일인가, 어떻게 컨테이너교회가 이렇게 버젓한 예쁜 건물의 예배당으로 바뀐 것인가. 짙은 분홍 셔츠를 입은 목사님이 문 앞에 나와 계셨다.

1층은 예배당, 2층은 사택, 3층은 나눔 방이라며 안내하는 김영복 목사(66세)에게 컨테이너 건물은 어디 갔느냐고 물으니 “하나님의 은혜”로 예배당 신축할 수 있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설명한다.

 

●● 양평 20~40킬로 산 넘어 다니며 전도

김영복 목사는 신학교 시절 강원도 낙도 오지에 들어가서 단기 선교를 한 것이 인연이 되어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다.

지금 목회하고 있는 양평의 명달리는 1996년 등산복을 입고 첫 발을 떼어 복음을 전할 때만 해도 비포장 도로, 오지였다. ‘명달리 묵은 땅을 기경하라’는 하나님 명령에 순종한 그의 전도행전의 시작이었다. 

명달리에는 믿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불모지 땅이었다. 예배당도, 헌금도, 신자도 없고 모두가 핍박하는 사람뿐이었다. 김 목사는 신복리에 조그마한 방을 하나 마련하고 아침이면 해발 800m의 중미산을 넘어 명달리로 전도하러 떠났다. 이렇게 산을 넘어야 하니 20~40km 걷는 것은 예삿일이었다. 1988년 사고로 장애자가 되어 발과 다리가 많이 틀어져 제대로 걸을 수 없는 다리로 그는 그렇게 걷고 또 걸었다. 아침 해가 뜰 때 떠나서 한밤중에 돌아오는 코스, 산 속 어둠과의 혈투는 주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힘든 일이었다. 중미산 속에 거주하는 한 가정에 복음 전하는 것 또한 그의 사명이었다.

복음을 전할라 치면 ‘에이~’ 하며 아예 들으려 하지도 않으려는 주민들이 태반이었지만 김 목사는 날마다 눈 뜨면 그들이 있는 곳을 찾아가 복음을 전했다. 그렇게 몇 년, 예배당 건물도 없이 전도하는 김 목사에게 “우리 동네에 교회가 어디 있어?”라고 주민이 고함을 친다. 김 목사가 ‘명달교회’ 글자 새긴 모자를 쓰고 다니는 것을 보고 하는 소리다.

김 목사는 그들에게  ‘교회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것을 설명해주었다. 건물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사람이 곧 교회임을…. 그날 이후로 동네 사람들에게는 우리가 예배하는 곳이 교회로 인식됐다. 학교 운동장, 계곡, 처마 밑 등 어디든 예배드리는 곳을 교회라 부르면서 명달교회는 ‘움직이는 교회’로 알려졌다.

전교생이 총 7명인 초등학교에서 아이들과 교실에서 예배드리는 것을 보고 주민 중에서 문광부에 진정서를 내서, 김 목사는 아이들과 학교 운동장에서 예배를 드려야만 했다. 그렇게 3천km 걸어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자 하나님은 ‘컨테이너’ 예배당을 세워주셨다. 

그러면서 또 다른 곳, 예수 믿는 이 하나도 없는 마을이었다. 서울서 40km밖에 떨어지지 않았는데, 우상과 무당이 판을 치고 있었다. 김 목사는 자존심이 상했다. 복음이 이곳에도 전해져야 되지 않겠나!! 그 마을에 창고를 빌려서 예배를 드렸다. ‘하이교회’는 그렇게 해서 태동됐다. 2003년부터 2015년 3월까지 12년간 그 마을의 교회였다. 그러나 땅 주인이 바뀌면서 그나마 있었던 곳에서도 쫓겨나게 되었다.

“그때 아내가 한마디 하더군요. 20여년 간 낙도·오지 선교를 했는데, 머물 곳 한 칸이 없네!”

 

▲ 구자도교회 성도들. 추운 겨울인데도 대부분 맨발이다.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하다.


●● 차용한 빚 해결 위해 찾은 척박한 땅 구자도 섬, 그 곳에도 복음이 필요

    
강원도와 인접해 있는 양평 지역이어서 겨울이면 영하 20도가 넘는다. 김 목사는 아내, 자녀 둘과 함께 바람이 불면 앙상하게 들어 난 수수깡이 흙벽이 춤을 추는 곳에 살면서도 복음의 불모지 명달교회, 구자도교회 사역을 중단하지 않았다.

구자도에 들어온 그들이 차용한 빚을 갚는 유일한 길은 몸으로 때우는 것이다. 노동을 통해 빚을 갚기 위해 죽어라 일을 한다. 구자도는 망망대해에 외롭게 홀로 서 있는 점보다도 적은 섬이다 문화 해택이 전혀 없는 척박한 섬이다. 

이곳에서 생활을 한다는 것은 더 이상 내려 갈 곳이 없는 바닥에서 거친 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이 섬에는 물, 전기, 배가 없다. 병원이나 약국, 마트 등 일상의 사람이 살기 위해 필요로 하는 것들이 없다. 더구나 물이 귀해 빨래하기가 쉽지않아 양말이나 옷도 제대로 입기가 힘들다. 그래서 추운 겨울에도 맨발로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거기다 정기 항로가 없고, 출입이 자유롭지 않다. 김 목사도 섬에 들어갈 때는 낚시 배를 빌려서 타고 간다.  

김영복 목사는 2주에 한번 이곳에 내려가 예배를 드린다. 월요일 아침에 출발해도 그곳에 가면 저녁, 함께 예배를 드리고 화요일에 올라온다. 특별한 경우 더 머무른다. 한 번 오고 가는 시간, 비용이 만만치 않다. 구자도 인근 도시 많은 교회가 있지만 낙도 오지 선교는 3D 업종이라 관심이 없다 

처음 이곳에 가서 김 목사는 그들의 일을 도와주면서 복음을 전했다. 일꾼들의 구두를 닦고, 청소도 해주니 그들의 마음이 조금씩 열렸다. 예배 장소가 없으니 일꾼들 숙소에 가서 복음을 전했다.

그런 것을 안타깝게 여긴 이장의 도움으로 예배처소를 겨우 마련했다. 그런데 2011년 무이파 태풍으로 구자도교회가 완전히 망가졌다. 태풍의 위력이 얼마나 센지 경운기가 새처럼 날아가 바다에 빠질 지경이었다. 선착장, 주변의 양식장도 완전히 망가졌다. 풍비박산이었다.

낙도선교회에서 국내 교회 2천 곳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딱 한 군데서 30만원의 화답이 전부였다. 김 목사는 메마른 사랑에 가슴이 아팠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길, 든든한 교회들이 많으니 구자도 예배당 회생은 문제없을 것이라고 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때 당시 어느 교회는 체육대회에 1억을 썼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한국교회가 이렇게 냉랭하다는 것, 구자도 사람들이 비웃는 듯 했다.

그러나 그렇게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 가족과 낙도 단기 사역청년들과 함께 임시 수리해 예배 처소를 만들었으나 바닷물로 인해 부식이 심해 더 이상 지탱하기 힘들어 기도하는 가운데 김포와 밀양에 있는 교회의 도움으로 3~4일만에 예배당을 재건할 수 있었다. 아무도 관심 갖지 않을 때 김 목사는 그들의 영혼을 바라보고 사역했다. 보통 이곳의 사람들은 1~2년 머물다 빚 다 갚고 나가는데, 구자도교회는 이제까지 220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놀라운 역사다. 

청년들이 단기선교하러 구자도를 방문하는데, 그들의 한결같은 반응은 “공부 열심히 해야겠다,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다짐이다. 신자들이 구자도에 오면 힘겹고 암울한 그곳이 환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복음이 구자도에 들어오자 구타나 착취 등이 사라졌다. 

주변의 섬에서는 이 사역을 전해 듣고 “목사님 같은 분 보내달라”고 요청하는데, 그것을 들어줄 수 없는 게 안타깝다.

 

●● 사역의 원동력 “기도 노트”

기자가 방문한 양평의 명달교회 예배당에는 매일 암 환자 10여 명이 예배를 드린다. 1시간 이상 찬송 부르고, 기도하고, 말씀을 듣는다. 친환경의 편백나무로 내벽을 썼고, 영화관처럼 편안한 의자, 앞에 영상을 볼 수 있는 큰 화면은 아픈 이들을 위한 배려다.

“이곳 예배당에 와서만큼은 고통을 잊으셨으면 하는 마음에서지요.”

김 목사는 최선을 다해 말씀을 준비한다. 비록 고통 속에 있지만 하나님과 늘 함께 하는 삶, 그 속에서 느끼는 기쁨을 맛보길 원한다. 설교도 화면에 적합한 영상을 띄워 감동을 더하게 한다. 

컨테이너 예배당에서 이렇게 버젓한 건물로 세워지는 데는 역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설명할 길이 없다.    

김 목사 사역 전체가 그렇듯 2016년 4월 1일 기공예배를 드리기 전부터 김 목사에게는 기도밖에 없었다. 교회를 세울 수 있었던 원동력은 “기도 노트”다. 흩어진 은혜를 모으면 능력이 된다는 것을 그는 20여 년의 사역을 통해 체감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많이 주시는데, 우리는 그냥 스쳐 지나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김 목사는 알았다. 기도 노트로 그 은혜를 모으고 있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서 이 노트를 보면 하나님에 대한 확신과 신뢰, 용기가 생깁니다. 흩어진 은혜를 모으면 능력이 되는데, 이것을 통해 하나님의 기적을 보게 됩니다. 기적은 기적을 믿는 사람에게 다가오니까요.”

교회를 짓는다고 했을 때 동네 사람들, 지인들은 비웃거나 의구심으로 바라봤다. 돈 없는 것 뻔히 알고 있는데, 무슨 돈으로 어떻게 예배당을 짓는다는 것이냐는 비웃음도 있었다. 그런데 4개월만에 예배당이 완성되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이 변화되기 시작했다. 믿음이 연약한 지인들은 물론 동네 사람들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목도했다.

김 목사는 건축하면서 빚내지 않는다는 철칙을 세웠다. 돈이 없으면 짓다가 멈추겠다고 아예 건축업자에게 선언했다. 기도했다. 하나님께 매달릴 방법밖에는 없었다.

김영복 목사의 기도는 결이 달라보인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 기도하며 맡기고, 대신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열심히 한다. 신학교 때 일이다. 성지순례 가자고 했지만 그때 역시 갈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런데 가고 싶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김 목사는 성지순례 때의 스케줄이 잡혀있는 전도·사역 등을 앞당겨서 모두 소화해냈다. 하나님은 응답하셨다. 

“내가 기도한 것을 이뤄주지 않는다는 것을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내가 죽어서도 하나님은 응답하시는 분이시니까요. 스데반이 죽었지만 사울이 변화되어 복음의 사도가 된 것을 봐도 알 수 있지요.”

기도는 인내, 끈기다.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 하나님은 지금 당장도 해주실 수 있지만 어떤 기도는 오래 걸릴 수 있다. 바보같이 기도로 승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그는 오랜 체득을 통해 습관처럼 알고 있었다.

 
●● 온 가족의 합창 “쌀이다”

자신의 목회를 ‘나그네 목회, 생명의 몸부림 목회’라고 설명하는 김 목사는 이렇게 어려움 속에 인내하며 나아올 수 있는 또 하나의 힘은 아내, 딸, 아들의 전적인 후원이 있었기 때문임을 잊지 않았다.

‘마지막 쌀’을 풀 때면 모든 식구들이 비상기도를 했고, 그때마다 한 번도 채워주지 않으신 적이 없는 하나님을 김 목사 가족은 몸소 체험했다. 하나님이 누군가를 통해 다음 끼니의 쌀을 보내주실 때면 온 식구는 “쌀이다” 하고 환호했다. 자신들이 중심이 아니라 늘 하나님의 계획 속에 순종하며 나가길 원하는 부모의 선택이 하늘의 소원에 응답하는 것임을 자식들은 이렇게 삶 속에서 알아갔다.

그 모진 환경 속에서도 딸은 목회자 사모가 되어 사역하고 있고, 아들은 서울대대학원을 졸업해 연구원으로 일할 정도로 든든히 자리매김하고 있다. 고통스러움을 함께 견디며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자녀들은 김 목사를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목사”로 여긴다.

김영복 목사는 새벽마다 항상 자신에게 물어본다. “십자가의 길을 가는 당신은 누구입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까.” 이렇듯 날마다 자신을 들여다보지 않으면 힘들고 어려운 사역에서 넘어지기 쉬운 것을 알기 때문이다.

2015년 명달교회 예배당을 설계하는 중에 출간한 <바닥에서 하늘보기>(창조와지식 펴냄) 머리말에는 이런 말이 있다. 

“나는 질그릇 덤으로 사는 인생, 내놓고 자랑할 것 없는 연약한 존재, 그곳에 하나님의 보배를 채우지 않으면 형상의 그림자도 찾지 못하는 부서진 인생이다. 그래서 질그릇 속의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가 아니다. 낙도와 오지에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생명적 몸부림을 치는 한 연약한 종을 지켜 보호 인도해 가는 피난처 되시는 그분의 스토리다.”

양평 명달교회와 구자도교회 신자들은 합해서 30명 내외 정도다. 그러나 그는 혼신을 다해 아무도 돌보지 않는 그들을 향해 오늘도 생명의 양식을 전한다.

▲ 사역의 원동력인 기도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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