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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무신론에 포위된 기독교제3종교개혁 부르며_ 7 니체, 유럽 기독교의 죽음을 말하다
조효근/본지 발행인  |  dsr123@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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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9호] 승인 2018.03.07  14:2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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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이란 마음의 상태다.  현세에, 또는 사후에 오는 어떤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기다림의 대상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제도 없고
내일도 없다.  그것은 천년 후에 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마음속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 20세기 일본 문학 최고의 걸작인 엔도 슈사쿠의 ‘침묵’을 원작으로 한 영화 ‘사일런스’의 한 장면.

프로테스탄트 기독교는 지나온 500년간의 성공과 실패가 있었다면 그 원인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 “이신칭의” 법칙의 찬란한 승리는 초대교회 이후 가장 명쾌한 기독교의 성격을 바로 세웠다. 이 점에 대해서는 백번 강조해도 무리하다 할 수 없다. 그러나 기독교는 16세기 당대로부터 폭력과 탐욕, 성급함 등의 사단의 속성에 말려들어 계몽기의 검증과정에서 스스로의 조건으로 무신론, 반(反)기독교와 더 나아가서 적그리스도 세력인 자들까지 기독교의 현실로 불러들였다.

드디어, 사단의 세력에게 포위된 오늘의 기독교는 지난 500년간의 개혁사를 재학습하면서 어느 대목에서 기독교의 기본을 감소시켜버렸나 하는 확인이 필요하다.

16세기 종교개혁은 신·구 기독교 간에 중간 접촉점이 나온 것도 아니고, 어느 쪽으로 기울지도 않아서 가톨릭이나 프로테스탄트는 유럽이라는 한 지역에서 본격 세계화 시대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갈 에너지를 확보하지 못했다.

기독교가 고대와 중세기까지는 정치와 종교 간의 균형과 질서를 유지했고, 정치력이 강한 군왕이 나올 때는 교회가 순응하고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는 교황권이 등장할 때는 지상권자인 황제가 그 뜻을 따르면서 15세기까지의 중세기는 큰 동요가 없었다.

그러나 16세기 기독교가 극단적으로 양분되어 각축을 벌이고, 종교 당사자들로서는 해서는 안 될 폭력과 살생을 일삼다가 세속사회로부터 속을 보이는 꼴이 되었다. 응! 그렇게 해도 “거룩”을 보존할 수 있어? 그 정도의 “도덕력”을 가지고도 “하나님의 얼굴”을 마주 볼 수 있는 거야? 그렇다면 우리와 너희 기독교의 차이는 별 것 아니로군, 하면서 “사단의 세력들”이 들고 일어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민심을 도적질해 가는 사태가 오고 말았다. 바로 그때가 무신론자들의 어머니 세력인 “계몽기” 품안에서 세계사를 송두리채 뒤집어버린 무신론자들을 대거 생산해냈다.

1. 헤겔 좌파의 총아인 마르크스와 니체
 

우리는 헤겔(AD 1770~1931), 칼 마르크스(AD 1818~1883), 니체(AD 1844~1900)를 대강 알고 있다. 그들의 사상보다는 그들이 사회주의자들이고 무신론에 기초한 사상가들이기도 하다는 정도는 말이다.
특히 마르크스는 헤겔 좌파의 우등생으로 독일과 영국을 오가면서 ‘자본론’을 썼다. 가난한 소외자로서 어려움 중에도 그는 사회주의 사상가로 지금까지도 큰 이름을 지키고 있다.
그런데 칼 마르크스가 세상을 떠났던 1883년까지도 유럽에는 사회주의 조직은 거의 없었다고 <유럽 좌파의 역사> 책을 쓴 제프 일리는 말하고 있다. 그의 책 77쪽의 기록을 보면 당시 유럽은 독일의 통합사회주의노동당과 덴마크 및 네덜란드의 사회주의 민주연합, 합스부르크제국의 체코, 헝가리 지역의 신생 정당들, 프랑스의 사회주의 연맹,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허약한 네트워크 등이 사회주의 기반의 전부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동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세상을 떠나는 1895년 무렵에 이르면 유럽의 모든 주요지역에 신속하게 사회주의 조직이 세워지고 있었다고 말한다.
드디어 1900년대 초에 이르면 사회주의 정당들이 유럽 전 지역에 단단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를 비판하기 시작한 지 30여 년도 되지 못해 유럽의 절반 가까운 사람들이 사회주의 쪽으로 흘러감에 대해 유럽 기독교는 예민하게 살펴야 했었다.
 

2. 무장하지 않은 무신론자들
 

기독교는 계몽기 사상가들이 맹렬하게 활동하던 18세기 이후에는 차츰 잠잠해지지 않을까 하는 안일한 생각을 했을지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18세기 초에 일어난 할레대학의 슈페너 운동이 경건주의의 틀을 유지하면서 후기 루터운동에 불을 붙일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진센도르프나 잉글랜드의 대중적인 복음운동의 요한 웨슬리, 조지 휫필드, 이어서 뉴잉글랜드(미국)의 조나단 에드워드 등이 일으킨 대각성 운동은 프로테스탄트 운동이 아시아로 확산되는 길잡이 가 됐다. 대각성 운동은 인도나 중국, 그리고 한국으로 이어지면서 대각성운동기 막내아들쯤 되는 빌리그레함의 1973년 한국의 여의도 집회가 다음 세대로 바통을 넘기는 때까지 성장했다고 보았다.

유럽 프로테스탄트는 계몽기 이성철학자들이 좌파로 기울다가 드디어 19세기로 넘어가면서는 할레의 경건주의 운동의 막내인 슐라이어마허가 베를린대학으로 와서 공부하면서 헤겔을 만난다. 헤겔은 슐라이어마허는 견제할 수 있었으나 임마누엘 칸트를 뛰어넘지 못해 자기 사상에 있어서 좌우 틈새를 보였고, 헤겔의 좌파들 중에 포이에르 바하나 특히 천재적인 사상가인 칼 마르크스를 역사의 무대 위에 내놓고 말았다.
 

3. 무장한 무신론자들
 

칼 마르크스는 야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쉽게 말해서 종교는 아편이라고 일갈해 버린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운동은 앞서 말한 대로 마치 요원의 불길처럼 타올라 19세기 유렵을 자기네의 무대로 만들어가려 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뜻을 이루었다. 특히 1917년 러시아의 10월 혁명으로 탄생한 소비에트연방은 1991년 냉전 종식기에 이르기까지 러시아와 동유럽, 서유럽의 일부는 물론, 아시아의 주요 국가들을 지배하면서 수천만 명 이상의 인명을 살상했고, 그들 공산당 정권 절대다수가 유럽 기독교의 1천여 년 이상의 터전이었음을 기독교는 잊지 말아야 한다.
 

4. 독일 루터주의의 한계
 

니체를 생각해보자. 니체의 가문은 17세기 초부터 독일 루터교 가문이었다. 그의 부친, 친할아버지, 그리고 외할아버지도 모두 독일 루터파 교회 목사였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목사관에서 생활했다.

니체의 가정사는 1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도 프로테스탄트 신앙의 전승을 충분히 이었다. 그러나 16세기 루터의 개혁운동은 그 출발은 소수자에서였고, 1521년 보름스 의회에서 카를 5세의 심문을 받은 후, 작센주 선제후 프리드리히 공으로부터 보호받았다. 로마 가톨릭이 교황권의 보호를 받는 것이나 크게 다를 바 없는 외형세는 교황권과 독일의 봉건영주들의 양분된 세력의 한쪽이었다.

니체 가문의 신앙전통을 잠시 떠올려보면서 니체가 19세기 유럽 정치와 사상사의 무대에서 반 기독교적인 세력으로 편입되어버린 그 사회의 비극성을 생각해보는 것이다.

18, 19세기 유럽의 무신론, 더 나아가서 반(反) 신론의 유럽 처지를 생각하게 되고, 그들 주요 인물들인 니체, 마르크스, 포이에르 바하, 헤겔까지도 거슬러서 생각해봐도 16세기 프로테스탄트의 신학과 구조에서 빈틈을 찾아보는 지혜가 필요할 듯하다.

시대의 탓을 하자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벌써 몇 주째 조심스럽게 살펴보고 있는 루터 등장 이후 서유럽 중심의 안타까운 한계를 말하고 있다. 여기서 한 인물, 프리드리히 니체의 가정, 더 거슬러 올라가서 16세기 말까지 추적이 가능한 정통 루터파 기독교 집안의 니체였으나 그들이 모두 겪어야 할 19세기 중후반은 매우 혹독한 시대였다.

니체는 1865년 경 신학공부를 포기했다. 니체가 본대학에서 공부할 때 그의 누이동생의 편지에 답장을 보냈는데 그가 쓴 편지 말미에, “그러나 진실한 믿음은 객관적 진리를 입증하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아. 여기서 인간의 길이 나뉜다. 만일 네가 영혼의 평화와 행복을 원한다면 믿어라. 하지만 네가 진리의 사도가 되고 싶다면 질문하라”고 썼다.

니체는 영혼의 평화가 아닌 객관적 진리를 찾아가겠다는 표현을 분명히 했다. 니체는 가문 대대로 승계해오던 루터파 교회 목사의 길을 포기한다. 본대학과 라이프치히대학에서 문헌학을 공부하면서도 시를 쓰고 음악에 몰두했다. 리츨 교수의 눈에 들어 스물네 살에 교수가 되고 시험을 보지 않고 교수 추천으로 박사가 된다.

1869년 바젤대학 교수로 부임한 니체는 스무 살 무렵부터 매독에 걸려 고생했고, 몸이 허약하다는 이유로 병가를 얻기도 했으며, 병원 출입이 잦았다. 그는 정신적으로 피곤하고 육체적으로 병약해 하나님이 주신 평안을 지켜내지 못하면서 청년기를 보낸다. 바그너와 친교를 나누고, 쇼펜하우어나 다윈 그리고 그리스인들과 사귐의 폭을 넓히면서 니체는 아시아의 문을 연다. 그리고 그는 형이상학적 체계에 머물러 있는 쇼펜하우어를 떠나 유물론으로 방향을 잡는다.

1879년 부활절 절기에 니체는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졌다. 그해 이후로는 정상적인 사회활동을 거의 못했다.

저항하는 인간형으로 마르틴 루터의 성향과 니체의 영혼이 가끔씩 마주친다. 니체가 살았던 19세기는 프로테스탄트의 환경변화를 갈망하는 시대와의 만남이 아닐까?

니체가 짜라투스트라의 품에 의존해 그의 영혼의 위안을 얻고자 했던 한계는 19세기 프로테스탄트 유럽의 한계요 비애라고 하면 논리 비약일까? 니체는 짜라투스트라, 시절에(1882년 이 작품을 쓰는 기간에) 스스로 신(神)의 길을 모색한다. 그는 초인이라 하지만, 또 그 초인을 자기 자신과 마주치게 하려 들지는 않았다. 이미 축복의 자리(프로테스탄트 루터 목사 가문)를 내팽개친 이상 그의 영혼은 이 초인! 또는 대지의 어머니로서의 초인에게 의탁할 수밖에 없었다.
 

1) 프로테스탄트 가문의 초인
초인일 수 있다. 그러나 철학적인 배경을 뛰어넘어 니체는 짜라투스트라, 곧 조로아스터교의 아후라 마스다가 되고 싶었고, 그래서 추상적 이름으로 “초인”을 말한다. 초인은 초월자이니, 제2의 기독교, 또는 기독교 배반의 모반자일 수 있다.

그러나 니체는 결국 ‘신은 죽었다’는 철학적 표현으로 유럽 기독교의 실패를 말하고 있다. 니체의 발언에 대해 유럽 기독교가 얼마만큼의 비중을 두느냐가 문제이기는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니체는 유럽 프로테스탄트를 대체할 종교를 만들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에 짜라투스트라 또는 “초인”을 모시고, “초인의 은총”을 기다리며, 기독교의 부활(영생) 대신 “영원 회귀”를 마치 삼위일체처럼 배치하는 니체를 보게 된다. 그리고 그는 자신 있게 노래한다.

“오! 짜라투스트라여, 노래하라! 그리고 포효하라! 새로운 노래로 그대의 영혼을 치유하라! 이제껏 누구에게도 부여된 적이 없는 그대의 위대한 운명을 견뎌낼 수 있도록! …오! 짜라투스트라여, 그대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를…. 보라! 그대는 영원 회귀를 가르치는 자이다….”

2) 유럽기독교와 니체의 예수
니체는 문헌학자 신분으로 기독교의 성경해석 방식을 비판한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얼마나 사랑하고 프로테스탄트 기독교를 얼마나 혐오하는지를 여기에 얼마간의 내용을 적어본다. 니체가 가슴 속에 묻어 두었다가 뒤늦게 정리한 책자 <안티 크리스트>의 일부이다.

기독교는 충분한 교육을 받았거나 분별력이 있는 사람은 이런 종교를 믿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니체는 예수의 인물평을 악에 대한 무저항주의라고 했다. 악에 저항하지 말라, 이것이 복음의 심오한 가치이다. 평화, 온화함, 적개심을 가지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기쁜 소식”이란 더는 반대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천국은 아이들의 것이다.

예수의 신앙은 탓하지 않으며, 화내지 않으며, 자신을 방어하지 않는다. …그것은 기적으로, 보상, 약속, 심지어는 “경전”으로도 자기를 변명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 자체가 모든 순간마다 기적이고, 보상이며, 신의 왕국이기 때문이다. 좀 더 자유롭게 표현한다면 예수를 “자유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복음”이라는 것에는 죄와 벌이라는 개념이 빠져 있다. 보상이라는 개념도 마찬가지다. 죄, 다시 말해 신과 인간 사이를 멀어지게 하는 모든 종류의 관계는 폐지된다. 바로 이것이 기쁜 소식이다. 행복은 약속된 것이 아니며 어떤 조건에 묶여 있지도 않다.

천국이란 마음의 상태다. 현세에, 또는 사후에 오는 어떤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기다림의 대상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제도 없고 내일도 없다. 그것은 천년 후에 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마음속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이 기쁜 소식을 가지고 온 사람은 자기가 살았던 대로, 가르친 대로 살고 죽었다. 인류를 위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가 인류에게 남겨놓은 것은 그의 실천이다. 재판관 앞에서, 간수 앞에서, 고발자의 온갖 비방과 조소 앞에서 보였던 그의 태도,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보여주었던 태도, 그는 저항하지 않았다. 자신의 권리를 변호하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한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에게 악을 행하는 자들 속에서 그들과 함께 간구하고 괴로워하며 사랑하였다. 자기를 방어하지 않았다는 것, 화내지도 않았다는 것, 책임을 물으려 하지 않았다는 것, …악한 자에게조차도 저항하지 않았다는 것, 그는 사랑하기만 했다는 것이다.

니체는 또 다시 말한다. 우리들의 퇴폐주의자 이웃에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인물이 없었다는 것에 유감스러워했으면 한다. 숭고한 것, 어린애 같은 것의 결합이 보여주는 감동적인 인물의 매력이 그립다. 예수는 저항하지 않는 것, 다른 뺨마저 내미는 것을 통한 구원을 가르치셨다. 니체는 한 인간으로서의 예수를 사랑하고 존경했다. 한 사람, 그 한 사람의 기독교인, 복음이 십자가 위에서 죽었다. 기독교적 실천만이, 오직 십자가 위에서 죽은 사람이 살았던 것과 같은 삶이 기독교이다. 오늘날에도 그런 삶이 가능하며, 필수적이기도 하다. 진정한 기독교, 원시 기독교의 모습이 참으로 그립다. 여기서 “그립다”라는 표현은 니체의 “가능하다”를 문학적으로 필자가 바꾸어서 적는다.

3) 니체의 인생도 유럽 프로테스탄트의 희생물이 아니었을까?
니체의 예수에 대한 그리움은 그의 글 “안티 크리스트”에 많이 남아 있다. 지면 관계로 여기서 줄이면서 니체의 마음에 기독교를 대신해 위로를 보낸다. 필자는 “신은 죽었다”라는 표현을 한 니체의 발언을 어릴 때부터 배워서 알고 있는데 그 해석법은 반어(反語) 처리해야 한다고 해석했었다. 신 곧 하나님이 죽은 것이 아니라 유럽 기독교가 죽었다. 2백여 년 동안 루터파 기독교 목사의 가문인 그의 가족, 조상들의 기독교마저도 죽었다고 니체는 표현한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필자는 니체의 영혼을 위로하고, 상처뿐인 니체의 인생과정에 연민을 깊이 느낀다. 

왜 니체는 미쳐버렸을까? 누가 그를 미치광이로 만들었을까? 그가 살았던 그 시대다. 니체의 글 “안티 크리스트” 내용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동족인 마르틴 루터가 선두에 서서 이룩한 프로테스탄트 종교혁명의 자식들의 삶은 너무 달랐다. 로마 가톨릭의 야만적인 시대를 끝내고 기독교의 모습을 원형 가까이로 이끌어간다, 고 일으킨 프로테스탄트 기독교가 날마다 하는 일이 상대방을 짓밟고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한 폭력과 살생이니 유럽 하늘과 땅을 더럽히는 그 피냄새에 니체는 미쳐버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 16세기 이후 프로테스탄트가 로마 가톨릭과 비교할 때 그 수준이 비슷하다면 과연 개혁운동은 왜 필요했을까? 니체 시대 이후 1,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니체는 1,2차 세계대전의 비극을 보지 않고 세상을 떠나는 행운이 있었다.

실패로 끝난 20세기까지의 유럽 주도의 기독교 개혁, 21세기 세계교회는 다시 해야 한다. 지난 5백년의 과오나 시행착오의 반복을 피해야 한다. 니체까지도 그의 “안티 크리스트”에 표현하고 있는 예수의 모습을 바르게 찾아서 세우는 21세기형 기독교 모범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사단에게 포위된 기독교의 전선을 제 위치로 이끌어내야 한다.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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